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経済 PositiveNegativeFreeStyleArguments
 日韓関係を揺さぶった元徴用工訴訟の原告には、1945年8月6日に広島市に投下された原子爆弾で被爆した韓国人たちが含まれていた。徴用と被爆という二重の被害に遭い、日本に謝罪や賠償を求めた当事者(被爆1世)らは既にこの世を去った。韓国政府は昨年3月に元徴用工問題の「解決策」を示したが、親世代の歴史を背負った2世らの対応は分かれる。

 在外被爆者 かつては日本滞在中を除き、被爆者援護の対象外だった。出国により健康管理手当を打ち切るとした通達が2007年の最高裁判決で違法とされ、2008年に被爆者健康手帳申請の来日要件が撤廃。2015年には居住国で負担した医療費の支給を最高裁が認めた。厚生労働省によると、今年3月時点で手帳を所持する在外被爆者は2388人。

◆痛々しかった父の姿 それでも政府の解決策を受容の理由は…

「訴訟問題を3世にまで引き継がせたくない。われわれの世代で区切りを付けるべきだ」

 京畿道(キョンギド)原爆被害者協議会の会長を務める朴相福(パク・サンボク)さん(78)は、三菱重工業を相手取り2013年にソウル中央地裁に提訴した元徴用工14人の遺族の1人。昨年末に韓国最高裁で勝訴が確定した。韓国の財団が被告企業に代わって賠償相当額を支給する解決策を受け入れる考えだ。

 居住する平沢(ピョンテク)の周辺には、戦時中に広島へ動員されて被爆した被害者が多かった。父の朴南淳(パク・ナムスン)さん(03年没)も1944年9月に徴用され、三菱重工の鋳鉄工場で鉄鉱石を溶鉱炉に入れる重労働をした。原爆が落ちた際は防空壕(ごう)へ逃げたものの放射能を浴び、帰郷後に背骨などに障害が現れた。相福さんは、父が30代でつえを突いて歩く姿を覚えている。



◆「日本の首相、なぜひと言謝れないのか」

 韓国に住む被爆者は、日韓両政府から何の支援もない状況が長く続いた。相福さんによると、被爆2世も自身を含めて皮膚病が多いが、「みんな隠して生きている」という。

 財団には、1965年の日韓請求権協定に伴う日本の経済協力で恩恵を受けた韓国企業の寄付金が入っており、解決策の枠組みが「間違っているとは思わない」と相福さん。ただ日本政府の謝罪は必要だと考えていた。

 昨年5月に来韓した岸田文雄首相は元徴用工を念頭に「心が痛む思い」と述べるにとどまり、相福さんは「韓国人を動員して働かせたことをなぜひと言、謝れないのか」と残念がった。

 それでも、日本の市民団体と交流するたび、政府の謝罪がないのを「申し訳ない」と話すことに慰められた。「彼らには何の罪もない。日本の方々が助けてくれなかったら、原爆被害者の裁判は続けられなかった」と感謝している。



◆「支給金は受け取らない」父の闘いを継ぐ兄弟

 被爆2世の鄭鐘建(チョン・ジョンゴン)さん(67)と鐘五(ジョンオ)さん(65)兄弟は2018年に韓国最高裁で勝訴が確定したが、財団による支給金の受け取りを拒否している。父の鄭昌喜(チョン・チャンヒ)さん(2012年没)は韓国原爆被害者協会の事務局長として、被爆者の救済を求める活動に尽くした。「父は日本を相手に闘ってきた。別のところから金を受け取るやり方で、故人らが苦労した歴史をもみ消すようなことはできない」

 昌喜さんは現在のソウルから広島の三菱重工の造船工場へ動員された。被爆の影響で血管が弱く、晩年まで病院治療を続けた。

 一方で、韓国内の被爆者を一人一人尋ね歩いて1967年に協会を結成。「仲間のことを『同志』と呼んでいた。原爆の恐ろしさを知らしめる使命感が強かった」と鐘建さん。昌喜さんらのグループが1995年に広島地裁に提起した訴訟は、2007年に最高裁が日本政府の上告を棄却し、在外被爆者への対応が見直されるきっかけになった。

