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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人祢軍墓誌の「日本」

 昨年十一月の関西例会で水野さんから紹介された「百済人祢軍墓誌」ですが、どうやらこの墓誌は九州王朝説に大変有利な内容を含んでいるようです。現在、墓誌拓本のコピー入手を試みていますが、新聞発表などでわかる範囲で、見解を述べてみたいと思います。
 この墓誌は百済人の祢軍(でいぐん・ねぐん)という人物の墓誌で、六七八年二月に長安で没して同年十に埋葬されたと記されています。残念ながら墓誌そのものは行方不明ですが、その拓本が中国の学者から紹介されました。王連竜さん(吉林大学古籍研究所副教授)が「社会科学戦線」七月号で発表された「百済人祢軍墓誌論考」という論文です。中国在住の青木さん(「古田史学の会」会員)のご協力により、同論文を読む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場をお借りして御礼申し上げます。
 墓誌の中に「日本」という表記があり、これは現存最古の「日本」ということで、マスコミは取り上げています。これはこれですばらしい史料なのですが、実はそれ以外に大変興味深い記事が記されています。
 たとえば「僣帝一旦称臣」という記事です。くわしい解説は拓本コピーで確認した後にしたいと思いますが、この「僣帝」とは誰なのか、百済王なのか、倭王なのかというテーマです。関西例会後の懇親会でも喧々囂々の論争を行いました。墓誌の文脈から判断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倭王の可能性も高く、もしそうであれば九州王朝の天子、薩野馬の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白村江戦で敗北し、捕らわれの身となった薩野馬であれば、「僭帝一旦称臣」という表現がぴったりです。少なくとも大和朝廷にはこのような天皇がいた記録はありません。
 この他にも、「日本余?、据扶桑以逋誅」という記事がありますが、朝日新聞(2011/10/23)によれば、白村江戦で敗れた「生き残った日本は、扶桑(日本の別称)に閉じこもり、罰を逃れている」と解説されています。
 唐代において扶桑は東方にある国と認識されており、「日本の別称」という説明は必ずしも正確ではありません。従って、ここは日本の残存勢力が日本(倭国)の更に東に籠もって抵抗を続けていると解すべき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すると、扶桑とされた地域は近畿、あるいは東海か関東のいずれかと思われます。

 九州王朝説の立場から見れば、倭国・九州王朝の中枢領域である九州の更に東ということになりそうです。以前、わたしは「九州王朝の近江遷都」という論文で、白鳳元年(六六一)に九州王朝は近江遷都し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説を発表しました。すなわち、白村江戦の直前に九州王朝は近江に遷都したと理解したのです。こうした視点からすると、日本残存勢力が籠もったとする扶桑とは、近江宮か前期難波宮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墓誌拓本そのものを見ていませんので、まだアイデア(思いつき)の段階ですが、この墓誌の内容のすごさが予感されるのです。今後、拓本精査の上、詳論したいと考えています。





白村江の戦い(663年)の後、唐側の使者として665年に来日した百済人、祢軍の墓誌が中国で見つかり、その中に「日本」という文字があり、「最古の国号」ではないかと注目されている。

白村江の戦いの翌年、天智天皇三年(664)五月に郭務悰らが派遣されている。天智天皇四年九月に、唐の使者劉徳高等が来たと書かれており、「等」とは百済禰軍と郭務悰のことだと書かれています。

朝日新聞(2011年10月23日)
中国の古都・西安で見つかった墓誌(故人の事績を刻んで墓に収めた石板)に、「日 本」との文字があることを紹介する論文が中国で発表された。墓誌は 678 年の作と考えら れるとしている。日本と名乗るようになったのはいつからなのかは古代史の大きななぞ。 大宝律令( 701 年)からとの見方が有力だったが、墓誌が本物ならさらにさかのぼること になる。 ・・・祢軍(でいぐん)という百済(くだら)人の軍人の墓誌で1辺59センチの正方形。
884 文字あり、 678 年 2 月に死亡し、同年10月に葬られたと記されている。 百済を救うために日本は朝鮮半島に出兵したが、 663 年に白村江(はくそんこう)の戦い で唐・新羅(しらぎ)連合軍に敗れる。その後の状況を墓誌は「日本餘噍據扶桑以逋誅」 と記述。「生き残った日本は、扶桑(日本の別称)に閉じこもり、罰を逃れている」とい う意味で、そうした状況を打開するため百済の将軍だった祢軍が日本に派遣されたと記し ていると気賀沢教授は説明する。」以上

