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世界が崩壊された以後草原を支配して帝国を立てたことは元々キタイだった.
キタイは騎馬軍団の圧倒的な進撃速度と野戦での戦闘力優勢を利用した遊牧民式電撃戦をモンゴルより先に駆使した民族だった.
ひととき 海東盛国だと呼ばれた発しても, 926年, キタイの電撃戦にあって 上京が陷落されて滅亡したし,
唐を滅亡させた朱全忠の 後梁を滅ぼして中原の安定をはかろうと思った 後唐も, 936年キタイに 洛陽が陷落されながら滅亡,
後唐 以後に現われた 後晉も 947年, キタイに 開封が陷落されながら滅亡する.
辛うじて中原の安定を取り戻した 宋 やっぱり, 979年, 高梁河 戦闘でキタイに大敗しながら反撃の意志が折りなのなって,
1004年, キタイの大軍が 宋の首都 開封 の前まで進撃して 開封がまた陷落される危機に処すると,
莫大な対価を支払って 淵の 盟を結んで辛うじてキタイ軍を返す.
宋と 淵の 盟を結んだ 聖宗 の時のキタイは最大の全盛期に達する.
もうキタイは東の高麗を侵攻して滅亡させた後, 残っている 宋の領土を完全に征腹するつもりだった.
モンゴルと 宋を平定したキタイの 蕭排押が導く 10万騎馬隊が 1018年,高麗の国境の前に現われる.
彼に対立する高麗軍の指揮官は 姜邯賛だった.
姜邯賛はキタイ軍の威力は分かっていたが,守城戦ではない, 正面対決を選択, 高麗軍の本隊を国境近所, 三橋川 の前の平地に布陣させる.
両軍はすぐすぐ激突したが, 三橋川 戦闘は案外キタイ軍の敗北で終わる.
高麗軍の布陣をくぐることができないと判断した 蕭排押は騎馬隊の圧倒的な機動力で高麗軍の本隊を迂回して, 首都開京で進撃, キタイ軍の得意である電撃戦を始めた.
しかし 姜邯賛はキタイ軍の遠回り機動に備えて, 後方に予備兵力を隠しておいたし, 予備兵力は 来口山,馬灘でキタイ軍を奇襲して電撃戦を沮止した.
結局, キタイ軍は追撃して来た高麗軍に包囲されて, 亀州の平野で決戦をするしかなくなる.
与戦于茶陀二河之間我軍不利天雲右 皮室二軍沒溺者衆天雲軍詳穏海里遥 輦帳詳穏阿果逹客省使酌古渤海詳穏 高清明等皆沒于陣
茶河と 陀河 の間であった高麗軍との戦闘で, 私たちの軍隊が不利になって, 多くの人が死ぬようになった.天雲軍詳穏海里, 遥輦帳詳穏阿果逹, 客省使酌古, 渤海詳穏高清明 など, 皆, その所で死んだ.
出典 : 遼史
尸蔽野獲人口馬駝甲兵仗不可勝数生 還者僅数千人契丹之敗未有如此之甚
キタイ軍の死骸が野原を覆い被せた. 捕獲した虜, 馬, らくだ, 武器とよろいが数え切れない位に多かった. 暮して逃げだした敵軍は数千だけだった. キタイ軍がこんなに敗れたことは前例がない事だった.
出典 : 高麗史
当代最強だったキタイの騎馬隊は亀州の戦闘で 姜邯賛の高麗軍にべた負けして全滅する. そして国家の主軸だった騎馬隊を忘れてしまったキタイは衰退して 女真族とモンゴル族の反乱で滅亡するようになる.
고대 세계가 붕괴된 이후 초원을 지배하여 제국을 세웠던 것은 원래 거란이었다.
거란은 기마군단의 압도적인 진격속도와 야전에서의 전투력 우세를 이용한 유목민식 전격전을 몽골보다 먼저 구사하던 민족이었다.
한때 海東盛國이라고 불렸던 발해도, 926년, 거란의 전격전에 당하여 上京이 함락되어 멸망했고,
唐을 멸망시킨 朱全忠의 後梁을 멸하고 중원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後唐도, 936년 거란에게 洛陽이 함락당하면서 멸망,
後唐 이후에 나타난 後晉도 947년, 거란에게 開封이 함락되면서 멸망한다.
간신히 중원의 안정을 되찾은 宋 역시, 979년, 高梁河 전투에서 거란에 대패하면서 반격의 의지가 꺾기게 되고,
1004년, 거란의 대군이 宋의 수도 開封 앞까지 진격하여 開封이 다시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澶淵의 盟을 맺어 간신히 거란軍을 돌려보낸다.
宋과 澶淵의 盟을 맺은 聖宗 때의 거란은 최대의 전성기에 달한다.
이제 거란은 동쪽의 고려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후, 남아있는 宋의 영토를 완전히 정복할 셈이었다.
몽골과 宋을 평정했던 거란의 蕭排押이 이끄는 10만 기마대가 1018년, 고려의 국경 앞에 나타난다.
그에 맞서는 고려軍의 지휘관은 姜邯贊이었다.
姜邯贊은 거란軍의 위력은 알고 있었지만, 守城戰이 아닌, 정면 대결을 선택, 고려軍의 본대를 국경 부근, 三橋川 앞의 평지에 포진시킨다.
양군은 곧 바로 격돌했지만, 三橋川 전투는 예상외로 거란軍의 패배로 끝난다.
고려軍의 포진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蕭排押은 기마대의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고려軍의 본대를 우회하여, 수도 개경으로 진격, 거란軍의 특기인 전격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姜邯贊은 거란軍의 우회 기동에 대비해, 후방에 예비 병력을 숨겨놓았고, 예비병력은 來口山, 馬灘에서 거란軍을 기습하여 전격전을 저지했다.
결국, 거란軍은 추격해온 고려軍에 포위되어, 龜州의 평야에서 결전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된다.
與戰于茶陀二河之間我軍不利天雲右皮室二軍沒溺者衆天雲軍詳穩海里遙輦帳詳穩阿果達客省使酌古渤海詳穩高淸明等皆沒于陣
茶河와 陀河 사이에서 있었던 고려軍과의 전투에서, 우리의 군대가 불리해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天雲軍詳穩海里, 遙輦帳詳穩阿果達, 客省使酌古, 渤海詳穩高淸明 등, 모두, 그곳에서 죽었다.
出典 : 遼史
僵尸蔽野俘獲人口馬駝甲冑兵仗不可勝數生還者僅數千人契丹之敗未有如此之甚
거란軍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 노획한 포로, 馬, 낙타, 무기와 갑옷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살아서 도망간 적군은 수천뿐이었다. 거란軍이 이렇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出典 : 고려사
당대 최강이었던 거란의 기마대는 龜州의 전투에서 姜邯贊의 고려軍에 완패하여 전멸한다. 그리고 국가의 주축이었던 기마대를 잃어버린 거란은 쇠퇴하여 女眞족과 몽골족의 반란으로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