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嘘ばかり吐いた詐欺師で密猟者の賎民 安龍福が将軍になる国



1592年:豊臣秀吉の朝鮮出兵で日本海沿岸住民は鬱陵島が無人島である事を知り開発を始めた。これに気づいた李朝の東莱府が1614年(慶長19年)に対馬藩に対して抗議を行った。対馬藩は鬱陵島を日本領であると主張したとされているが、当時は両国とも内外に複雑な事情を有していたため、この時にはそれっきり両国ともに問題は棚上げされた。

1618年:鳥取県の商人、大谷、村川両家が幕府(日本政府)より竹島を拝領して渡海免許を受けており、将軍家の紋章を打ち出した船印を立て、鬱陵島の独占的経営を幕府(政府)公認で行っていた。大谷甚吉・村川市兵衛らは毎年交代で鬱陵島に赴いて、鮑・アシカ等の漁猟、木竹の伐採などを行い、鮑を幕府(殿様)に献上していた。現在の竹島(独島)は鬱陵島への寄港地、漁労地として利用されていた。また、遅くとも1661年には、両家は幕府から松島(現在の竹島=独島)も正式に拝領(契約)し、鳥取藩も毎年の渡海にあたっては、米や鉄砲の貸付をしていた。

以上は鳥取県の大谷家に伝わる「竹嶋渡海由来記 抜書控」として資料が残っている。

1692年(元禄5年)に竹島(鬱陵島)へ出漁した大谷、村川家が同島で朝鮮人と遭遇。この時、鬱陵島に朝鮮人が53人が来ていたが、日本側は21人の少数であったので争うことはしないで、早々に朝鮮人が作っていた串鮑のほか、笠、網頭巾、麹味噌を持ち帰って鳥取藩に報告した。この処理をめぐって鳥取藩から対処方法を問われた幕府は、すでに朝鮮人が鬱陵島から退去したという事で、特に問題にしなかった。

しかし、翌1693年(元禄6年)4月にも40人の朝鮮人が来ていた。その中の2人を逮捕して日本に連行した。安龍福と朴於屯の二人で、日本で二か月にわたる取り調べの後、日本米子の家老 荒尾修理より報告を受けた鳥取藩は、この事を江戸に連絡して指示を仰ぐと共に、その指示があるまで安龍福ら2名の朝鮮人を米子の大谷九右衛門勝房方に留め、足軽2名を付き添わせて警護に当たった。また幕府には鬱陵島に朝鮮人が来ないよう朝鮮に申し入れをすることを要請した。幕府は鳥取藩にこの2名を長崎奉行所に送るよう指示し、対朝鮮交渉の窓口であった対馬藩の宗氏には、長崎で二人を引き取らせ対馬経由で朝鮮へ引き渡すよう命じ、同時に、鬱陵島は日本領であるから朝鮮人の出漁禁止の措置をとるよう朝鮮国に要請させた。

5月26日:江戸より飛脚が到着、安龍福らを長崎に護送するように指示がある。

5月29日:米子を出発。
6月 1日:鳥取に到着。
6月 7日:山田兵衛門、平井甚右衛門を護送役として鳥取を出発。
6月30日:長崎に到着。
7月 1日:長崎奉行所に両名を引き渡す。
8月14日:対馬からの使者・一宮官助左衛門に引き渡される。
9月 3日:対馬に到着。

対馬藩主宗義倫は、交渉の使者正官・多田与左衛門の一行に帯同されて、釜山に着き、安龍福ら両名を朝鮮政府に引き渡すと共に、鬱陵島に対する朝鮮漁民の侵入を禁ずる旨を通告した。安龍福は朝鮮で裁きを受けて2年ほど牢獄に入ったと記録されている。この時より両国の領土をめぐる外交交渉が本格的に始まった。