 鐘五さんは、家庭の困窮にもかかわらず活動に没頭する父が嫌いだった。だが自分も年を取るにつれ、父の気持ちを想像するようになった。「韓国に力がない時代に生まれ、本人の意志と関係なく日本に連れて行かれて過酷な経験をした。(原爆症のせいで)仕事を長く続けられず、どんなにつらかっただろう」としのんだ。



   ◇   ◇  
  
◆被爆を隠しながら生きる当事者と2世 朴相福さん

 京畿道原爆被害者協議会会長の朴相福(パク・サンボク)さん、被爆2世の鄭鐘建(チョン・ジョンゴン)さん、鐘五(ジョンオ)さん兄弟のインタビュー詳報は以下の通り。

―父親の朴南淳(パク・ナムスン)さんは平沢(ピョンテク)から広島へ動員された。

 強制的に徴用され、三菱重工業の工場で働かされた。まるで捕虜収容所のように監視が付く寮で生活しながら、十分な食べ物も与えられなかった。原爆投下後も日本人と分けられ、人間扱いされなかったそうだ。日本の戦争のために連れていかれたのに、会社は故郷に送り届けることもなく放置した。父は広島郊外の農村で働かせてもらいながら食いつなぎ、下関で船を探して1945年9月に自力で帰郷した。



 ―被爆による後遺症があったか。

 私が小学校に通うころまで、父はつえを突いて歩いていた。その時はなぜか分からなかったが、被爆の影響で骨に異常があったようだ。父は過酷な経験を子どもには直接語らなかった。

 ―被爆2世たちにも症状がある?

 私を含めて皮膚病が多く、ひどい人は銭湯にも行けない。だが韓国内の被爆者は症状があっても、隠しながら生きている。韓国政府からも何の支援もなかったので、誰かに話しても仕方ないから。最近ようやく地方レベルで被爆者支援の動きがあり、京畿道は2019年に原爆被害者支援条例を制定した。被爆2世らへの医療支援も規定したが、なかなか予算確保が進まない状況だ。

◆被害者の私たちが、核廃絶の声を上げる

 ―韓国政府傘下の財団が元徴用工訴訟の賠償金相当額を支給する解決策に、どう対応するか。

 受け入れようと思う。私たちの世代で区切りを付けなければいけない。ただし、財団は資金が不足していて、まだ受け取れていない。他の原告たちと相談して、8月まで待ってみて状況が変わらなければ「三菱重工の財産差し押さえが必要なのでは」とも話している。いつまでも待つことはできない。

 ―日本側の謝罪を望む気持ちがあった?

 本来は、日本政府が原爆被害者に謝罪しないといけない。尹錫悦(ユンソンニョル)大統領は日本に好意的に対応しているので、昨年5月に岸田文雄首相が来韓したとき、謝罪するのではないかと期待して見守った。だが「心が痛む思い」と言っただけで、心中とても寂しかった。韓国を植民地化し、動員して働かせたのだから、今は過ちを認めてひと言「間違っていた」となぜ言えないのか。政治家は国内で人気が下がるからだろう。

 ただ、私が知っている日本の市民たちは過去の過ちを認めて「申し訳ない」と言うので慰められた。彼らの助けがなければ裁判は続けられなかった。ありがたく、感謝しかない。

 ―韓国では独自の核武装を望む世論がある。

 私たちは核のない世界をつくる活動に取り組んでいる。米国や日本にも渡航して、核兵器の廃絶を訴える市民と連帯してきた。北朝鮮の金正恩(キムジョンウン=朝鮮労働党総書記)のせいで韓国でも核武装論が出るが、核の恐ろしさを知らない者たちの言うことだ。二度とあのような惨禍が起きないように、被害を受けた私たちが声を上げていきたい。

◆被爆で体調すぐれず、働けず、貧しく 鄭鐘建さん・鐘五さん兄弟

―父親の鄭昌喜(チョン・チャンヒ)さんは広島でどんな経験をしたか。

 現在のソウルで鉄道局に勤務していたが、強制徴用された。原爆が落ちた後、「死の灰」が振る中を他の人たちを救助して回った。その時は放射能の恐ろしさを知らなかったのだ。被爆の後遺症で生涯体調がすぐれず、会社に長く勤め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血管が弱く、最期は大動脈が破裂して亡くなった。私(鐘五)も同じ病気になった。



