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봉인한 금융조합 금고 80년간 “꽁꽁”…뭐가 들었을까?
일제강점기 익산금융조합서 제작…광복 후 봉인된 채 보존
금융문서 등 보관 추정…”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야 더 가치”
전북 익산시 인화동 솜리문화금고에 있는 옛 익산금융조합 금고. 2024.10.6
80년간 열리지 않은 금고 안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이 “비밀의 금고”는 전북 익산시 인화동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옛 익산금융조합 건물에 있다.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가로 93㎝, 세로 125㎝가량으로 독일제 철제품이다.
옛 익산금융조합 건물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용도로 사용됐지만, 굳게 닫힌 금고 문은 여태껏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떠나면서 금고의 다이얼과 손잡이를 훼손해 봉인했기 때문이다.
이 금고 옆의 열리는 2개의 금고(창고형 및 보조 금고)와 달리 누군가가 (이 금고의) 다이얼과 손잡이를 고의로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케 한국전쟁을 피하면서 거의 3세대 동안이나 닫힌 채로 보관되고, 그것도 일제강점기 은행 역할을 하던 기관의 금고인데도 열어보고 싶은 궁금증을 지금까지 참아낸 것도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다.
금융기관의 금고인 만큼 혹시 금괴 혹은 귀금속 같은 귀중품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나래가 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 금융조합 건물이 들어섰고,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의 금고가 남아 있게 됐을까.
익산시가 2022년 발간한 “국가등록문화재 익산 솜리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정비계획 보고서”에 따르면 옛 익산 금융조합 건물이
있는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이리(裡里)라고 불렸다. 속마을이라는 의미의 “솜리”를 한자로 옮긴 이름이 “이리”다.
이리는 지금의 인화동, 주현동 일대를 말하며 만경강 유역의 비옥한 농토를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농토를 개척하기 위해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된 곳이었다.
1915년에만 익산지역에는 총 20개의 농장이 있었으며, 이 중 이리 시가지에는 대교여시(大橋與市)농장, 백남신농장지부, 모리시마(森島莊次郞)농장, 호소카와대농장 등 대규모 농장들이 생겨났다.
솜리문화금고 건물
(익산=연합뉴스) 김진방 기자 = 전북 익산시 인화동 솜리문화금고. 2024.10.6
chinakim@yna.co.kr
(끝)
일본인의 이주가 가장 왕성하던 1925년 지금 자리에 건립된 익산금융조합은 해방 이후 적산으로 분류돼 1957년부터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69년 전북은행 이리지점이 들어서기도 했다.
80년간 열리지 않은 금고에 대한 궁금증은 이 같은 이리의 근대 역사 스토리가 입혀지면서 더 증폭되고 있다.
당시 일본은 김제·정읍 등 광활한 호남평야의 쌀을 군산항을 통해 본국으로 수탈해가기 위해 이리를 기착지로 적극 활용했다.
이런 탓에 “이리가 서울의 쌀값을 좌우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경제적으로 번성했다.
원도연 익산문화도시지원센터장(원광대 게임콘텐츠학과 교수)은 “당시 이리는 호소카와 가문 같은 일본 유력 집안의 지주들이
농장을 설립하는 등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지역이었다. 또 일본인들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지역 중 하나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이런 배경 아래 이리의 일본인 거주자 수는 1906년 후쿠오카현 출신 다나카 도미지로가 처음 이주한 이래 1910년 5호(戶) 60명, 1912년 270호 946명, 1925년 887호 3천947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원 센터장은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귀국할 때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을 요즘 물가 기준 1인당 1천만원 정도로 제한했다.
그렇다 보니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직접 들고 갈 수 없는 재산을 금고 속에 보관해 두고 금고를 훼손해 지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봉인된 금고 옆 창고형 금고와 보조 금고
(익산=연합뉴스) 김진방 기자 = 전북 익산시 옛 익산금융조합 건물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금고 세 개. 다른 두 금고와 달리 봉인된 금고는 다이얼과 손잡이가 훼손돼 있다. 2024.10.6
chinakim@yna.co.kr
(끝)
익산지역에는 익산금융조합 금고와 같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부호와 관련된 “설”(說)들이 많이 떠돈다.
실제 2021년 주현동 일본인 농장 사무실 지하에 1천400억원 상당의 금괴가 매장돼 있다는 “금괴 매장설”이 광복회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이 금괴를 찾기 위해 당시 일본인 농장주의 손자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발굴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원 센터장은 “금괴와 같은 귀금속이 익산금융조합 금고 속에 있을 가능성은 적다. 아마도 금융증서나 채권 같은 종류의 문서가
들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며 “발굴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학술적으로 가치가 큰 사료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예상했다.
익산시는 각종 추측이 제기되고 있는 익산금융조합 금고와 관련해 굳이 발굴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궁금증을 궁금증으로 남겨 두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정헌율 익산시장은 “익산에는 일제강점기를 비롯한 근대문화유산이 많다. 그러다 보니 익산 금융조합 금고처럼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는 문화유산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의 기술을 활용하면 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는 것이
관광적인 측면으로 보나 행정적으로 보나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주민들 입장에서 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일제가 봉인한 금융조합 금고 80년간 "꽁꽁"…뭐가 들었을까?
