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紙「日本アシカを絶滅させたのは韓国だと判明」
http://www.sankei.com/west/news/160708/wst1607080004-n1.html
竹島で営まれていたアシカ猟の様子を撮影した写真
(1935年撮影、島根県竹島資料室提供)
「アシカ絶滅は日本のせい」は捏造…韓国の定説に韓国紙が異議、乱獲し精力剤にしたのは韓国だ
竹島は、1905年2月22日、「島根県告示第40号」により島根県隠岐島司の所管に入った。それは、竹島でアシカ猟をするため、島根県周吉(すき)郡西郷町(現隠岐の島町)の漁業者、中井養三郎が、島の貸し下げを明治政府に求めたことに始まり、明治政府は同年1月28日の閣議決定で、“無主の地”だった無人島を「竹島」と命名して日本領に編入し、冒頭の島根県告示に至った。竹島とアシカには、そのはじめから浅からぬ因縁があったのだ。
韓国の“定説”に異を唱えた韓国紙
近年、韓国側ではその竹島(独島)のアシカに関心が集まっている。
日本の内閣官房領土・主権対策企画調整室が2014年12月、隠岐の漁師と竹島のアシカとの関わりを描いた絵本「メチのいた島」の読み聞かせ動画を公開した。これに、韓国側が対抗して竹島にアシカ像を置こうとしたが実現せず、翌年8月になって竹島の船着場近くにアシカのレリーフを設置した。
韓国側には、「独島(竹島)のアシカを絶滅させたのは日本人だ」とする“歴史認識”が根強く、レリーフはその広告塔として利用するのが狙いだ。
ところが、その認識を覆す記事が6月13日、韓国の慶尚毎日新聞(ネット版)に掲載された。同紙のチョウ・ヨンナム記者がさまざまな証言を集め、日本人が竹島のアシカを絶滅させたとする“定説”に異を唱えたのだ。
「アシカ滅亡は日本のせい」と主張する韓国
チョウ記者は、1950年代半ば、竹島に上陸していた独島義勇守備隊の複数の隊員から「当時、アシカは最小限700頭余りが生きていた」との証言を得ている。これは1960年代も同様で、竹島に駐在した海洋警察隊員と漁民が「数百頭が棲息(せいそく)していた」と証言している。
1970年代初頭も変わりがなかった。工事のため竹島に渡った韓国・欝陵(うつりょう)島の住民が「当時、数百頭が生きていた」と証言しているからだ。1970年代の初めまで、竹島にはアシカが生存していたのである。
しかし、竹島問題と関連してアシカが論じられると状況が違ってくる。
島根県竹島問題研究会が2014年に刊行した『竹島問題100問100答』では、韓国の不法占拠時(1954年)には200〜500頭のアシカが竹島に生息していたが、1970年代半ばを最後に目撃情報が途絶え、2010年に「韓国政府が絶滅宣言を行う」との報道がなされたことなどを指摘した。
これに対し、韓国の慶尚北道独島史料研究会は「韓国ではアシカの油は採取せず、皮も使わないので、独島のアシカを滅亡させたのは日本だ」と反論したのだ。
機関砲で撃ち、イカ漁のため追い払う
だが、この反論は事実と違う。チョウ記者は、竹島のアシカが絶滅した背景について、「アシカの『海狗腎(かいくじん)』(生殖器)と肉を得るためで、独島を警備していた隊員が(アシカを狙って)独島の東島頂上から機関砲を撃ち、射撃訓練をしていた」とした。
さらに、隊員の中には、「海狗腎を政府の高官や軍の上層部に上納していた」と証言する者もいたという。