気賀沢教授の解釈
碑文の「日本餘噍據扶桑以逋誅」を原文に従って読めば、「日本の餘噍は、扶桑によって、もって誅からにげる。」となる。
「扶桑」は、中国神話で東方にある太陽を生む樹と言われ、同じく東方にある日本をも指す。

「據」は、「依也。引也。援也。拒守也。」(『康煕字典』)。
「逋」は、「亡(にげる)也」(『説文』)。
「誅」は、「小國敖、大國襲焉、曰誅。<小国おごり、大国これを襲うことを誅という>」(『晋語』)、「罰也」(『玉篇』)。
しかし、気賀沢教授の「生き残った日本は、扶桑(日本の別称)に閉じこもり」という解釈はどこから出てくるのか? また「扶桑」を「日本」とすれば、「日本に依って」となり、意味は「日本に守られて」となる。これでいくと語句先頭の「日本」と「国」の意味
の詞が重複する。気賀沢教授はこの「日本」の文字を「国号」と考えているようです。

墓誌の主人公である「祢軍」であるが、『日本書紀』にも彼の記事が下記のようにある。
『日本書紀』天智天皇四年(六六五)九月壬辰《廿三》 「唐國遣朝散大夫沂州司馬馬上柱國劉徳高等〈等謂右戎衛郎將上柱國百濟禰軍。朝散 大夫上柱國郭務○。凡二百五十四人。七月廿八日至于對馬。九月廿日至于筑紫。廿二日進表函焉。〉」
「右戎衛郎將上柱國百濟禰軍」が「祢軍」である。
時期としては百済が「唐、新羅 連合軍」により滅亡に追いやられた時期にあたり、その中の「白村江の戦い」とは、「日 本、百済残党連合軍」と「唐、新羅連合軍」が対峙した一つの戦いである。(結果は「日 本、百済残党連合軍」の惨敗に終わる。)

祢軍は、その碑文冒頭に「公諱軍、字温、熊津蝸夷人也。」とあるように百済の人であ る。続いて「其先與華同祖、永嘉末、避亂適東、因遂家焉。」とあり、その祖先は、西晋 末の時に「永嘉の乱」をのがれてきた中国人であると言う。そして百済に臣下として仕 え、「曾祖福、祖譽、父善、皆是本藩一品、官號佐平。」とあるように、曾祖父、祖父、 父が「佐平」と言う百済で最高位の官職を務めた家柄でもあったと記す。『海外国記』に は「・・・百済佐平禰軍」とあり、彼自身も「佐平」の地位にあったものと思われる。 次に、「去顯慶五年( 660 年)官軍平本藩日、見機識変、杖劍知歸、似由余之出戎、如金 磾之入漢。」<去る顯慶五年( 660 年)、官軍(唐軍)本藩(百済)を平らぐ日、機を見 て変を識って、剣を杖つき、(唐に)帰すことを知る。(これ)由余の戎を出でることに 似、金磾の漢に入るが如し。>と碑文にあります。
「由余」は、西戎の人だが先祖は中国人。
「金磾」は、元匈奴の人だが後に漢の臣下となる。
顯慶五年( 660 年)とは、百済王(義慈王)とその王子(扶餘隆)が、唐に降り「百済王 朝」が滅亡した年で、日本では斉明天皇六年にあたる。碑文での「官軍」とは「唐軍」で あり、それに抵抗した「百済」は「賊軍」扱いと言える。そして「聖上嘉嘆、擢以榮班授 右武衛滻川府析衝都尉。」<聖上(唐の高宗)がほめ嘆じて、あげるに、栄班をもって し、右武衛滻川府析衝都尉を授ける。>と彼は唐の官職を受け、唐の臣下になったことを 記す。

この文言の直後に「于 時日本餘噍、據扶桑以逋誅。風谷遺氓、負盤桃而阻固。」とある。
碑文に「于時日本餘噍・・・」<時に、日本の餘噍・・・>とあるので、時期としてはこの顯慶五年であろう。この時期の『日本書紀』での記述は、
『日本書紀』斉明天皇六年(六六〇)九月癸卯《五》 「百濟遣達率。〈闕名〉沙彌覺從等來奏曰。〈或本云。逃來告難〉今年七月。新羅恃 力作勢不親於隣。引搆唐人。傾覆百濟。君臣總俘、略無噍類。・・・ 於是西部恩率鬼室福信赫然發憤據任射岐山。〈或本云。北任叙利山〉達率餘自進據中 部久麻怒利城。〈或本云。都々岐留山。〉各營一所誘聚散卒。兵盡前役。故以庁戰。 新羅軍破。百濟奪其兵。既而百濟兵翻鋭。唐不敢入。福信等遂鳩集同國。共保王城。 國人尊曰佐平福信。佐平自進。唯福信起神武之權。興既亡之國。」
ここに、百済が滅亡し、その王族の一員である福信が百済残党のリーダーとなり、唐、新 羅連合軍に抵抗活動を続け、日本側に、日本にいる「王子豐璋」を迎えて百済王とし、亡 国を復興することや援軍を求め、斉明天皇がそれらを決定するまでが記述される。つまり この時期は 660 年であり、 663 年の「白村江の戦い」の前と言える。 また唐側史料と言える『資治通鑑』「巻二百唐紀十六高宗上之下」に、「主上欲滅高 麗、故先誅百済」とあり、その原因と「誅」の対象は「百済」であることが簡潔に述べら れる。

