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同胞は金持ち」「(朴正煕〈パク・チョンヒ〉大統領夫人の)陸英修(ユク・ヨンス)女史を殺害した文世光(ムン・セグァン)は在日韓国人だった」。1970・80年代の新聞の社会面を通して見た在日同胞は「金づる」と「アカ」、そのどちらかだった。テレビで「タレント」の鄭大世(チョン・テセ)を見た。名古屋生まれのこの韓国人は、2011年まで北朝鮮のサッカー代表としてプレーし、韓国のプロ・サッカー・チームに入団した。北朝鮮問題で彼の入国に反対する者も少なくなかった。個人の努力、韓国人との結婚、スポーツ選手に思想的な物差しを当てはめてはならないという国民的合意が騒動を鎮めた。
韓国を離れて日本に定着した「在日同胞」はおよそ80万人(日本の出入国在留管理庁)。このうち日本国籍の取得者が36万人、韓国籍の者が43万人(韓国の住民番号がない者26万人を含む)、朝鮮籍(無国籍)の者が2万4000人だ。在日韓国・朝鮮人の総数は「100万-150万人」ともいう。
米国・スペイン・スリナムなど世界各地の在外韓国人は合わせて700万人だ。このうち、旧韓末から日帝強占期にかけて祖国を離れた人々は「流民」に似ている。貧しさゆえに、または独立運動のために、あるいは徴用により「非自発的」理由で故郷を離れ、中国・旧ソ連・日本に定着した。
とりわけ共産圏の移住民の暮らしは悲惨で、近ごろ帰還した人々を「独立運動家の子孫」だとして集落づくりに乗り出す自治体が幾つかある。強制移住させられた「サハリン韓人」には、特別法を通して別途に国籍の回復も行った。先進国・韓国は今や「ルーツが断たれた者」とその子孫を韓国の地に呼んでいる。「人口の壁」の代案でもある。だがどういうわけか、在日韓国人には手を差し伸べない。左派は「反日」感情に夢中で、右派は「親北在日」問題で知らぬふりをしてきた。
特に、日帝強占期に当時の朝鮮を離れた人々とその子孫である「住民番号を持たない在日韓国籍者26万人」問題は、深く見れば見るほど難問だ。帝国主義欧州は植民地出身者に国籍を与えたが、日本は何年もの間放置して「永住権」を与えた。1965年、91年に両国間で結んだ協定の結果だ。この条項が後日、「透明人間の韓国人」を量産するとは、想像もできなかっただろう。
韓国籍の在日韓国人(26万人)が韓国で暮らそうと思ったら「在外国民用」住民番号をもらわなければならない。韓国語ができなくても兵役に服するが、出産・養育費の現金支援、住宅および融資面での恩恵からは排除され、医療保険料も高い。「不完全韓国人」だ。在外国民に適用される包括規定が、特殊地位にある彼らにもそのまま適用されてしまうからだ。
在日韓国人は在外国民参政権排除(2007)、保育料支援排除(2018)について違憲訴訟を提起し、どちらも勝訴したが、差別感を振り払うことはできていない。彼らが教師になるのを、「法」は阻まないが、現実では教育学部に入学する時点で道をふさがれる。韓国社会に隠然とまん延する「マイクロアグレッション(無自覚の差別行為)」だ。在日韓国人らは「韓国籍を守った代償を支払っている」「日本人であれば多文化の恩恵でも受けられただろう」と自嘲する。逆の主張もある。「韓国籍の付与は、かつては差別だったが、今の韓国の立場を考慮すると『優待』に見える」。韓日の経済力が逆転すれば、そうした主張はいっそう強まるだろう。
だが、彼らはフリーライダー(ただ乗りする人)ではない。『韓国の経済発展と在日韓国企業人の役割』を書いた韓国系の永野慎一郞教授は「1964年までに在日資金2569万ドル(2009年現在の価値で1億2000万ドル=現在のレートで約183億円。以下同じ)が韓国に流れ込み、祖国訪問に持っていく『ポケットマネー』も相当あった」と語った。「漢江の奇跡」の出発点である九老工業団地には、日本の電気電子・化学・肥料・金属など200を超える在日韓国人企業が入った。解放後に在日韓国人が送金した日本円、辛格浩(シン・ギョクホ。日本名:重光武雄。ロッテ創業者)など在日韓国人実業家による韓国経済への寄与はおよそ「2000兆ウォン(約220兆円)」だという主張もある。在日韓国人に対して、最小限の「利子」を支払うこともできていない、という考えを抱く。
朴垠柱(パク・ウンジュ)記者
「재일 동포는 부자」 「(박정희〈박·톨히〉대통령 부인의) 륙영수(유크·욘스)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문·세그)은 재일 한국인이었다」.1970·80년대의 신문의 사회면을 통해 본 재일 동포는 「돈줄」과「아카」, 그 어느 쪽인지였다.텔레비전으로 「탤런트」의 정대세(정·테세)를 보았다.나고야 태생의 이 한국인은, 2011년까지 북한의 축구 대표로 해 플레이해, 한국의 프로·축구·팀에 입단했다.북한 문제로 그의 입국에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개인의 노력, 한국인과의 결혼, 스포츠 선수에게 사상적인 기준을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국민적 합의가 소동을 진정시켰다.
한국을 떠나 일본에 정착한 「재일 동포」는 대략 80만명(일본의 출입국 재류 관리청).이 중 일본국적의 취득자가 36만명, 한국적의 사람이 43만명(한국의 주민 번호가 없는 사람 26만명을 포함한다), 조선국적(무국적)의 사람이 2만 4000명이다.재일 한국·한국인의 총수는 「100만 150만명」이라고도 말한다.
미국·스페인·Suriname 등 세계 각지의 재외 한국인은 합해 700만명이다.이 중,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치고 조국을 떨어진 사람들은 「유랑민」을 닮아 있다.궁핍함이기 때문에, 또는 독립 운동을 위해서, 있다 있어는 징용에 의해 「비자발적」이유로 고향을 떠나 중국·구소련·일본에 정착했다.
특히 공산권의 이주민의 생활은 비참하고, 최근 귀환한 사람들을 「독립 운동 자제손자」라고 해 취락 만들기에 나서는 자치체가 몇인가 있다.강제 이주 당한 「사할린 한인」에게는, 특별법을 통해 별도로 국적의 회복도 갔다.선진국·한국은 지금 「루트가 끊어진 사람」이라고 그 자손을 한국의 땅에 부르고 있다.「인구의 벽」의 대안이기도 하다.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재일 한국인에게는 손을 뻗치지 않는다.좌파는 「반일」감정에 열중해서, 우파는 「친북 재일」문제로 알지 않는 체를 해 왔다.
한국적의 재일 한국인(26만명)이 한국에서 살려고 하니 「재외 국민용」주민 번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한국어를 할 수 없어도 병역에 복종하지만, 출산·양육비의 현금 지원, 주택 및 융자면에서의 혜택에서는 배제되어 의료보험료도 비싸다.「불완전 한국인」이다.재외 국민에게 적용되는 포괄 규정이, 특수 지위에 있는 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박은주(박·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