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々の通説はこっちで
得居通幸(とくい-みちゆき)は、村上海賊の分家の1つである来島村上家の当主・来島通康(村上通康)の長男として1557年に誕生した。
しかし、得居通幸は正室の子では無かったようで、来島通康(村上通康)の正妻となる河野通直の娘が、1561年に4男・来島通総が生まれた。
そのため、跡目を継ぐことができなくなり、土居家・得能家の子孫であったことから得居氏を称して得居家を起こしたようである。
1567年に父・来島通康(村上通康)が死去した際、得居通幸は11歳ながらも、7歳の弟・来島通総を支えて行くこととなった。
1578年~1580年頃、得居通幸は伊予・松山の沖にある鹿島城に移って本拠とし、家来らも従っている。
1582年4月、毛利家を攻略中の羽柴秀吉(豊臣秀吉)の調略を受けると、河野家を見限って本家の来島城主・来島通総と共に得居通幸(得居半右衛門尉通久)も織田信長に臣従した。
このとき、来島村上家の家老である村上吉継、村上吉郷らは河野家側に残ったため家中は分裂し、河野家・毛利家から来島城などは攻撃を受ける。
5月には、村上海賊の本家筋で、まだ毛利家に従っていた能島村上家(能島城)の村上武吉・村上元吉の親子からも来島城は攻撃されている。
そして、遂に耐えられなくなった来島城の来島通総は、1583年3月に羽柴秀吉の元へと京に逃亡したため、残る得居通幸の鹿島城が総攻撃を受けた。
しかし、得居通幸は見事に鹿島城を守り抜き、1583年8月以降は鹿島城への攻撃が止んだようである。
1584年、羽柴秀吉の支援を受けた来島通総が11月頃には忽那島周辺で活動を開始し、1586年2月には来島通総の来島城復帰が、毛利輝元や小早川隆景に容認された。
1586年8月、豊臣秀吉の四国攻めが始まると、小早川隆景・吉川元長などの毛利勢と共に伊予・湯築城主・河野通直を攻撃。
この戦功により、弟・来島通総は伊予風早郡1万4000石となると来島城を廃城として鹿島城を本拠とした。得居通幸は3000石で仕えている。
その後、豊臣秀吉の九州攻めだけでなく、小田原攻めや朝鮮出兵にも得居通幸は水軍を率いて出陣している。
しかし、1594年1月末から2月初めの頃に、朝鮮水軍と鳴梁の戦いにて討死した。
後嗣がいなかったため、残された所領などは本家・来島通総(村上通総)に加えられている。
우리의 통설은 여기로
득거통행(푸는 있어-길행)은, 무라카미 해적의 분가의 하나인 와 시마무라 가건물의 당주·와 시마 토루강(무라카미 토루강)의 장남으로서 1557년에 탄생했다.
그러나, 득거통행은 정실의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고, 와 시마 토루강(무라카미 토루강)의 정실이 된다코노 토루 곧의 딸(아가씨)가, 1561년에 4남·와 시마 토루총이 태어났다.
그 때문에, 상속을 이을 수 없게 되어, 도이가·득노우게의 자손인 것으로부터 득거씨를 칭해 득거가를 일으킨 것 같다.
1567년에 아버지·와 시마 토루강(무라카미 토루강)이 사망했을 때, 득거통행은 11세면서도, 7세의 남동생·와 시마 토루총을 지지해서 가게 되었다.
1578년 1580년경, 득거통행은이요·마츠야마의 바다에 있는 카시마성으로 옮기고 본거지로 해, 하인등도 따라서 있다.
1582년 4월, 모우리가를 공략중의 우시히데요시(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략을 받으면, 코노가를 단념하고 본가의와 도성주·와 시마 토루총과 함께 득거통행(득거한에몬위통구)도오다 노부나가에 신종했다.
이 때, 와 시마무라 가건물의 가로이다무라카미길계, 무라카미길 고우등은 코노가 측에 남았기 때문에 집안은 분열해, 코노가·모우리가로부터 와 도성 등은 공격을 받는다.
5월에는, 무라카미 해적의 본가관계로, 아직 모우리가에 따라서 있던 노우지마 무라카미가(노우지마성)의무라카미 타케요시·무라카미 모토요시의 부모와 자식으로부터도 와 도성은 공격받고 있다.
그리고, 결국 견딜 수 없게 된 와 도성의 와 시마 토루총은, 1583년 3월에 우시히데요시의 슬하로경에 도망했기 때문에, 남는 득거통행의 카시마성이 총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득거통행은 보기 좋게 카시마성을 지켜 뽑아, 1583년 8월 이후는 카시마성에의 공격이 그친 것 같다.
1584년, 우시히데요시의 지원을 받은 와 시마 토루총이 11월 무렵에는 쿠츠나섬주변에서 활동을 개시해, 1586년 2월에는 와 시마 토루총의 와 도성복귀가,모리 데루모토나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용인되었다.
1586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공격이 시작되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요시카와원장등의 모우리세와 함께 이요·탕 축성주·코노 토루 곧을 공격.
이 전공에 의해, 남동생·와 시마 토루총은 이요 가자하야군 1만 4000석이 되면 와 도성을 폐성으로서 카시마성을 본거지로 했다.득거통행은 3000석으로 시중들고 있다.
그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공격 뿐만이 아니라,오다와라 공격이나 한국 출병에도 득거통행은수 군을 인솔해 출진하고 있다.
그러나, 1594년 1월말부터 2 월초의 무렵에, 조선수군과 명량의 싸움에서 토사 했다.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남겨진 영지 등은 본가·와 시마 토루총(무라카미 토루총)에 더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