 「書紀」によれば「救援軍派遣」は「百済滅亡」の一年後である「六六一年八月」であり、また「倭国」に「人質」となっていた「扶余豊」を「百済国王」に据えるべく派遣したのが翌九月とされています。
 しかし、この記事自体がすでに「旧唐書」や「資治通鑑」とも食い違っていると考えられるのです


booq가 또 거짓말했습니다.

(쿠다라)백제인이군묘지의 「일본」

 작년 11월의 칸사이 예회에서 미즈노씨로부터 소개된 「(쿠다라)백제인이군묘지」입니다만, 아무래도 이 묘지는 큐슈 왕조설에 몹시 유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현재, 묘지 탁본의 카피 입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신문 발표등에서 아는 범위에서, 견해를 말해 보고 싶습니다.
 이 묘지는 (쿠다라)백제인의 이군(로 있어 군·이군요 군)이라고 하는 인물의 묘지로, 678년 2월에 장안에서 잠겨 동년10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유감스럽지만 묘지 그 자체는 행방 불명입니다만, 그 탁본이 중국의 학자로부터 소개되었습니다.왕련류씨(요시바야시 대학고적연구소 부교수)가 「사회과학 전선」7월호로 발표된 「(쿠다라)백제인이군묘지 논고」라고 하는 논문입니다.중국 거주의 아오키씨( 「후루타 사학의 회」회원)의 협력에 의해, 동논문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이 장소를 빌려 사례 말씀드립니다.
 묘지안에 「일본」이라고 하는 표기가 있어, 이것은 현존 최고의 「일본」이라고 하는 것으로, 매스컴은 채택하고 있습니다.이것은 이것입니다 분해해 있어 사료입니다만, 실은 그 이외에 몹시 흥미로운 기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참제일단칭신」이라고 하는 기사입니다.자세한 해설은 탁본 카피로 확인한 뒤로 하고 싶습니다만 , 와 의 「참제」란누구인가, (쿠다라)백제왕인가, 야마토왕인가라고 하는 테마입니다.칸사이 예회 후의 친목회에서도 훤들효들의 논쟁을 실시했습니다.묘지의 문맥으로부터 판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만, 야마토왕의 가능성도 높고, 만약 그렇다면 큐슈 왕조의 천자, 살방목말로는 없을까요.
 백촌강전에서 패배해, 잡혀의 몸이 된 살방목말이면, 「참제일단칭신」이라고 하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적어도 야마토 조정에는 이러한 천황이 있던 기록은 없습니다.
 이 그 밖에도, 「일본여?, 거후소이포주」라고 하는 기사가 있어요가, 아사히 신문(2011/10/23)에 의하면, 백촌강전에서 진 「살아 남은 일본은, 후소(일본의 별칭)에 두문불출해, 벌을 피하고 있다」라고 해설되고 있습니다.
 당대에 대해 후소는 동방에 있는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어 「일본의 별칭」이라고 하는 설명은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따라서, 여기는 일본의 잔존 세력이 일본(야마토국)의 더욱 동쪽으로 롱 가지고 저항을 계속하고 있으면 해석해서는 안될까요.하면, 후소로 여겨진 지역은 킨키, 있다 있어는 토카이나 관동의 언젠가라고 생각됩니다.

