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のプロパガンダ工作
2017年に『波』(新潮社の月刊文芸雑誌)に掲載された読み物のなかで私(有馬)はこう書いている。
「1990年代の米国国務省の日本・韓国・北朝鮮の状況報告書を読んで気付いたことがある。北朝鮮のミサイル・核開発が問題となった1993年に『慰安婦問題』も注目を集め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だ。それ以降の報告書も、読みようによっては、ミサイル・核の開発が進むと、それから目をそらさせるように、『慰安婦問題』が持ち出されてくるように思える」
今にして思うと、これは重要な気付きだった。これが本当なら、いわゆる「慰安婦問題」は「歴史問題」などではなく、北朝鮮が日本と韓国を離間させるために行ったプロパガンダ工作だったことになる。
しかし、この当時、私が下した結論は次のようなものだった。
「国務省文書のなかでは、韓国と北朝鮮は同じ地域のカテゴリーに入るので、米国にとって重要な事項がそのなかで並行的に報告されることになる。だから、並行関係にあるとは確認できるが因果関係があるとまではいえない。つまり、北朝鮮のミサイル・核開発が先行し、そのあとに『慰安婦問題』が出てくるのか、両者が原因と結果の関係にあるのか、証明はできない」
この当時は確かにそうだった。では今も証明できないのか。その後分かったことから、現在なら、私とラムザイヤーはできると考える。以下で詳述しよう。
「慰安婦問題」は北朝鮮によるプロパガンダ工作だということは、次のことによってなされる。
(1)慰安婦問題は、以前は問題とされなかったのに、北朝鮮がミサイル・核開発を本格化させ、拉致問題が浮上するころになって突如問題とされるようになった(2)慰安婦問題は北朝鮮コネクションを持つ人々によって生み出された。
日本が発生源、韓国が追随
では(1)の証明を行なおう。このためのツールとしてラムザイヤーが使ったのは、韓国現代史研究者、朱益鍾と神戸大学大学院教授、木村幹の『過去の重荷:日韓歴史認識の問題』のデータだ。これは我々の論文の54-57頁に表にして引用している。
ハイライトだけ紹介しよう。木村によれば、1985-89年間で「慰安婦」と「強制連行」が朝日新聞の見出しに現れた回数はそれぞれ6回と14回だった。ところが、次の5年間では、これが600回と275回と爆発的に増える。その次の5年間も822回と222回だった。その後の5年間は126回と169回と鎮静化するが、以前よりは高い数値に留まっている。
韓国側はどうだったのか。やはり木村のデータによると、朝鮮日報の1985-89年間の記事で「慰安婦」と「強制連行」が見出しになったのは、それぞれ11回と0回だった。次の5年間では、これが150回と3回になる。次の5年間では、186回と459回になり朝日新聞に近い数字になる。
朱によれば、東亜日報と京郷新聞が「日本軍慰安婦」について報じた記事は、1985-89年間ではわずかに4回、次の5年間では989回と爆発的に増える。(朱のデータは1994年まで)
また、朱は、YouTube番組「解放後の40年間、日本軍慰安婦問題はなかった」で、新聞以外でも、例えば韓国の歴史教科書や映画においても、1988年までは慰安婦問題はなかったと結論している。
このことは2つのことを意味している。1つは、慰安婦そのものは以前からいたが、それが問題と認識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1980年代の終わりから90年代の前半だということ。そして、数の伸び方から見て、人為的な力が加わったと見る方が自然だということ。2つ目は、意外にも、日本が発生源であって、韓国はそれに追随したのだということだ。
北の核開発、拉致事件発覚
では、1980年代の終わりから90年代の前半にかけて北朝鮮はどのような動きをしていたのだろうか。
アメリカ側の複数の研究が明らかにしているが、北朝鮮が射程の長いミサイルの開発を始めるのは1980年代の半ばで、その飛距離が伸びて、国外を射程に収め始めるのは1980年代の終わりだ。
核開発についていえば、北朝鮮が黒鉛炉を作るのが1986年で、その後開発を進めていき、安全保障上の問題を国際原子力機関(IAEA)に指摘されて疑惑が一気に浮上するのが1993年だ。つまり、ほぼ同時期にミサイル開発と並行して核開発を本格化させていたことになる。