 ―被爆2世もさまざまな苦労をされた。

 父がそんなだったから、家庭生活は貧しかった。バス代がなくて学校に歩いて通ったこともある。父がお金を稼いでくれればいいのにと、子ども心に思った。父は酒を飲んで「ごめんな」と話すことがあった。後から思うと、父は本当に苦労して生きた。

◆金を受け取れば、父の業績を否定することに

 ―昌喜さんらが起こした元徴用工訴訟を巡り、韓国政府の解決策を拒否している。

 私(鐘建)は父といえば原爆に関連する活動ばかりと思っていたが、昨年に遺族として記者会見する機会があり、その際に父が強制徴用の裁判にも取り組んでいたと認識した。

 財団による支給金は受け入れられない。2世代にわたって闘わなければいけないのは悲しいことで、できれば自分たちの世代で終わらせたいと思う。だが父は韓国原爆被害者協会を立ち上げ、日本政府を相手に謝罪と補償を要求して闘ってきた。今になって韓国の財団から金を受け取れば、父の業績を否定することになる。しかも日本からひと言の謝罪もないというのは、話にならない。恨(ハン=心のわだかまり)を抱いて生きてきた被害者たちの歴史を消そうとしている。

 ―やはり日本政府の謝罪が必要だと。

 父によると、在韓被爆者の治療費を援助してくれた日本人もたくさんいた。父は日本政府を憎んでいたのであって、日本国民に対する愛情が深かった。戦争のために苦労したのは日本の一般国民も同じだ。韓国の反日感情というのは、日本の国民ではなく政治指導者に対するものだ。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한국인 징용공 유족, 「해결책」에 복잡한 생각 「자신의 세대에 단락지어」 「한의 역사 지울 수 없다」

 일한 관계를 흔든 원징용공 소송의 원고에게는,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시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피폭한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징용과 피폭이라고 하는 이중의 피해를 당해, 일본에 사죄나 배상을 요구한 당사자(피폭 1세) 등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한국 정부는 작년 3월에 원징용공 문제의 「해결책」을 나타냈지만, 친세대의 역사를 짊어진 2세등의 대응은 나뉜다.

 재외 피폭자 이전에는 일본 체제중을 제외해, 피폭자 원호의 대상외였다.출국에 의해 건강 관리 수당을 중지한다고 한 통지가 2007년의 최고재판소 판결로 위법으로 여겨져 2008년에 피폭자 건강 수첩 신청의 일본 방문 요건이 철폐.2015년에는 거주국으로 부담한 의료비의 지급을 최고재판소가 인정했다.후생 노동성에 의하면, 금년 3 월 시점에서 수첩을 소지하는 재외 피폭자는 2388명.

◆통들 꾸짖은 아버지의 모습 그런데도 정부의 해결책을 수용의 이유는…

「소송 문제를 3세에까지 계승하게 한 구 없다.우리의 세대에 단락을 붙여야 한다」

 경기도(키타 `□탑M드) 원폭 피해자 협의회의 회장을 맡는 박상복(박·산보크)씨(78)는, 미츠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해 2013년에 서울 중앙 지방 법원에 제소한 원징용공 14명의 유족의 1명.작년말에 한국 최고재판소에서 승소가 확정했다.한국의 재단이 피고 기업에 대신해 배상 상당액을 지급하는 해결책을 받아 들일 생각이다.

 거주하는 히라사와(폴테크)의 주변에는, 전시중에 히로시마에 동원되어 피폭한 피해자가 많았다.아버지의 박남쥰(박·남슨)씨(03년몰)도 1944년 9월에 징용 되어 미츠비시중공의 주철 공장에서 철광석을 용광로에 넣는 중노동을 했다.원폭이 떨어졌을 때는 방공호(호)에 도망쳤지만 방사능을 받아 귀향 후에 등뼈 등에 장해가 나타났다.상복씨는, 아버지가 30대로 지팡이를 찔러 걷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의 수상, 왜 한마디 사과할 수 없는 것인가」

 한국에 사는 피폭자는, 일한 양정부로부터 아무 지원도 없는 상황이 길게 계속 되었다.상복씨에 의하면, 피폭 2세나 자신을 포함해 피부병이 많지만, 「모두 숨겨 살아 있다」라고 한다.