この時、対馬藩が朝鮮王朝に宛てた文書には、日本領土の島であるという認識を示していた。また対馬藩の『朝鮮通交大紀』にも、1693年に朝鮮人が「我隠州竹島(鬱陵島)に来り」と、鬱陵島が鳥取藩に所属するということを表明している。

日本の申し入れに対し、朝鮮は日本との友好を重んじ、穏便に解決をはかる方針で交渉に臨んだ。しかし、交渉が長引く間に政権を掌握していた領議政の権大運、左議政の睦来善、右議政の閔黯が何れも失脚し、領議政に南九万、左議政に朴世采、右議政に尹趾完が任ぜられ交渉方針を強硬姿勢に転じた。

1695年、朝鮮は接慰官を釜山に派遣し、礼曹参判李畬の名をもって9月12日に返書を対馬藩へ送り、宗氏の竹島日本領説を反駁させた。この書契では、鬱陵島は空島としているが時々役人を派遣して調査をしているとし、東国輿地勝覧に照らしても、本土から良く見え、朝鮮住民がこの島でいろいろな物産を採っているとあり、朝鮮の領有は明らかであるとしている。

1695年6月まで外交交渉は続いた。交渉途中であった1694年9月27日に対馬藩主・宗義倫が病死。後に、鬱陵島は朝鮮領であったにせよ、長く空島であったのだから、日本領であるという意見と、東国輿地勝覧(1481年成立)の記事などから朝鮮領だという立場に国内の議論は二分されていたが、この頃になると後者の意見が大勢になっていた。

1695年10月、対馬藩は新藩主・宗義方の襲名と参勤交代を期に、鬱陵島は朝鮮領であるとして、江戸幕府に朝鮮側との交渉の中断を申し出た。江戸にて老中・阿部豊後守正武に、朝鮮側との交渉も三年になり、朝鮮側が頑迷な事も伝え、幕府の判断を仰いだ。

この回答を受けて幕府は鬱陵島の本格的な検討を始めた。

1695年12月24日、老中・阿部豊後守は鳥取藩に対し17カ条からなる「御尋の御書付」で問い合わせた。幕府は、鬱陵島が因幡・伯耆を支配する鳥取藩付属の島であると考えていたことがわかる。

ところが幕府の質問に対して鳥取藩は、むやみな争いを嫌い1695年12月25日付の文書で鬱陵島は自藩領ではないとした。幕府は、鳥取藩が鬱陵島は自藩領でないと回答したことや、その島に日本人が住んでいないこと、さらに地理的に因幡からよりは朝鮮からの方が近いことなどを考慮し、朝鮮領であると決定した。

翌1698年3月、朝鮮政府は、当面の問題であった漁業禁止に満足して、礼曹参議李善溥の名をもって日本の決定に謝意を表した。(「粛宗実録」二十四年三月二十五日の条)

この様にして領土問題は決着したのである。





安龍福(アン・ヨンボク、1657年生-没年不詳)詐欺師。密猟者。

朝鮮国慶尚道東莱県釜山に住んでいた賎民。

韓国では何故か将軍となっている。


            鳥取藩士江石梁(岡島正義)編述の『竹島考』には、安龍福の身分を示す腰牌(認識票)の内容を書き取ったものがある。表面には「私奴(賤民)、用朴、年三十三、長四尺一寸、面鉄髭暫生疵無、主京居呉忠秋」裏面には「庚午、釜山佐自川一里、第十四統三戸」と記されている。

顔は赤ら顔、やや髭が生え、体には傷がないことが伺える。「庚午」の年に33才であることから、「庚午」は元禄3年(1690年)になるので、1657年生まれであることが分かる。身長は約124cm。居住地は彼の証言からも釜山の佐自川一里。

まとめると、安龍福は1657年生れ、出身は慶尚道東莱県の釜山。赤ら顔の賤民で、漁業にも従事していた。性格は狂暴で暴悪な面があり、公の場でも平気で虚言を放つ人物である。朝鮮の東莱府使からは「漂風の愚民」と評されていた。


