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政府は過去の歴史の誤りを認め精算しましょう。
保導連盟事件
(1950年)
李承晩大統領の率いる韓国政府と韓国軍が
韓国人民間人60万人から120万人を無差別に虐殺した事件
(全国血虐殺者遺族会の報告書では114万人)
日本の漁民を虐殺して竹島を強盗した独島の父、李承晩大統領が「朝-鮮戦争前後民間人虐殺真相糾明と名誉回復のための汎国民委員会」の調査では6月25日から9月初頭にかけて、民間人60万人から120万人を無差別に虐殺したとある。
オーストラリア人や米国軍にも報告されたがあまり興味は示さず見て見ぬふりをしたらしい。ワシントンにも報告されたが、無視して半世紀の間隠蔽され続けてきたマッカーサーにも報告されたが無視して止めることもしなかった。
済州島「4.3事件」
(1948年)
韓国政府軍・韓国警察による島民への無差別粛清をおこない、島民の5人に1人にあたる6万人が虐殺された。また、済州島の村々の70%が焼き尽くされた。また、この事件は麗水順天の抗争の背景にもなった。国軍は、島民の住む村を襲うと若者達を連れ出して殺害するとともに、少女達を連れ出しては、数週間に渡って輪姦、虐待を繰り返した後に惨殺した。
日本へ逃れた島民の一部は大阪にコミュニティーを建設した。済州島では事件前(1948年)に28万人いた島民は、1957年には3万人弱にまで激減したとされる。
朝鮮戦争
(1950年)
朝鮮人同士が殺し合い300万人が死んだ。
今も時々殺し合っている。
国民防衛軍事件
(1951年)
韓国の国民防衛軍司令部の幹部らが、国民防衛軍に供給された軍事物資や兵糧米などを横領した事件。横領により9万名余りの韓国軍兵士が餓死したとされる。
李承晩はこの韓国民の不満を抑えるために1952年1月18日にアメリカ等の国際的な反対を押し切り、李承晩ラインを一方的に宣言し、竹島の不法占拠を開始した。
居昌事件
(1951年)
韓国陸軍による市民虐殺事件。
居昌郡に隣接する山清郡今西面、咸陽郡柳林面の一帯にある12の村々の一般市民約800人が無差別に殺されて犠牲になった
(女性388人、子ども(15歳未満)385人)
子供の犠牲者の年齢別の内訳は、3歳以下100人、
4歳以上11歳未満191人、11歳以上15歳未満68人としている。
60歳以上の高齢者は66人。
山清・咸陽良民虐殺事件
(1951年)
1951年2月8日、韓国陸軍第11師団第9連隊第3大隊は居昌郡に隣接する山清郡今西面、咸陽郡柳林面の一帯にある12の村々の住民705人を集め、全員を殺害した。
5.18光州民主化運動
(1980年)
民主化を求める活動家とそれを支持する学生や市民が韓国軍と衝突し、多数の死傷者を出した事件。死者・行方不明が650名とされるが実際には3千人程が虐殺されたとされる。
聞慶虐殺事件
(1949年)
1949年12月24日に大韓民国慶尚北道聞慶郡(現:聞慶市)で、共産匪賊に協力したなどとして、韓国陸軍第2師団第25連隊の第7中隊第2小隊第3小隊が非武装の女性、子供、老人の88人を射殺した。事件は長らく共産匪賊による仕業とされていたが、2007年6月26日に韓国政府の犯行であったことが明らかにされた。
麗水・順天事件
(1948年)
1948年10月19日、済州島四・三事件鎮圧のため出動命令が下った国防警備隊第14連隊(約2,000名)が反乱を起こした。韓国政府は直ちに鎮圧部隊を投入し、1週間後の10月27日には反乱は鎮圧された。事件後、韓国政府の左翼勢力摘発は過酷を極め、反乱部隊に加えて、反乱共謀者として非武装の民間人8000名を殺害した。
韓国軍の民間人虐殺事件と双子のように同じな映像
全て大虐殺は日本がやったように歴史を修正済み。
한국 정부는 과거의 역사의 잘못을 인정 정산합시다.