なぜだろうか。元早稲田大学教授の重村智計は、その理由を1989年のベルリンの壁の崩壊に始まるソ連の解体に求める。つまり、ソ連がもはや後ろ盾として信頼できず、北朝鮮自らがアメリカと軍事的に対峙しなければならなくなったということだ。
より決定的なのは、北朝鮮による拉致事件が発覚したことだ。大韓航空機爆破事件(1987年11月29日)解明の過程で実行犯、金賢妃(キム・ヒョンヒ)の日本語教師、李恩恵(リ・ウネ)が拉致された日本人であることがわかり、1988年3月26日の参議院予算委員会において拉致事件の存在を日本政府が初めて認めた。これ以降、日本政府は徐々に北朝鮮にこの問題の解決を求めるようになっていく。
つまり、朝日新聞に慰安婦問題の報道が爆発的に増えていく時期は、北朝鮮がミサイル・核開発を本格化し、拉致問題に対応せざるを得なくなっている時期と一致する。日本と韓国が結束し、北朝鮮に向き合われては一番困る時期だ。
慰安婦問題で日韓離間画策
これだけ偶然が重なれば、単なる偶然ではないことがわかるが、(2)でダメを押す必要がある。コリア国際研究所所長、朴斗鎮(パク・トゥジン)は、朝鮮総連機関紙「朝鮮日報」(2002年6月6日付)、清水澄子の「李愚貞(イ・ウジョン)さんを悼む」に、このような記述を見つけた。
「私と李愚貞さんとの直接の出会いは、韓国の軍政が民政に転換し始めた1987年8月、韓国から初めて彼女が原水禁世界大会に参加した時である。2人は、KCIA(大韓民国中央情報部)の目を警戒して長崎湾の船上で話しあった。彼女は『金日成主席のこと、北の同胞のことを聞かせて!』『日本で北の同胞・呂燕九(ヨ・ヨング)さんと会える場を作って。あなたならできる』と私の手を握った。私は民族の熱い思いにゆり動かされた。そして2人で知恵をしぼったのが“アジアの平和と女性の役割実行委員会”であった」
朴斗鎮は、これが北朝鮮コネクションによって慰安婦問題が作り出される発端だったとする。つまり、1987年の原水禁世界大会で、社会党の国会議員、清水澄子と韓国教会女性連合会会長、李愚貞がKCIAの監視を逃れて長崎湾の船上で、「韓国教会女性連合会」(挺対協結成後は「挺対協」)と「日本社会党婦人部」と北朝鮮の統一戦線部傘下の「祖国統一民主主義戦線」を連帯させ、日朝関係正常化を進めることを話し合った。そして、これを進めるために「アジアの平和と女性の役割実行委員会」を設立し、そこで日朝国交回復と賠償問題を議論することにした。
その後、日本で海部内閣発足後の1990年9月26日に朝鮮労働党と日本の自民党、社会党との「日朝3党共同宣言」が発表され、同年11月、韓国では「挺対協」が結成される。翌年の5月、日本社会党傘下の「日本婦人会議」が組織した「アジアの平和と女性の役割シンポジュウム」の第1回が東京で開催され、北朝鮮代表の呂燕九・祖国統一民主主義戦線議長と「挺対協」共同代表の尹貞玉(ユン・ジョンオク)氏と李効再(イ・ヒョジェ)氏がそこに参加し、南北共闘に合意した。
さらに1992年に平壌で開催された第3回「アジアの平和と女性の役割シンポジュウム」では「挺対協」メンバーが金日成主席と面会する。朴斗鎮は、北朝鮮の意向に沿って慰安婦問題を提起することによって日韓離間工作を推し進めていくことが決定したのはこの時だという。
問題を大きくした朝日新聞
しかしながら、朴が描いた「陰謀」はあったのだろうが、それだけでは今日のような慰安婦問題にはならない。そこにメディアが動員されなければ、日朝韓のごく一部の関係者が何か画策したところで、その効果は知れている。
事実、前述の木村は、挺対協が韓国で認知を得るのは、朝日新聞報道に追随して韓国メディアの報道量が増えてからだと指摘している。換言すれば、一般に日本側が考えているように、挺対協が慰安婦問題を大きくしたのではなく、朝日新聞が慰安婦問題を大きくし、挺対協を韓国において認知させ、韓国政治における一つの勢力に成長させたということだ。
では朝日新聞はなぜいち早く慰安婦報道キャンペーンを始めたのだろうか。それは松井やよりという、のちに編集委員まで登りつめる「熱心な」記者がいたからだ。松井の父の平山照次は、東京山手協会の牧師で、戦時中、軍から迫害を受けた。戦後は反原水爆禁止日本協議会の常任理事を務めたことがある。松井の朝日新聞での報道姿勢は、父から来たものかもしれない。
さらには、松井本人も「アジア女性たちの会」を設立して、社会運動家としても活動している。このような背景がなかったとしても新聞記者・社会運動家なので、原水禁運動にも女性運動にも関わっていて不思議ではないのだが、コネクションがあったのだからなおさら深く関わったのだろう。このコネクションは、清水や挺対協がそうだったように、原水禁と女性運動を通じて北朝鮮とリンクしていた。