1693年(元禄6年)4月、鳥取藩大谷家21人の乗った船が幕府の許可を得て鬱陵島に行き、漁労をしている10人ほどの朝鮮人に出会う。その中に日本語が話せる安龍福がおり、尋問される。安龍福が言うには、自分は42歳で朝鮮より3艘42人で来ていると言っている。これを危惧した大谷家の人たちは安龍福と朴於屯の2人を捕らえ日本に連行する。安龍福は朝鮮へ送り返され、朝鮮で牢獄へ2年入れられる。しかし3年後、再び日本へ行き詐欺を働く。

安龍福は帰国後捕らえられソウルの備辺司へ移送される。ここでの尋問後、倭人と訴訟事件を起こした罪により島流しとなる。この時の安龍福の供述内容は虚言や嘘ばかりである内容が朝鮮の『粛宗実録』に記録されている。
安龍福は島流しされた地でのたれ死んだ。



この単なる詐欺師がなぜ英雄に変わったのか?
申奭鎬著の「独島の来歴」(雑誌『思想界』1960年)
これに描かれた安龍福は嘘八百だが、
その内容がそのまま、その後の歴史教育に使われたようです。



사기꾼 안용복이 장군이 되는 한국

거짓말만 토한 사기꾼으로 밀렵자의 천민안용복이 장군이 되는 나라



1592년: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으로 일본해 연안 주민은 울릉도가 무인도인 일을 알아 개발을 시작했다.이것을 눈치챈 이조의 동래부가 1614년(게이쵸 19년)에 쓰시마번에 대해서 항의를 실시했다.쓰시마번은 울릉도를 일본령이다고 주장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당시는 양국 모두 내외에 복잡한 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에는 그것 뿐 양국 모두 문제는 보류되었다.

1618년:톳토리현의 상인, 오오타니, 무라카와 양가가 막부(일본 정부)보다 타케시마를 배령 해 항해 면허를 받고 있어 막부의 문장을 밝힌 선박 표지를 세워 울릉도의 독점적 경영을 막부(정부) 공인으로 가고 있었다.오오타니심길·무라카와시 효에등은 매년 교대로 울릉도로 향해 가고, 전복·강치등의 어업, 목죽의 벌채등을 실시해, 전복을 막부(영주)에 헌상 하고 있었다.현재의 타케시마(독도)는 울릉도에의 기항지, 어로지로서 이용되고 있었다.또, 늦어도 1661년에는, 양가는 막부로부터 마츠시마(현재의 타케시마=독도)도 정식으로 배령(계약) 해, 톳토리번도 매년의 항해에 임해서는, 미나 총의 대출을 하고 있었다.

이상은 톳토리현의 오오타니가에 전해지는 「대나무시마 항해 유래기발초공」으로서 자료가 남아 있다.

1692년(겐로쿠 5년)에 타케시마(울릉도)에 출어 한 오오타니, 무라카와가가 동섬에서 한국인과 만남.이 때, 울릉도에 한국인이 53명이 와있었지만, 일본측은 21명의 소수였으므로 싸우지는 않고, 서서히 한국인이 만들고 있던 곶포외, 삿갓, 그물 두건, 국된장을 가지고 돌아가 톳토리번에 보고했다.이 처리를 둘러싸고 톳토리번으로부터 대처 방법이 추궁 당한 막부는, 벌써 한국인이 울릉도로부터 퇴거했다고 하는 일로, 특별히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1693년(겐로쿠 6년) 4월에도 40명의 한국인이 와있었다.그 중의 2명을 체포해 일본에 연행했다.안용복과 박어둔의 둘이서, 일본에서 2개월에 걸치는 조사의 뒤, 일본쌀자의 가로 아라오 수리보다 보고를 받은 톳토리번은, 이 일을 에도에 연락해 지시를 받음과 동시에, 그 지시가 있다까지 안용복등 2명의 한국인을 요나고의 오오타니 큐우에몬승방분에게 말려 최하급 무사 2명을 시중들게 해 경호에 임했다.또 막부에는 울릉도에 한국인이 오지 않게 조선에 신청을 하는 것을 요청했다.막부는 톳토리번에 이 2명을 나가사키 부교곳에 보내도록 지시해, 대조선 교섭의 창구에서 만난 쓰시마번의 소시에게는, 나가사키에서 두 명을 인수하게 해 대마도 경유로 조선에 인도하도록(듯이) 명해 동시에, 울릉도는 일본령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출어 금지가 조치를 취하도록(듯이) 조선국에 요청시켰다.

