鳴梁海戦 前後 事情を理解しようとすれば,
先に壬辰の乱という戦争に対する全体的なことに対する理解が必要だ.
先に朝鮮は当時戦争用意ができていなかった国だ.
反乱抑制のために矛盾的に弁韓, 制勝方略という軍事制度と,
長年の平和で元々制度上の農民訓練さえ成り立っていなかったし,
常駐軍は少数だけ養成して北方と首都に配置されていた状況だ.
李舜臣は元々陸軍に服務した人で
全羅左水使という海軍提督に任命されたことは 1591年, 壬辰の乱勃発からわずか 1年前だった.
そして 全羅左水営は, 朝鮮南部 4個の海軍中, 規模が一番小さかった.
1592年壬辰の乱勃発
朝鮮主力艦隊の提督だった 慶尚右水使元均は慶尚道の艦船たちを皆燃やして逃げだす.
そして日本軍は釜山を本陣にして慶尚道の海岸を占拠する.
全羅左水営の李舜臣は慶尚道海岸を占拠した日本軍を 連戦連勝で撃破して, 日本軍の本陣である釜山まで進撃する.
1592年 8月, 日本 戦国時代最高の水軍武将 九鬼嘉隆が李舜臣に敗れた以後から日本軍は,
李舜臣の艦隊が見えれば無条件艦船を捨てて陸地に逃げだして時間を引き延ばさせる戦略を採択する.
1592年 9月, 当時釜山には 豊臣秀勝の指揮する日本軍があったが,
釜山の日本軍も海戦では李舜臣に相手に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悟って, 艦船を捨てて陸地の 城で逃げだす.
李舜臣の海軍は 陸戦を全然訓練受けなかったから, 上陸して釜山城を陷落させることは無理だった. それで日本軍の艦船だけ破壊して帰って来る.
李舜臣が水軍で赴任したことはわずか戦争 1年前に, 李舜臣の兵力たちはその前まで軍事というのは全然分からない農民たちだったから, 海戦だけでも手ごわかったはずだ.
ただ戦闘の指揮官が李舜臣だったから 連戦連勝 したのだ.
海岸の港たち, 釜山まん前の加徳島まで朝鮮水軍が皆奪い返すようになったが,
李舜臣は調整で 謀陷をあって, 下獄される.
李舜臣が監獄にあるうちに, 以前に言及した 慶尚右水使元均が朝鮮水軍の総司令官で赴任する.
そして 元均は 漆川梁 海戦で日本軍に敗れて朝鮮水軍は全滅する.
朝鮮水軍が消えたから日本は 水陸協同で朝鮮軍に奪還された漢城までまた進撃することを目標した.
調整は急に李舜臣を解いてくれてまた水軍指揮官に任命する.
李舜臣に残っていたことは 12隻の艦船だけだったし,
李舜臣が相対しなければならない日本軍は, また自信感を取り戻して増員した 300隻 艦船の艦隊だった.
日本水軍の進撃は鳴梁海戦で李舜臣の勝利にまた挫折される.
海路の普及失敗で日本陸軍本隊の漢城攻撃も挫折してまた慶尚道で復帰する.
鳴梁海戦では李舜臣が勝ったが, まだ日本水軍の数字が圧倒的な状況だったし,
そして日本軍は 水陸 協力と転換が有機的だったが, 李舜臣は戦争初期から調整からの陸軍協力は全然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李舜臣本人も圧倒的劣勢である状況でまた同じな方法で勝つことができないと判断して,
本陣を後に柔らかくなって水軍養成に集中し始める.
日本水軍も鳴梁海戦の 大敗があったから,
小規模の正札船や掠奪船 だけ, 大規模兵力を進撃させることはあきらめる.
そして李舜臣は後退した時間の間水軍養成に成功してまた日本水軍を追い出して, 日本軍の 倭城をかこみ始める.
명량해전 前後 사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조선은 당시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라이다.
반란 억제를 위해 모순적으로 변한, 制勝方略이라는 군사 제도와,
오랜 평화로 원래 제도상의 농민 훈련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상비군은 소수만 양성하여 북방과 수도에 배치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원래 육군에 복무하던 사람으로
全羅左水使라는 해군 제독으로 임명된 것은 1591년, 임진왜란 발발로부터 고작 1년 전이었다.
그리고 全羅左水營은, 조선 남부 4개의 해군 중, 규모가 가장 작았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조선 주력 함대의 제독이었던 慶尙右水使 元均은 경상도의 함선들을 모두 불태우고 도망간다.
그리고 일본군은 부산을 본진으로 삼고 경상도의 해안을 점거한다.
全羅左水營의 이순신은 경상도 해안을 점거한 일본군을 連戰連勝으로 격파하며, 일본군의 본진인 부산까지 진격한다.
1592년 8월, 일본 戰國시대 최고의 수군 무장 九鬼嘉隆가 이순신에 패한 이후부터 일본군은,
이순신의 함대가 보이면 무조건 함선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채택한다.
1592년 9월, 당시 부산에는 豊臣秀勝이 지휘하는 일본군이 있었지만,
부산의 일본군도 해전에서는 이순신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함선을 버리고 육지의 城으로 도망간다.
이순신의 해군은 陸戰을 전혀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륙하여 부산城을 함락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일본군의 함선만 파괴하고 돌아온다.
이순신이 수군으로 부임한 것은 고작 전쟁 1년 전으로, 이순신의 병력들은 그 전까지 군사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해전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단지 전투의 지휘관이 이순신이었기 때문에 連戰連勝 한 것이다.
해안의 항구들, 부산 바로 앞의 加德島까지 조선 수군이 모두 탈환하게 되었지만,
이순신은 조정에서 謀陷을 당해, 하옥된다.
이순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이전에 언급했던 慶尙右水使 元均이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元均은 漆川梁 해전에서 일본군에 패해 조선 수군은 전멸한다.
조선 수군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본은 水陸 협동으로 조선軍에 탈환된 한성까지 다시 진격하는 것을 목표했다.
조정은 급히 이순신을 풀어주고 다시 수군 지휘관에 임명한다.
이순신에게 남아있던 것은 12隻의 함선 뿐이었고,
이순신이 상대해야할 일본군은, 다시 자신감을 되찾고 증원한 300隻 함선의 함대였다.
일본 수군의 진격은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승리로 다시 좌절된다.
海路의 보급 실패로 일본 육군 본대의 한성 공격도 좌절하고 다시 경상도로 복귀한다.
명량해전에서는 이순신이 이겼지만, 아직도 일본 수군의 숫자가 압도적인 상황이었고,
그리고 일본군은 水陸 협력과 전환이 유기적이었지만, 이순신은 전쟁 초기부터 조정으로부터의 육군 협력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 본인도 압도적 열세인 상황에서 다시 같은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본진을 뒤로 무르고 수군 양성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일본 수군도 명량해전의 大敗가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정찰船이나 약탈船 뿐, 대규모 병력을 진격시키는 것은 포기한다.
그리고 이순신은 후퇴했던 시간동안 수군 양성에 성공해 다시 일본 수군을 몰아내고, 일본군의 倭城을 포위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