また、竹島周辺では韓国によるイカ漁などの漁業が盛んになり、集魚灯近くにアシカが出現すると魚が逃げるため、漁師らが追い払ったという。
このように竹島に群棲していたアシカは、韓国側が乱獲したことに加え、漁師によって棲息地から追い出され、その繁殖地を失って絶滅した-というのが史実に近い。
多様な用途あったアシカ
慶尚北道独島史料研究会は「韓国ではアシカの油は採取せず」とするが、それも事実ではない。
明治の探検家、松浦武四郎の『竹島雑誌』(1871年刊)では、「朝鮮人これを猟せば/油を得る」としている。アシカには、さまざまな用途があった。
それを示しているのが、2012年8月19日付『中央日報』である。同紙は、「独島守備隊が武器を調達する際、釜山のヤンキー市場に行き、アシカ1頭と引き換えに拳銃と小銃を取得した」と報じている。これは、アシカが売れることを知っていたからだ。
チョウ記者によると、1960年代、警察署長の求めに応じ、欝陵島の金某氏がアシカ1頭を捕獲すると、お礼に「麦を2叺(かます)(1叺=76・5キロ)ももらった」という。この警察署長が求めていたのはアシカの海狗腎で、朝鮮半島ではアシカの生殖器を滋養強壮剤としていたからである。
新羅時代にも存在したアシカ猟
アシカ猟の歴史は古い。朝鮮時代の医師・許浚(ホ・ジュン)が著した『東医宝鑑』(1610年成立)では、「新羅国、海狗の外腎(がいじん)なり」として、新羅時代にも存在したとしている。
『東医宝鑑』の「湯液篇」では、アシカを「膃肭臍(オットセイ)」と表記し、明代の医師・李時珍の『本草綱目』(1578年成立)では「膃肭臍」の一名として「海狗腎」を挙げ、「膃肭獣」を「海狗」としている。
アシカの生殖器が海狗腎とされたのは、海狗の「腎(性器)」だったからである。
『東医宝鑑』では、膃肭臍の棲息地として江原道の平海郡を挙げ、膃肭臍は「甚だ貴く得難し」としている。そのため、『世宗実録・地理志』(15世紀成立)の「平海郡」条では、膃肭臍を「薬材」に分類したのである。『新増東国輿地勝覧』(16世紀成立)になると、平海郡の「膃肭臍」は「海獺(うみうそ、アシカ)」とされている。当時、アシカは膃肭臍だけでなく、「海狗」とも「海獺」とも呼ばれていた。
アシカ絶滅の経緯が史実究明につながる?
だが、朝鮮時代のアシカの棲息地は、平海郡や江戸時代に鳥取藩米子の大谷・村川両家がアシカ猟をした欝陵島だけではなかった。
『秋江先生文集』(「遊金剛山記」)によると、朝鮮時代の文臣・南孝温は、杆城郡の清澗駅近くや襄陽の海辺でも海獺の群鳴に遭遇している。そのアシカもまた、時代とともに姿を消していった。
1976年8月、韓国・梨花女子大学の調査チームが竹島で調査した際に、アシカの生息が確認された。その時、韓国内ではアシカの保護が叫ばれたが、実現しなかった。
ここでチョウ記者が伝えたかったのは、「竹島のアシカを絶滅させたのは日本だ」とする虚偽の歴史を捏造(ねつぞう)し、日本を非難すれば、国際社会から韓国は「嘘つき」の烙印(らくいん)を押されてしまう。それでは竹島の領有権を争う際に、不利になる、ということだった。
だが竹島のアシカが絶滅した事実を究明していけば、やがて竹島を韓国領とする「歴史認識」についても、史実を究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時が来る。チョウ記者は言外にそう語っ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
韓国人が日本アシカを戦後に絶滅させたことを知らないのですか?