5월 26일:에도보다 비각이 도착, 안용복등을 나가사키에 호송하도록(듯이) 지시가 있다.

5월 29일:요나고를 출발.
6월 1일:톳토리에 도착.
6월 7일:야마다 효에문, 히라이 진에몬을 호송역으로서 톳토리를 출발.
6월 30일:나가사키에 도착.
7월 1일:나가사키 부교소에 두명을 인도한다.
8월 14일:대마도로부터의 사자·이치노미야관 스케자에몬에 인도해진다.
9월 3일:대마도에 도착.

쓰시마번주교의륜은, 교섭의 사자 마사히로·타다 요자에몬의 일행에 대동되고, 부산에 도착해,안용복등 두명을 조선 정부에 인도함과 동시에,울릉도에 대한 조선 어민의 침입을 금하는 취지를 통고했다.안용복은 조선에서 중재를 받아 2년 정도 감옥에 들어갔다고 기록되고 있다.이 때부터 양국의 영토를 둘러싼 외교교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쓰시마번이 조선 왕조 앞으로 보낸 문서에는, 일본 영토의 섬이다고 하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었다.또 쓰시마번의 「조선통교대기」에도, 1693년에 한국인이 「아은주 타케시마(울릉도) 래」(이)라고, 울릉도가 톳토리번에 소속하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일본의 신청에 대해, 조선은 일본과의 우호를 존중해 원만하게 해결을 도모할 방침으로 교섭에 임했다.그러나, 교섭이 길어지는 동안에 정권을 장악 하고 있던 령의 정의 권대운, 좌의정의 무츠미 와 선, 우의정의 민암이 어느 쪽도 실각해, 령의 정에 남 9만, 좌의정에 박세채, 우의정에 윤지완이 임교섭 방침을 강경 자세로 변했다.

1695년, 조선은 접위관을 부산에 파견해, 례조참판리의 이름을 가지고 9월 12일에 답장을 쓰시마번에 보내, 소시의 타케시마 일본령설을 반박 시켰다.이 문자에서는, 울릉도는 공도로 하고 있지만 찬`천X공무원을 파견하고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해, 동국여지승람에 비추어도, 본토로부터 잘 보여 조선 주민이 이 섬에서 여러가지 물산을 뽑고 있으면 있어, 조선의 영유는 분명하다라고 하고 있다.

1695년 6월까지 외교교섭은 계속 되었다.교섭 도중에 있던 1694년 9월 27일에 쓰시마번주·교의륜이 병사.후에, 울릉도는 조선령이었든, 길고 공도였으니까, 일본령이다고 하는 의견과 동국여지승람(1481년 성립)의 기사등에서 조선령이라고 하는 입장에 국내의 논의는 2분되고 있었지만, 요즘이 되면 후자의 의견이 여럿이 되어 있었다.

1695년 10월, 쓰시마번은 신지방 영주·교의분의 이름을 계승과 참근 교대를 기에, 울릉도는 조선령이다고 하여, 에도 막부에 조선측과의 교섭의 중단을 신청했다.에도에서 노중·아베 분고수마사타케에, 조선측과의 교섭도 3년이 되어, 조선측이 완미한 일도 전해 막부의 판단을 바라보았다.

