警察殺害後すべて奪って都心で銃撃戦… 狂乱の “18歳” 刑場の露で[ニュースの中今日]
東京澁谷銃撃戦, 一名 “少年ライプルマ事件”
1965年 7月29日. 日本東京都市部野球で大規模銃撃戦が起った.
警察服を着たままライフル小銃を持って人質劇をした犯人は当時 18歳少年カタギリミサきゅうりだった. 鉄砲を持った少年犯を取るために現場には 580人の防弾胴衣を着た警察官が動員された.
警察殺害後すべて奪った犯人, 車四台乗り換えて澁谷銃砲上に…
カタギリはこの日 “一少年が山で空気銃をスァデである. 早く出動してくれ”と警察に虚偽届けた. 現場に警察官が現われると彼は空気銃で警察官をうってスロトリン後ゲモリパンで何回も打ち下ろして殺害した.
警察官の制服を奪って入庫ピストル(リボルバー)を強奪したカタギリは現場で追加出動した警察官二人をでくわすと一人に貫通傷を加えて逃走した. 鉄砲を当たった警察官は病院に移されたが死亡した.
彼は警察を騙って過ぎ去った 車に乗せてくれと言って頼んだ. 彼は運転手が自分を交番近くに降りてくれようと思うとピストルを持って脅威してしばらく代置した. そうして過ぎ去った 車が停まると車を乗り換えて運転手を脅威して東京方面で車を走るようにした. 中間に検問を避けるためにまた他の車を脅威して 乗り換えた. こんな式で運転手を脅威して乗り換えた車だけ皆 4台. 彼は澁谷銃砲上に向けた.
銃砲上に到着したカタギリが 車から降りると運転手と同乗者二人は消防署で身を避けた後犯人の位置を情報提供した. この消息を接した警察は銃砲上をかこんだ. 当時カタギリをかこんだ警察兵力は装甲車 10台, ヘリ 2台, 警察 580人余りだった.
退勤時間起った銃撃戦, 見手 5000人余り寄り集まって
カタギリは銃砲上職員 3人を人質に取って警察と銃撃戦をした. 退勤時間響いた銃声に見手
5000人余りが殺到した. カタギリは警察官, 見手, 記者たちを向けて空気銃弾 133発を乱射した. このために現場にあった 16人が
負傷を負った.
警察は銃砲上に催涙弾を発射したし催涙ガスを耐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カタギリが店をすり抜けて来た. この時人質だった男店員が持っていた鉄砲でカタギリの後頭部を価格した後逃げたし, 刑事と体当りけんかをしたカタギリは結局現場で逮捕した.
25歳年に処刑された少年犯
カタギリは 1967年 4月 1審で無期懲役を宣告受けたが被害者たちと検察が抗訴したし 1968年開かれた 2審で死刑を宣告受けた. 1969年 10月2日日本最高裁判所が 2審判決を認めて死刑が確定された.
警察の調査でカタギリは 午夜部ハルヒコの小説 “野獣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を見て犯行をやらかしたと述べた. 彼は軍人出身お父さんによって幼い時代から 聡気に関心が高かったし中学校卒業当時親お姉さん名義で実際鉄砲を贈り物もらったことと知られた. 彼は犯行に対して “さまざまな鉄砲を うつことができて積もっていたことを全部文感じだ. 死んでも良い”と言った.
彼は裁判で “まだ鉄砲に対する魅力に抜けている. 将来に社会に出て多くの人に迷惑をかけないように死刑させてくれ”と言ったことと知られた.
結局 18歳に事故を起こした少年犯は 1972年 7月21日 25歳の年に処刑された.
경찰 살해 후 총 뺏고 도심서 총격전… 광란의 "18세" 형장의 이슬로[뉴스속오늘]
도쿄 시부야 총격전, 일명 "소년 라이플마 사건"
1965년 7월29일.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에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졌다.
경찰 복장을 한 채 라이플 소총을 들고 인질극을 벌인 범인은 당시 18세 소년 카타기리 미사오였다. 총을 든 소년범을 잡기 위해 현장에는 580명의 방탄복을 입은 경찰관이 동원됐다.
경찰관의 제복을 빼앗아 입고 권총(리볼버)을 강탈한 카타기리는 현장으로 추가 출동한 경찰관 두 명을 마주치자 한 명에게 관통상을 입히고 도주했다. 총을 맞은 경찰관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그는 경찰을 사칭해 지나가던 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운전자가 자신을 파출소 근처에 내려주려 하자 권총을 들고 위협하며 잠시 대치했다. 그러다 지나가던 차가 정차하자 차를 바꿔타고 운전자를 위협해 도쿄 방면으로 차를 몰게 했다. 중간에 검문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차를 위협해 갈아탔다. 이런 식으로 운전자를 위협하고 갈아탄 차만 모두 4대. 그는 시부야 총포상으로 향했다.
총포상에 도착한 카타기리가 차에서 내리자 운전자와 동승자 두 명은 소방서로 피신한 뒤 범인의 위치를 제보했다. 이 소식을 접한 경찰은 총포상을 포위했다. 당시 카타기리를 포위한 경찰 병력은 장갑차 10대, 헬기 2대, 경찰 580여명이었다.
경찰은 총포상에 최루탄을 발사했고 최루가스를 견디지 못한 카타기리가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때 인질이던 남자 점원이 들고 있던 총으로 카타기리의 뒤통수를 가격한 뒤 도망쳤고, 형사와 몸싸움을 벌인 카타기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됐다.
경찰 조사에서 카타기리는 오야부 하루히코의 소설 "야수는 죽어야 한다"를 보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는 군인 출신 아버지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총기에 관심이 많았으며 중학교 졸업 당시 친누나 명의로 실제 총을 선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범행에 대해 "여러 가지 총을 쏠 수 있어서 쌓여 있던 걸 전부 푼 느낌이다. 죽어도 좋다"라고 말했다.
그는 재판에서 "아직도 총에 대한 매력에 빠져있다. 장래에 사회에 나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사형시켜 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8살에 사고를 친 소년범은 1972년 7월21일 25세의 나이에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