1958年の竹島周辺では200〜500頭ほどのニホンアシカが確認されていた。
数少ない生き残りも戦後の竹島を韓国が要塞化した、これにより完全に生息地&繁殖地を奪われてしまった。1991年当時の韓国の環境庁が絶滅宣言をだした。
1952年10月3日付けのアメリカ大使館が作成してアメリカ本国に送った文書には The rocks, which are fertile seal breeding grounds
「あしかの群れの繁殖場所によく利用されるこの島」と書いてあるように、1952年時点では、竹島(独島)はあしかの繁殖場所として存在していたことがわかる。その後、徐々に目撃回数が減って行き、1975年を最後に目撃されていない。
韓国はニホンアシカを全く保護していなかった。
絶滅危惧種の独島アシカ、来年にも絶滅宣言見通し
聯合ニュース 2010/8/12
【ソウル12日聯合ニュース】環境部は12日、独島アシカ(ニホンアシカ)の実態調査を独島(日本名:日本海)、鬱陵島、日本近海などで実施したが、生存は確認できなかったと明らかにした。同部は韓国海域から姿を消した独島アシカの復元に向け、韓国環境生態研究所に実態調査を依頼していた。
1950年代には約100匹の独島アシカを見たと独島守備隊員が話しているが、1970年代の目撃談以降は情報がない。政府は1998年、独島アシカを絶滅危惧(きぐ)種に指定した。
学名: (日本海驢、Zalophus japonicus)
1950年代に竹島を占拠していた独島義勇守備隊により、アシカが20〜30匹ずつ群れをなして泳いでいる姿を目撃。
1958年(昭和33年)、竹島周辺の個体は200〜500頭程度の少数の個体が生存するとの報告。
1950年代後期の推定生息数、竹島で100頭、全生息域で最大300頭。
朝鮮戦争中には韓国兵が射撃訓練の的として使った。
ニホンアシカが絶滅した主原因は、竹島の不法占拠と乱開発。ニホンアシカは住処を失い、乱獲されたり射撃の的にされた。
한국지 「일본 강치를 멸종시킨 것은 한국이라고 판명」
http://www.sankei.com/west/news/160708/wst1607080004-n1.html
타케시마에서 영위되고 있던 강치렵의 님 아이를 촬영한 사진
(1935년 촬영, 시마네현 타케시마 자료실 제공)
「강치 멸종은 일본의 탓」은 날조 한국의 정설에 한국지가 이의, 난획해 정력별로 한 것은 한국이다
타케시마는,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에 의해 시마네현 오키 시마 츠카사의 소관에 들어갔다.그것은, 타케시마에서 강치렵을 하기 위한(해), 시마네현주길(좋아) 군 사이고우쵸(현오키의 시마쵸)의 어업자, 나카이양사부로가, 섬의 대여를 메이지 정부에 요구했던 것에 시작되어, 메이지 정부는 동년 1월 28일의 각의 결정으로, “무주의 땅”이었던 무인도를 「타케시마」라고 명명해 일본령에 편입해, 모두의 시마네현 고시에 이르렀다.타케시마와 강치에는, 그 초부터 천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근년, 한국측에서는 그 타케시마(독도)의 강치에 관심이 모여 있다.
일본의 내각 관방 영토·주권 대책 기획 조정실이 2014년 12월, 오키의 어부와 타케시마의 강치와의 관계를 그린 그림책 「메치가 있던 섬」이 읽어 들려주어 동영상을 공개했다.이것에, 한국측이 대항해 타케시마에 강치상을 두려고 했지만 실현되지 않고, 다음 해 8월이 되어 타케시마의 선 착장 근처에 강치의 릴리프를 설치했다.
한국측에는, 「독도(타케시마)의 강치를 멸종시킨 것은 일본인이다」라고 하는“역사 인식”이 뿌리 깊고, 릴리프는 그 광고탑으로서 이용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 그 인식을 뒤집는 기사가 6월 13일, 한국의 경상 마이니치 신문(넷판)에 게재되었다.동지의 나비·욘남 기자가 다양한 증언을 모아 일본인이 타케시마의 강치를 멸종시켰다고 하는“정설”에 반대 의견을 내세웠던 것이다.