금융문서 등 보관 추정…"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야 더 가치"
전북 익산시 인화동 솜리문화금고에 있는 옛 익산금융조합 금고. 2024.10.6
80년간 열리지 않은 금고 안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이 "비밀의 금고"는 전북 익산시 인화동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옛 익산금융조합 건물에 있다.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가로 93㎝, 세로 125㎝가량으로 독일제 철제품이다.
옛 익산금융조합 건물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용도로 사용됐지만, 굳게 닫힌 금고 문은 여태껏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떠나면서 금고의 다이얼과 손잡이를 훼손해 봉인했기 때문이다.
이 금고 옆의 열리는 2개의 금고(창고형 및 보조 금고)와 달리 누군가가 (이 금고의) 다이얼과 손잡이를 고의로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케 한국전쟁을 피하면서 거의 3세대 동안이나 닫힌 채로 보관되고, 그것도 일제강점기 은행 역할을 하던 기관의 금고인데도 열어보고 싶은 궁금증을 지금까지 참아낸 것도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다.
금융기관의 금고인 만큼 혹시 금괴 혹은 귀금속 같은 귀중품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나래가 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 금융조합 건물이 들어섰고,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의 금고가 남아 있게 됐을까.
익산시가 2022년 발간한 "국가등록문화재 익산 솜리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정비계획 보고서"에 따르면 옛 익산 금융조합 건물이 있는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이리(裡里)라고 불렸다. 속마을이라는 의미의 "솜리"를 한자로 옮긴 이름이 "이리"다.
이리는 지금의 인화동, 주현동 일대를 말하며 만경강 유역의 비옥한 농토를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농토를 개척하기 위해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된 곳이었다.
1915년에만 익산지역에는 총 20개의 농장이 있었으며, 이 중 이리 시가지에는 대교여시(大橋與市)농장, 백남신농장지부, 모리시마(森島莊次郞)농장, 호소카와대농장 등 대규모 농장들이 생겨났다.
(익산=연합뉴스) 김진방 기자 = 전북 익산시 인화동 솜리문화금고. 2024.10.6
chinakim@yna.co.kr
(끝)
일본인의 이주가 가장 왕성하던 1925년 지금 자리에 건립된 익산금융조합은 해방 이후 적산으로 분류돼 1957년부터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69년 전북은행 이리지점이 들어서기도 했다.
80년간 열리지 않은 금고에 대한 궁금증은 이 같은 이리의 근대 역사 스토리가 입혀지면서 더 증폭되고 있다.
당시 일본은 김제·정읍 등 광활한 호남평야의 쌀을 군산항을 통해 본국으로 수탈해가기 위해 이리를 기착지로 적극 활용했다.
이런 탓에 "이리가 서울의 쌀값을 좌우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경제적으로 번성했다.
원도연 익산문화도시지원센터장(원광대 게임콘텐츠학과 교수)은 "당시 이리는 호소카와 가문 같은 일본 유력 집안의 지주들이 농장을 설립하는 등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지역이었다. 또 일본인들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지역 중 하나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이런 배경 아래 이리의 일본인 거주자 수는 1906년 후쿠오카현 출신 다나카 도미지로가 처음 이주한 이래 1910년 5호(戶) 60명, 1912년 270호 946명, 1925년 887호 3천947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원 센터장은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귀국할 때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을 요즘 물가 기준 1인당 1천만원 정도로 제한했다. 그렇다 보니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직접 들고 갈 수 없는 재산을 금고 속에 보관해 두고 금고를 훼손해 지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익산=연합뉴스) 김진방 기자 = 전북 익산시 옛 익산금융조합 건물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금고 세 개. 다른 두 금고와 달리 봉인된 금고는 다이얼과 손잡이가 훼손돼 있다. 2024.10.6
chinakim@yna.co.kr
(끝)
익산지역에는 익산금융조합 금고와 같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부호와 관련된 "설"(說)들이 많이 떠돈다.
실제 2021년 주현동 일본인 농장 사무실 지하에 1천400억원 상당의 금괴가 매장돼 있다는 "금괴 매장설"이 광복회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이 금괴를 찾기 위해 당시 일본인 농장주의 손자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발굴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원 센터장은 "금괴와 같은 귀금속이 익산금융조합 금고 속에 있을 가능성은 적다. 아마도 금융증서나 채권 같은 종류의 문서가 들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며 "발굴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학술적으로 가치가 큰 사료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예상했다.
익산시는 각종 추측이 제기되고 있는 익산금융조합 금고와 관련해 굳이 발굴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궁금증을 궁금증으로 남겨 두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정헌율 익산시장은 "익산에는 일제강점기를 비롯한 근대문화유산이 많다. 그러다 보니 익산 금융조합 금고처럼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는 문화유산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의 기술을 활용하면 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는 것이 관광적인 측면으로 보나 행정적으로 보나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주민들 입장에서 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