 큐슈 왕조설의 입장에서 보면, 야마토국·큐슈 왕조의 중추 영역인 큐슈의 더욱 동쪽이라는 것이 될 것 같다?`나.이전, 나는 「큐슈 왕조의 오오미 천도」라고 하는 논문으로, 하쿠호우 원년(661)에 큐슈 왕조는 오오미 천도 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설을 발표했습니다.즉, 백촌강전의 직전에 큐슈 왕조는 오오미에 천도 했다고 이해했습니다.이러한 시점으로는, 일본 잔존 세력이 롱 가졌다고 하는 후소와는, 오오미궁이나 전기 나니와궁이라는 것이 됩니다.
 묘지 탁본 그 자체를 보고 있지 않으므로, 아직 아이디어(착상)의 단계입니다만, 이 묘지의 내용의 대단함이 예감 됩니다.향후, 탁본 정밀 조사 위, 상세한 논의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촌강의 싸움(663년)의 뒤, 당측의 사자로서 665년에 일본 방문한 (쿠다라)백제인, 이군의 묘지가 중국에서 발견되어, 그 중에 「일본」이라고 하는 문자가 있어, 「최고의 국호」는 아닐까 주목받고 있다.

백촌강의 싸움의 다음 해, 텐지천황 3년(664) 5월에 곽 츠토무등이 파견되고 있다.텐지천황4년 9월에, 당의 사자류덕고등이 왔다고 쓰여져 있어 「등」이란 (쿠다라)백제녜군과 곽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아사히 신문(2011년 10월 23일)
중국의 코도·서안이라고 발견된 묘지(고인의 업적을 각응이라고 무덤에 거둔 석판)에, 「일본」이라는 문자인가 있다 것을 소개하는 논문이나 중국이라고 발표되었다.묘지는 678 년의 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일본이라고 자칭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는 고대사의 대나무인. 다이호 율령( 701 년)으로부터라는 견해나 유력 끊었는지, 묘지나 진짜라면 한층 더 나 것이 된다. ···이군(라고 가는 )이라고 하는 (쿠다라)백제(등) 인의 군인의 묘지라고 1변 59센치의 정방형.
884 문자 있어, 678 년 2 월에 사망해, 동년 10월에 매장해졌다고 기록되고 있다. (쿠다라)백제를 구하기 위해서 일본은 한반도에 출병했는지, 663 년에 백촌강(입는 손실)의 싸움이라고 당·신라(해들 나무) 연합군에 진다.그 후의 상황을 묘지는 「일본여거후소이포주」라고 기술.「살아 남은 일본은, 후소(일본의 별칭)에 폐 해 가득차, 벌을 피하고 있다」라고 하는 의미라고,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때문에) (쿠다라)백제의 장군 선 이군이나 일본에 파견되었다고 적고 있을 생각하택교수는 설명한다.」이상

기하택교수의 해석
비문의 「일본여거후소이포주」를 원문에 따라서 읽을 수 있는은, 「일본의 여는, 후소에 의해서, 따라서 주로부터에 찬다.」가 된다.
「후소」는, 중국 신화라고 동방에 있는 태양을 낳는 수라고 말해져 동의해 구동방에 있는 일본도 가리킨다.

「거」는, 「의야.인야.원야.거수야.」( 「야스히로 사전」).
「포」는, 「망(에 찬다) 야」( 「설문」).
「주」는, 「소국오, 대국습언, 왈주.<오구니 일어나, 대국 이것을 덮치는 것을 주라고 한다>」( 「진어」), 「벌야」( 「옥편」).
그러나, 기하택교수의 「살아 남은 일본은, 후소(일본의 별칭)에 폐 해 가득차」라고 하는 해석은 곳으로부터 나오는지? 또 「후소」를 「일본」이라고 스쳐는, 「일본에 의는」이 되어, 의미는 「일본에 지켜져서」가 된다.이것이라고 간다고 어구 선두의 「일본」과「나라」의 의미
의 사나 중복 한다.기하택교수는 이 「일본」의 문자를 「국호」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묘지의 주인공이라고 있다 「이군」이라고 있다인가, 「일본 서기」에도 그의 기사인가 아래와 같이 있다.
「일본 서기」텐지천황4년(665) 9월임진《입3》「당국견조산대부기주 시바 말등주국류덕고등〈등 위우 에비스위낭장상주국백제녜군.아침 산대부상주국곽무○.범2백 54명.7월입8일지우대마.9월입일지우치쿠시.입이틀진표함언.〉」
「우 에비스위낭장상주국백제녜군」인가 「이군」이라고 있다.
시기로서는 (쿠다라)백제인가 「당, 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에 쫓아 버려졌던 시기에 해당해, 그 중의 「백촌강의 싸움」이란, 「일본, 쿠타라 잔당 연합군」과「당, 신라 연합군」이나 대치한 하나의 싸움이라고 있다.(결과는 「일본, 쿠타라 잔당 연합군」의 참패에 끝난다.)