보도연맹 사건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이 인솔하는 한국 정부와 한국군이
한국인 민간인 60만명에서 120만명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사건
(전국피학살자 유족회의 보고서에서는 114만명)
일본의 어민을 학살해 타케시마를 강도한 독도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아침-선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범국민 위원회」의 조사에서는6월 25일부터 9 월초두에 걸치고,민간인 60만명에서 120만명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사람이나 미국군에도 보고되었지만 별로 흥미는 보이지 않고 보고도 못 본 척을 한 것 같다.워싱턴에도 보고되었지만, 무시해 반세기의 사이 은폐 계속 되어 온 막카서에도 보고되었지만 무시해 멈추는 것도 하지 않았다.
제주도 「4.3 사건」
(1948년)
한국 정부군·한국 경찰에 의한 도민에게의 무차별 숙청을 행해,도민의 5명에게 1명에 해당하는 6만명이 학살되었다.또, 제주도의 마을들의70%가 구워 다하여졌다.또, 이 사건은 여수 쥰텐의 항쟁의 배경으로도 되었다.국군은, 도민이 사는 마을을 덮치면 젊은이들을 데리고 나가 살해하는 것과 동시에, 소녀들을 데리고 나가서는, 수주간에 걸쳐 윤간, 학대를 반복한 후에 참살했다.
일본에 피한 도민의 일부는 오사카에 커뮤니티를 건설했다.제주도에서는 사건전(1948년)에28만명 있던 도민은, 1957년에는 3만명미만에까지 격감했다고 여겨진다.
한국 전쟁
(1950년)
한국인끼리가 살인 300만명이 죽었다.
지금도 가끔 서로 죽이고 있다.
국민 방위 군사건
(1951년)
한국의 국민 방위 군사령부의 간부들이, 국민 방위군에 공급된 군사 물자나 군량미등을 횡령 한 사건.횡령에 의해 9만명 남짓의 한국군 병사가 아사했다고 여겨진다.
이승만은 이 한국민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서 1952년 1월 18일에 미국등의 국제적인 반대를 무릅써, 이승만 리인을 일방적으로 선언해, 타케시마의 불법 점거를 개시했다.
거창사건
(1951년)
한국 육군에 의한 시민 학살 사건.
거창군에 인접하는 산청군 이마니시면, 함양군 야나기바야시면의 일대에 있는 12의 마을들의 일반 시민 약 800명이 무차별하게 살해당해 희생이 되었다
(여성 388명, 아이(15세 미만) 385명)
아이의 희생자의 연령별의 내역은, 3세 이하 100명,
4세 이상 11세 미만 191명, 11세 이상 15세 미만 68명으로 하고 있다.
60세 이상의 고령자는 66명.
산청·함양 양민(백성) 학살 사건
(1951년)
1951년 2월 8일, 한국 육군 제 11 사단 제 9 연대 제 3대대는 거창군에 인접하는 산청군 이마니시면, 함양군 야나기바야시면의 일대에 있는 12의 마을들의 주민 705명을 모아 전원을 살해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활동가와 그것을 지지하는 학생이나 시민이 한국군과 충돌해,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사망자·행방 불명이 650명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3천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여겨진다.
문경학살 사건
(1949년)
1949년 12월 24일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군(현:문경시)에서, 공산 비적에게 협력했다는 등으로서 한국 육군 제 2 사단 제 25 연대의 제7 중대 제 2 소대 제 3 소대가 비무장의 여성, 아이, 노인의 88명을 사살했다.사건은 오랫동안 공산 비적에 의한 조업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7년 6월 26일에 한국 정부의 범행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여수·순천 사건
(1948년)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4·3 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 명령이 내린 국방 경비대 제 14 연대( 약 2,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한국 정부는 즉시 진압 부대를 투입해, 1주일 후의 10월 27일에는 반란은 진압되었다.사건 후, 한국 정부의 좌익 세력 적발은 과혹을 다해 반란 부대에 가세하고, 반란 공모자로서 비무장의 민간인 8000명을 살해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과 쌍둥이와 같이 같은 영상
모두대학살은 일본이 한 것처럼 역사를 수정이 끝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