慰安婦に関していえば、松井は1984年11月2日の夕刊紙上に「邦人巡査が強制連行 21歳故国引き離される」と題した当時タイ在住の朝鮮人慰安婦の記事を書いているが、女性問題の運動家として彼女に興味を持ったのもうなずける。また、これは2年前の9月に詐話師、吉田清治の講演内容をまとめた記事「朝鮮の女性 私も連行 暴行加え無理やり」のあとを受けたものでもあった。
旧大日本帝国に対する嫌悪感、キリスト教会、原水禁運動、女性運動、慰安婦に対する関心が、清水澄子、李愚貞、松井やよりを結び付けたのだ。
政治問題化で報道量増加
とはいえ、朝日新聞も大新聞なので、一記者の熱意だけでは報道量が増えたりはしない。報道量に増加が見られたのは、慰安婦のことを持ち出せば問題化しやすい政治状況があったからだ。海部内閣は1990年9月、金丸訪朝団として平壌を訪問した自民党と社会党は「日朝3党(朝鮮労働党が入るので)合意」をまとめ、国交正常化後の補償問題を取り上げていた。
その3党合意に基づいて1991年1月、平壌で日朝国交正常化予備会談が行なわれた。『帝国の慰安婦』の著者である朴裕河は、この会談で、北朝鮮が慰安婦問題に対し補償措置を講じるよう求めたことを指摘する。だから、松井が慰安婦問題の記事の企画を朝日新聞内で通しやすかったのだろう。
そして、同年8月11日、松井の部下である植村隆が「アジア太平洋戦争韓国人犠牲者補償請求事件」で原告の一人になっていた金学順(キム・ハクスン)に慰安婦だと名乗らせ「元朝鮮人従軍慰安婦 戦後半世紀重い口を開く」を書いた。これは、のちのちこの問題に大きく関わることになる人権派弁護士、福島瑞穂と戸塚悦郎が手掛けていた訴訟だ。しかも、植村の義母がこの原告団の「韓国太平洋戦争犠牲者遺族会」の幹部だった。このような利害関係がありながら、松井と植村は慰安婦問題キャンペーンを展開していったのだ。
松井たちは、同年11月ソウルで行われた「アジアの平和と女性の役割シンポジウム」11月10日から29日までほぼ連日、朝日新聞の紙面で報告している。これも、木村が示したような、慰安婦と強制連行を見出しとする記事の増加の要因となっている。
翌年の1992年、宮澤政権は、日韓の懸案となっている問題の解決を図り、訪韓によってその成果を示したいと動いた。海部政権で北朝鮮に対する補償の対象とされた慰安婦問題は、宮澤政権では韓国の元慰安婦に対する「償い」問題として政治化した。慰安婦問題は、今度は日韓の間の問題となり、この関連の報道量はさらに増加していく。
日韓にとって大きな脅威
結局、日本政府は、この問題に関して元慰安婦に苦痛を与えたことを謝罪し、それを河野談話として発表し、アジア女性基金を創設し、それを通して朝鮮人元慰安婦に「お見舞金」を支払うことで決着を図った。このプロセスには福島(当時はまだ弁護士)が関わっていた。
ところが、もともと日韓離間を目的として作られた挺対協は決着するのを妨げた。元慰安婦が謝罪を受け入れ「お見舞金」を受け取ろうとすると、心からの謝罪ではない、国費から出すのではない「お見舞金」では謝罪にならないとして、邪魔した。解決して、日韓が和解し北朝鮮に向かってきては困るのだから当然だ。それに日朝国交正常化がなされない限り、北朝鮮が慰安婦問題で賠償金がとれるわけではないのだから不公平でもある。
このあと、安倍政権では、煮え湯を飲んで2015年「慰安婦問題日韓合意」をまとめたのに、挺対協(現正義連)は和解案について相談を受けておらず、したがって不同意だと主張した。和解案について聞かされなかったというのはのちに嘘だと分かったが、朴槿恵大統領の後を受けた文在寅大統領は、元慰安婦たちが同意していない以上、合意は無効だとして反故にしてしまった。その後、正義連が寄付金を着服したり、流用したり、元慰安婦を虐待したりしたことが韓国メディアによって明らかになったが、現在でも慰安婦問題は解決したとはいえない状態にある。この間、北朝鮮はミサイル・核開発を着実にすすめ、現在、日韓にとって大きな脅威となっている。
このように、慰安婦問題は、基本的に北朝鮮の日韓離間プロパガンダ工作である。それは日本軍による戦争犯罪でもなければ、女性に対する人権侵害でもなく、歴史問題ですらない。この北朝鮮の策謀から引き出された河野談話は、今日も日本人の名誉を棄損し、海外にいる邦人に苦痛を与えている。したがって、可及的速やかに破棄しなければならない。(敬称略)
筆者:有馬哲夫教授(早稲田大学教授)
북의 선전 공작
2017년에 「물결」(신쵸오샤의 월간 문예 잡지)에 게재된 읽을 거리 속에서 나(아리마) 입자 쓰고 있다.
