いわゆる「穢多」と呼ばれていた人々は、
中世より動物の死体処理や皮革産業に従事していた人々で、
一種の「不可触民」として存在しており、
身分的に士農工商の下に位置していたというわけではなかったです。
彼らは街道で行き倒れた牛馬の死体処理や、その皮革を扱う仕事をしており、
それは「穢多」の人々にのみ許されたある種の「特権」であり、
また、特殊な技術を要する「専門職」でもありました。
動物の死体処理の際発生する血や臭い、また、感染症などのリスクのため、一般の集落とは距離を置き、
必然的に川の側などの水辺(低地であり洪水のリスク有り)に住むことが多かったと考えられます。
また、宗教的な習俗・思想により、
動物の死体を扱う職業である彼らを「穢れ」と捉え、距離を置いていたことが、
近代の「部落差別」につながっていったものと考えられます。
元来、「穢多」であるから貧しく、また、「穢多」であるから無学であるというわけではなく、
地域によっては立派な屋敷に住み、商売で印鑑などを用いた取引をしていた者もいました。
現在イメージされる典型的な貧困スラム型の「部落」は、
明治以降、被差別民ではない貧困者、犯罪者等が被差別部落に流入したことにより形成されたものも少なくなく、
大阪西成などがまさにこの典型で、西成は部落地区指定を受けてはいますが、もともとの被差別地域ではなく、
貧困者が流入した結果の都市型スラムであるといえます。
けっきょく、現在の「部落=貧困、差別」という図式は、明治以降、部落解放同盟によって作り上げられたイメージ像であり、また、そのほうが部落解放同盟にとっては都合が良かったという話です。
しかし、その解放同盟によって作られたイメージが拡散され、
また、解放同盟の常識や道理を外れた滅茶苦茶な解放運動により、部落=解放同盟のイメージが一般に定着してしまい、
けっきょく、本来は無害であったはずの部落民まで忌避され、
より一層、結婚差別や就職差別を受ける機会が増えてしまったという話です。
이른바 「예다」라고 불리고 있던 사람들은,
중세보다 동물의 시체 처리나 피혁 산업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로,
일종의 「불가촉민」으로서 존재하고 있어,
신분적으로 사농 공상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도에서 지쳐 쓰러진 우마의 시체 처리나, 그 피혁을 취급하는 일을 하고 있어,
그것은 「예다」의 사람들에게만 용서된 어떤 종류의 「특권」이며,
또,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이기도 했습니다.
동물의 시체 처리때 발생하는 피나 냄새난, 또, 감염증등의 리스크 때문에, 일반의 취락과는 거리를 두어,
필연적으로 강의 옆등의 물가(저지이며 홍수의 리스크 있어)에 사는 것이 많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종교적인 습속·사상에 의해,
근대의 「부락 차별」로 연결되어 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래, 「예다」이기 때문에 궁핍하고, 또, 「예다」이기 때문에 무학이다는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서는 훌륭한 저택에 살아, 장사로 인감등을 이용한 거래를 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현재 이미지 되는 전형적인 빈곤 슬램형의 「부락」은,
메이지 이후, 피차별민이 아닌 빈곤자, 범죄자등이 피차별 부락에 유입한 것에 의해 형성된 것도 적지 않고,
오사카 니시나리등이 확실히 이 전형으로, 니시나리는 부락 지구 지정을 받았다가 있습니다만, 원래의 피차별 지역이 아니고,
빈곤자가 유입한 결과의 도시형 슬램말합니다.
그러나, 그 해방 동맹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확산되어
또, 해방 동맹의 상식이나 도리를 빗나간 터무니없음 차 마시기 내기인 해방운동에 의해, 부락=해방 동맹의 이미지가 일반적으로 정착해 버려,
결국, 본래는 무해였음이 분명한 부락민까지 기피 되어
보다 한층, 결혼 차별이나 취직 차별을 받을 기회가 증가해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