이 회답을 받아 막부는 울릉도의 본격적인 검토를 시작했다.

1695년 12월 24일, 노중·아베 분고수는 톳토리번에 대해 17카조로부터 되는 「심의 문서」로 문의했다.막부는, 울릉도가 이나바·호키를 지배하는 톳토리번부속의 섬이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막부의 질문 에 대해서 톳토리번은, 터무니없는 싸움을 싫어해 1695년 12월 25 일자의 문서로 울릉도는 자번령은 아니라고 했다.막부는, 톳토리번이 울릉도는 자번령이 아니다고 회답한 것이나, 그 섬에 일본인이 살지 않은 것, 한층 더 지리적으로 이나바로부터 보다는 조선으로부터(분)편이 가까운 일등을 고려해, 조선령이라고 결정했다.

다음 1698년 3월, 조선 정부는, 당면의 문제인 어업 금지에 만족하고, 례조참의리선부의 이름을 가지고 일본의 결정에 사의를 나타냈다.( 「숙소우지츠록」24년 3월 25일의 조)

이와 같게 해 영토 문제는 결착했던 것이다.





안용복(안·욘 나, 1657년생-몰년 미상) 사기꾼.밀렵자.

조선국 경상도 동래현 부산에 살고 있던 천민.

한국에서는 왜일까 장군이 되고 있다.


톳토리 번사 에이시량(오카지마 마사요시) 편술의 「타케시마고」에는, 안용복의 신분을 나타내는 요패(인식표)의 내용을 받아쓴 것이 있다.표면에는 「사노(천민), 용박, 연 33, 장 4자한 치, 면철자잠생자무, 주경거우중가을」이면에는 「경오, 부산좌자천일리(약 3.93km), 제14통미토」라고 기록되고 있다.

얼굴은 홍안, 약간 자가 나 몸에는 상처가 없는 것이 방문한다.「경오」의 1년에 33세인 것부터, 「경오」는 겐로쿠 3년(1690년)이 되므로, 1657 년생인 것을 안다.신장은 약 124cm.거주지는 그의 증언으로부터도 부산의 좌자천일리(약 3.93km).

정리하면, 안용복은 1657년 태어나 출신은 경상도 동래현의 부산.홍안의 천민으로, 어업에도 종사하고 있었다.성격은 광포하고 포악한 면이 있어,국가 기관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발하는 인물이다.조선의 동래부사에서는 「표풍의 우민」이라고 평 되고 있었다.


1693년(겐로쿠 6년) 4월, 톳토리번오오타니가 21명이 탄 배가 막부의 허가를 얻고 울릉도에 가, 어로를 하고 있는 10명 정도의 한국인을 만난다.그 중에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안용복이 내려 심문받는다.안용복이 말하려면 , 자신은 42세에 조선보다 3소 42명이서 와있다고 한다.이것을 위구한 오오타니가의 사람들은 안용복과 박어둔의 2진`l를 잡아 일본에 연행한다.안용복은 조선에 돌려 보내져 조선에서 감옥에 2년 넣을 수 있다.그러나 3년 후, 다시 일본에 가 사기를 친다.

안용복은 귀국후 잡혀 서울의 비변사에 이송된다.여기서의 심문 후, 왜인과 소송 사건을 일으킨 죄에 의해 유배가 된다.이 때의 안용복의 진술 내용은 거짓말이나 거짓말만인 내용이 조선의 「숙소우지츠록」에 기록되고 있다.
안용복은 유배된 땅에서의 축 늘어차 죽었다.



이 단순한 사기꾼이 왜 영웅으로 바뀌었는지?
신호저의 「독도의 와 력」(잡지 「사상계」1960년)
이것에 그려진 안용복은 거짓말투성이이지만,
그 내용이 그대로, 그 후의 역사 교육에 사용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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