나비 기자는, 1950년대 중반, 타케시마에 상륙하고 있던 독도 의용 수비대의 복수의 대원으로부터 「당시 , 강치는 최소한 700마리남짓이 살아 있었다」라고의 증언을 얻고 있다.이것은 1960년대도 마찬가지로, 타케시마에 주재한 해양 경찰대원과 어민이 「수백마리가 서식(서식)하고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초두도 변화가 없었다.공사를 위해 타케시마에 건넌 한국·울능(치는 료) 도의 주민이 「당시 , 수백마리가 살아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1970년대의 처음까지, 타케시마에는 강치가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타케시마 문제와 관련하고 강치가 논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시마네현 타케시마 문제 연구회가 2014년에 간행한 「타케시마 문제 100문 100답」에서는, 한국의 불법 점거시(1954년)에는 200~500마리의 강치가 타케시마에 생식 하고 있었지만, 1970년대 중반을 마지막으로 목격 정보가 끊어져 2010년에 「한국 정부가 멸종 선언을 실시한다」라고의 보도가 이루어진 것 등을 지적했다.
이것에 대해, 한국의 경상북도 독도 사료 연구회는 「한국에서는 강치의 기름은 채취하지 않고, 가죽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독도의 강치를 멸망 시킨 것은 일본이다 」라고 반론했던 것이다.
기관포로 쏘아, 오징어고기잡이이기 때문에 쫓아버린다
하지만, 이 반론은 사실과 다르다.나비 기자는, 타케시마의 강치가 멸종한 배경으로 대해서, 「강치의 「해 구신(화육 인)」(생식기)과 고기를 얻기 때문에, 독도를 경비하고 있던 대원이(강치를 노려) 독도의 히가시지마 정상으로부터 기관포를 쏘아, 사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게다가 대원중에는, 「해 구신을 정부의 고관이나 군의 상층부에 상납하고 있었다」라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 타케시마 주변에서는 한국에 의한 오징어고기잡이등의 어업이 활발하게 되어, 집어등 근처에 강치가 출현하면 물고기가 도망치기 위해, 어부등이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와 같이 타케시마에 군서 하고 있던 강치는, 한국측이 난획했던 것에 가세해 어부에 의해서 서식지로부터 내쫓아져 그 번식지를 잃어 멸종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경상북도 독도 사료 연구회는 「한국에서는 강치의 기름은 채취하지 않고」라고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아니다.
메이지의 탐험가, 마쓰우라 다케시로의 「타케시마 잡지」(1871 연간)에서는, 「한국인 이것을 렵/유를 얻는다」라고 하고 있다.강치에는, 다양한 용도가 있었다.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2012년 8월 19 일자 「중앙 일보」이다.동지는, 「독도 수비대가 무기를 조달할 때, 부산의 양키 시장에 가, 강치 1마리와 교환에 권총과 소총을 취득했다」라고 알리고 있다.이것은, 강치가 팔리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비 기자에 의하면, 1960년대, 경찰서장의 요구에 따라 울능도의 금 모씨가 강치 1마리를 포획 하면, 답례로 「보리를 2입(가마니)(1입=76·5킬로)도 받았다」라고 한다.이 경찰서장이 요구하고 있던 것은 강치의 해 구신으로, 한반도에서는 강치의 생식기를 자양 강장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다.
강치렵의 역사는 낡다.조선시대의 의사·허준(호·쥰)이 저술한 「아즈마의보감」(1610년 성립)에서는, 「신라국, 해 구의 외신(외국인) 되어」로서, 신라시대에도 존재했다고 하고 있다.
「아즈마의보감」의 「탕액편」에서는, 강치를 「올눌제(물개)」라고 표기해, 명대의 의사·이시진의 「본초강목」(1578년 성립)에서는 「올눌제」의 한명으로서 「해 구신」을 들어 「올눌수」를 「해 구」라고 하고 있다.
강치의 생식기가 해 구신으로 여겨진 것은, 해 구의 「신장(성기)」였기 때문이다.