 재단에는, 1965년의 일한 청구권 협정에 수반하는 일본의 경제협력으로 혜택을 받은 한국 기업의 기부금이 들어가 있어 해결책의 골조가 「잘못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상복씨.단지 일본 정부의 사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 5월에 와 한국 한 키시다 후미오 수상은 원징용공을 염두에 「마음이 아픈 생각」이라고 말하는데 그쳐, 상복씨는 「한국인을 동원해 일하게 한 것을 왜 한마디, 사과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애석해 했다.

 그런데도, 일본의 시민 단체와 교류할 때, 정부의 사죄가 없는 것을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위로받았다.「그들에게는 아무죄도 없다.일본 분들이 도와 주지 않았으면, 원폭 피해자의 재판은 계속되지 않았다」라고 감사하고 있다.



◆「지급금은 받지 않는다」아버지의 투쟁을 잇는 형제

 피폭 2세의 정종켄(정·젼곤)씨(67)와 종5(젼오)씨(65) 형제는 2018년에 한국 최고재판소에서 승소가 확정했지만, 재단에 의한 지급금의 수취를 거부하고 있다.아버지의 정창희(정·체히)씨(2012년몰)는 한국 원폭 피해자 협회의 사무국장으로서 피폭자의 구제를 요구하는 활동에 힘썼다.「아버지는 일본을 상대에게 싸워 왔다.다른 곳부터 돈을 받는 방식으로, 고인등이 고생한 역사를 은폐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창희씨는 현재의 서울에서 히로시마의 미츠비시중공의 조선 공장에 동원되었다.피폭의 영향으로 혈관이 약하고, 만년까지 병원 치료를 계속했다.

 한편, 한국내의 피폭자를 한사람 한사람 물어 걸어 1967년에 협회를 결성.「동료를 「동지」라고 부르고 있었다.원폭의 무서움을 알리게 하는 사명감이 강했다」라고 종켄씨.창희씨등의 그룹이 1995년에 히로시마 지방 법원에 제기한 소송은, 2007년에 최고재판소가 일본 정부의 상고를 기각해, 재외 피폭자에게의 대응이 재검토되는 계기가 되었다.

 종5씨는, 가정의 곤궁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몰두하는 아버지가 싫었다.하지만 자신도 나이를 먹는 것에 따라, 아버지의 기분을 상상하게 되었다.「한국에 힘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본에 데리고 가져 가혹한 경험을 했다.(원폭증의 탓으로) 일을 길게 계속되지 않고, 얼마나 괴로웠을까」라고 그리워했다.



   ◇   ◇  
  
◆피폭을 숨기면서 사는 당사자와 2세박상복씨

 경기도 원폭 피해자 협의회 회장의 박상복(박·산보크)씨, 피폭 2세의 정종켄(정·젼곤)씨, 종5(젼오)씨형제의 인터뷰 상세보도는 이하와 같다.

―부친의 박남쥰(박·남슨)씨는 히라사와(폴테크)로부터 히로시마에 동원되었다.

 강제적으로 징용 되어 미츠비시중공업의 공장에서 일하게되었다.마치 포로 수용소와 같이 감시가 붙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충분한 음식도 주어지지 않았다.원폭 투하 후도 일본인과 나눌 수 있어 인간 취급해 되지 않았다고 한다.일본의 전쟁을 위해서 데려가졌는데, 회사는 고향에 데려다 줄 것도 없게 방치했다.아버지는 히로시마 교외의 농촌에서 일하게 해 주면서 연명해,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찾아 1945년 9월에 자력으로 귀향했다.



 ―피폭에 의한 후유증이 있었는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무렵까지, 아버지는 지팡이를 찔러 걷고 있었다.그 때는 왠지 몰랐지만, 피폭의 영향으로 뼈에 이상이 있던 것 같다.아버지는 가혹한 경험을 아이에게는 직접 말하지 않았다.

 ―피폭 2세들에게도 증상이 있다?

 나를 포함해 피부병이 많아, 심한 사람은 목욕탕에도 갈 수 없다.하지만 한국내의 피폭자는 증상이 있어도, 숨기면서 살아 있다.한국 정부로부터도 아무 지원도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야기해도 어쩔 수 없으니까.최근 간신히 지방 레벨로 피폭자 지원의 움직임이 있어, 경기도는 2019년에 원폭 피해자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피폭 2세등에의 의료 지원도 규정했지만, 좀처럼 예산 확보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피해자의 우리가, 핵무기 폐기가 소리를 높인다

 ―한국 정부 산하의 재단이 원징용공 소송의 배상금 상당액을 지급하는 해결책에, 어떻게 대응할까.