이군은, 그 비문 모두에 「공휘군, 자온, 웅진와미개인야.」라고 있다 게(쿠다라)백제의 사람이라고 있다.계속 되어 「기처여화 동선조, 영가말, 피란적동, 인수가언.」라고 있어, 그 조상은, 서진말때에 「영가의 란」을의 그라고 온 중국인이라고 있다라고 말한다.그리고 (쿠다라)백제에 신하로서 시중들어 「증조부복, 조예, 부선, 모두시본번일품, 관 호사헤이.」라고 있다 게, 증조부, 조부, 아버지인가 「사헤이」라고 하는 (쿠다라)백제라고 최고위의 관직을 맡은 집안이라고도 있었다고 적는다.「해외 국기」에는 「···(쿠다라)백제 사헤이녜군」이라고 있어, 그 자신도 「사헤이」의 지위에 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거현경5년( 660해) 관군 히라모토번일, 봐 기식변, 장검지귀, 닮아 유여지출융, 여금지입한.」<떠나는 현경5년( 660 년), 관군(당군) 본번((쿠다라)백제)을 평지구일, 기를 보고 변을 식은, 검을 지팡이 다해(당에) 돌려 보내는 것을 안다.(이것) 유여의 융을 나오고 있는 일을 닮아 돈의 한에 들어가는지 여 해.>(와)과 비문에 있습니다.
「유여」는, 서융의 사람나 선조는 중국인.
「금」은, 원흉노의 사람나 후에 한의 신하가 된다.
현경5년( 660 년)이란, (쿠다라)백제왕(의자왕)과 그 왕자(부여륭)인가, 당에 내려 「(쿠다라)백제 왕조」나 멸망 한 해라고, 일본이라고는 사이메이 천황6년에 해당한다.비문이라고의 「관군」이란 「당군」이라고 있어, 거기에 저항한 「(쿠다라)백제」는 「적군」취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리고 「성상가탄, 탁이영반수 오른쪽무위천부석충도위.」<성상(당의 고종) 화원째탄 하고, 여는에, 영반을 가지고 해, 오른쪽무위천부석충도위를 하사한다.>(와)과 그는 당의 관직을 받아 당의 신하가 된 것을 적는다.

이 문언의 직후에 「우시일본여, 거후소이포주.풍곡유맹, 부반도이조고.」라고 있다.
비문에 「우시일본여···」<때에, 일본의 여···>어떤의 것이라고, 시기로서는 이 현경5년이라고 있을것이다.이 시기의 「일본 서기」라고의 기술은,
「일본 서기」사이메이 천황6년(660) 9월계묘《5》 「백제견들율.〈궐명〉사미각종등 래주왈.〈혹본운.도래고난〉금년 7월.신라시역작세불친어린.인구중국인.경복백제.군신총부, 약어 비길 데 없음. ··· 어시서부은율 무서운 실복신혁연발분거임 쏘아 맞혀 기산.〈혹본운.북임서리산〉들율 여자진거나카베 히사시마로리성.〈혹본운.도들기류산.〉각 영한 곳유취산졸.병진전역.고 이청전. 신라군파.백제탈기병.기이백제병번예.당불감입.복신등 수 비둘기집 동국.쿄호 왕성. 국인존오사 히라후쿠신.사헤이자진.다만 복신 오코시 카미타케지권.흥기망지국.」
여기에, (쿠다라)백제나 멸망 해, 그 왕족의 일원이라고 있다 복신이나 (쿠다라)백제 잔당의 리타가 되어, 당, 신라 연합군에 저항 활동을 계속해 일본 측에, 일본에 있는 「왕자풍장」을 맞이해 (쿠다라)백제왕으로 해, 망국을 부흥하는 것이나 원군을 요구해 사이메이 천황이나 그것들을 결정하는 기다릴 수 있는인가 기술된다.즉 이 시기는 660 년이라고 있어, 663 년의 「백촌강의 싸움」의 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또 당측 사료라고 말할 수 있는 「자치통감」 「2권백당기 16 고종 우에노하」에, 「주상욕구멸고려, 고 처 주(쿠다라)백제」라고 있어, 그 원인과 「주」의 대상은 「(쿠다라)백제」라고 있다 일인가 간결하게 술 줄어진다.

 「서기」에 의하면 「구원군파견」은 「(쿠다라)백제 멸망」의 일년 다음에 있다 「661년 8월」이며, 또 「야마토국」에 「인질」이 되고 있던 「부여풍」을 「(쿠다라)백제 국왕」에 앉힐 수 있도록 파견한 것이 다음달 9월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 자체가 벌써 「 구구당서와 신당서의 병칭」이나 「자치통감」이라고도 어긋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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