「아즈마의보감」에서는, 올눌제의 서식지로서 강원도의 평해군을 올려 올눌제는 「매우 고귀하고 득난 해」라고 하고 있다.그 때문에, 「세종 실록·지리뜻」(15 세기 성립)의 「평해군」조에서는, 올눌제를 「약재」로 분류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6 세기 성립)이 되면, 평해군의 「올눌제」는 「바다수달(바다 거짓말, 강치)」이라고 여겨지고 있다.당시 , 강치는 올눌제 뿐만이 아니라, 「해 구」라고도 「바다수달」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강치의 서식지는, 평해군이나 에도시대에 톳토리번요나고의 오오타니·무라카와 양가가 강치렵을 한 울능도 만이 아니었다.
「아키에 선생님 문집」( 「유휴자금강산기」)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문신·남효온은, 간성군의 청간역 근처나 노보루 햇빛의 해변에서도 바다수달의 군명에 조우하고 있다.그 강치도 또, 시대와 함께 자취을 감추고 갔다.
1976년 8월, 한국·이화여대학의 조사 팀이 타케시마에서 조사했을 때에, 강치의 생식이 확인되었다.그 때, 한국내에서는 강치의 보호가 주장되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여기서 나비 기자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타케시마의 강치를 멸종시킨 것은 일본이다」라고 하는 허위의 역사를 날조(군요 개상) 해, 일본을 비난 하면,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은 「거짓말쟁이」의 낙인(들 먹어 )을 밀려 버린다.그러면 타케시마의 영유권을 싸울 때에, 불리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케시마의 강치가 멸종한 사실을 구명해 나가면, 이윽고 타케시마를 한국령으로 하는 「역사 인식」에 대해서도, 사실을 구명해야 하는 때가 온다.나비 기자는 언외에 그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이 일본 강치를 전후에 멸종시킨 것을 모릅니까?
1958년의 타케시마 주변에서는 200~500마리 정도의 니혼아시카가 확인되고 있었다.
얼마 안되는 생존도 전후의 타케시마를 한국이 요새화한, 이것에 의해 완전하게 생식지&번식지를 빼앗겨 버렸다.1991년 당시의 한국의 환경청이 멸종 선언을 냈다.
1952년 10월 3 날짜의 미국 대사관이 작성해 미국 본국에 보낸 문서에는 The rocks, which are fertile seal breeding grounds
「강치의 무리의 번식 장소에 자주(잘) 이용되는 이 섬」이라고 써 있다 게, 1952년 시점에서는, 타케시마(독도) 네 밖에의 번식 장소로서 존재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그 후, 서서히 목격 회수가 줄어 들어서 가, 1975년을 마지막으로 목격되어 있지 않다.
한국은 니혼아시카를 전혀 보호하지 않았다.
멸종 위구심종의 독도 강치, 내년에라도 멸종 선언 전망
연합 뉴스 2010/8/12
【서울 12일 연합 뉴스】환경부는 12일, 독도 강치(니혼아시카)의 실태 조사를 독도(일본명:일본해), 울릉도, 일본 근해등에서 실시했지만, 생존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분명히 했다.같은 부는 한국 해역으로부터 자취을 감춘 독도 강치의 복원을 향해서 한국 환경 생태 연구소에 실태 조사를 의뢰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약 100마리의 독도 강치를 보았다고 독도 수비 대원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1970년대의 목격담 이후는 정보가 없다.정부는 1998년, 독도 강치를 멸종 위구심(기구) 종으로 지정했다.
학명: (일본해려, Zalophus japonicus)
1950년대에 타케시마를 점거하고 있던 독도 의용 수비대에 의해, 강치가 20~30 마리씩 떼를 지어 헤엄치고 있는 모습을 목격.
1958년(쇼와 33년), 타케시마 주변의 개체는 200~500마리 정도의 소수의 개체가 생존한다라는 보고.
한국 전쟁중에는 한국병이 사격 훈련의 목표로서 사용했다.
니혼아시카가 멸종한 주원인은, 타케시마의 불법 점거와 난개발.니혼아시카는 주처를 잃어, 난획되거나 사격의적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