 받아 들이려고 한다.우리의 세대에 단락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다만, 재단은 자금이 부족하고, 아직 수잡히지 않았다.다른 원고들과 상담하고, 8월까지 기다려 보고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미츠비시중공의 재산 압류가 필요하지」라고도 이야기하고 있다.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다.

 ―일본측의 사죄를 바라는 기분이 있었어?

 본래는,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윤 주석기쁨(윤손뇨르) 대통령은 일본에 호의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므로, 작년 5월에 키시다 후미오 수상이 와 한국 했을 때, 사죄하는 것은 아닐까 기대해 지켜보았다.하지만 「마음이 아픈 생각」이라고 한 것만으로, 심중 매우 외로웠다.한국을 식민지화해, 동원해 일하게 했으니까, 지금은 잘못을 인정해 한마디 「잘못되어 있었다」라고 왜 말할 수 없는 것인가.정치가는 국내에서 인기가 내리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일본의 시민들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 「미안하다」라고 하므로 위로받았다.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재판은 계속되지 않았다.고맙게, 감사 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독자적인 핵무장을 바라는 여론이 있다.

 우리는 핵이 없는 세계를 만드는 활동에 임하고 있다.미국이나 일본에도 도항 하고, 핵병기의 폐절을 호소하는 시민과 연대해 왔다.북한의 김 타다시 은혜(킴젼운=조선노동당 총서기) 태워 있어로 한국에서도 핵무장론이 나오지만, 핵의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다.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참화가 일어나지 않게, 피해를 받은 우리가 소리를 높여 가고 싶다.

◆피폭으로 컨디션 뛰어나지 않고, 일하지 못하고, 궁핍하고 정종켄씨·종5씨형제

―부친의 정창희(정·체히)씨는 히로시마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현재의 서울에서 철도국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강제 징용 되었다.원폭이 떨어진 후, 「죽음의 재」가 거절하는 중을 다른 사람들을 구조해 돌았다.그 때는 방사능의 무서움을 몰랐던 것이다.피폭의 후유증으로 생애 컨디션이 뛰어나지 않고, 회사에 길게 근무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혈관이 약하고, 최후는 대동맥이 파열해 죽었다.나(종5)도 같을 병이 들었다.



 ―피폭 2세나 다양한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가 그런이었기 때문에, 가정 생활은 궁핍했다.버스대가 없어서 학교에 걸어 다닌 적도 있다.아버지가 돈을 벌어 준다면 좋은데와 동심으로 생각했다.아버지는 술을 마셔 「미안」(이)라고 이야기하는 일이 있었다.나중에 생각하면, 아버지는 정말로 고생해 살았다.

◆돈을 받으면, 아버지의 실적을 부정하는 것에

 ―창희씨등이 일으킨 원징용공 소송을 둘러싸, 한국 정부의 해결책을 거부하고 있다.

 나(종건)는 아버지라고 하면 원폭에 관련하는 활동(뿐)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작년에 유족으로서 기자 회견할 기회가 있어, 그 때에 아버지가 강제 징용의 재판에도 임하고 있었다고 인식했다.

 재단에 의한 지급금은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2세대에 걸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의는 슬픈 일로, 할 수 있으면 스스로의 세대에 끝내고 싶다.하지만 아버지는 한국 원폭 피해자 협회를 시작해 일본 정부를 상대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해 싸워 왔다.지금에 와서 한국의 재단으로부터 돈을 받으면, 아버지의 실적을 부정하는 것 (이)가 된다.게다가 일본으로부터 한마디의 사죄도 없다고 하는 것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한(한=마음의 응어리)을 안아 살아 온 피해자들의 역사를 지우려 하고 있다.

 ―역시 일본 정부의 사죄가 필요하다면.

 아버지에 의하면, 주한 피폭자의 치료비를 원조해 준 일본인도 많이 있었다.아버지는 일본 정부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고, 일본국민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전쟁을 위해서 고생한 것은 일본의 일반 국민도 같다.한국의 반일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국민은 아니고 정치 지도자에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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