「1990년대의 미국 국무성의 일본·한국·북한의 상황 보고서를 읽어 깨달았던 것이 있다.북한의 미사일·핵개발이 문제가 된 1993년에 「위안부 문제」도 주목을 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그 이후의 보고서도, 읽기나름에 따라서는, 미사일·핵의 개발이 진행되면, 그리고 눈을 떼게 하도록(듯이), 「위안부 문제」가 꺼내져 오는 것처럼 생각된다」
곧 하고 생각하면, 이것은 중요한 눈치였다.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른바 「위안부 문제」는 「역사 문제」등에서는 없고, 북한이 일본과 한국을 이간시키기 위해서 간 선전 공작이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당시 ,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국무성 문서 속에서는, 한국과 북한은 같은 지역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므로, 미국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 그 안에서 병행적으로 보고되게 된다.그러니까, 병행 관계에 있다고는 확인할 수 있지만 인과관계가 있다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다.즉, 북한의 미사일·핵개발이 선행해, 그 후에 「위안부 문제」가 나오는지, 양자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는지, 증명은 할 수 없다」
이 당시는 확실히 그랬다.그럼 지금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인가.그 후 안 것으로부터, 현재라면, 나와 램더 이어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하로 상술하자.
「위안부 문제」는 북한에 의한 선전 공작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 일에 의해서 된다.
(1) 위안부 문제는, 이전에는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는데 , 북한이 미사일·핵개발을 본격화시켜, 납치 문제가 부상하는 무렵이 되어 갑자기 문제로 여겨지게 된(2) 위안부 문제는 북한 connection를 가지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일본이 발생원, 한국이 추종
그럼(1)의 증명을 행하자.이 때문에의 툴로서 램더 이어가 사용한 것은, 한국 현대사 연구자, 주익종과 코베대학학 대학원 교수, 키무라간의 「과거의 무거운 짐:일한 역사 인식의 문제」의 데이터다.이것은 우리의 논문의 5457페이지에 겉(표)로 해 인용하고 있다.
하이라이트만 소개하자.키무라에 의하면, 198589년간에 「위안부」와「강제 연행」이 아사히 신문의 표제에 나타난 회수는 각각 6회와 14회다?`치.그런데 , 다음의 5년간으로는, 이것이 600회와 275회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그 다음의 5년간도 822회와 222회였다.그 후의 5년간은 126회와 169회로 진정화하지만, 이전보다는 높은 수치에 머물고 있다.
한국측은 어땠어요 의 것인지.역시 키무라의 데이터에 의하면, 조선일보의 198589년간의 기사로 「위안부」와「강제 연행」이 표제가 된 것은, 각각 11회와 0회였다.다음의 5년간으로는, 이것이 150회와 3회가 된다.다음의 5년간으로는, 186회와 459회가 되어 아사히 신문에 가까운 숫자가 된다.
주홍에 의하면, 동아일보와 옛 쿄토의벼슬아치 신문이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알린 기사는, 198589년간으로는 조금 4회, 다음의 5년간으로는 989회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주홍의 데이터는 1994년까지)
또, 주홍은, YouTube 프로그램 「해방 후의 40년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없었다」로, 신문 이외에도, 예를 들면 한국의 역사 교과서나 영화에 대해도, 1988년까지는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고 결론 하고 있다.
이것은 2개를 의미하고 있다.하나는, 위안부 그 자체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것이
북쪽의 핵개발, 납치사건 발각
그럼, 1980년대의 마지막으로부터 90년대의 전반에 걸쳐 북한은 어떠한 움직임을 하고 있 것일까.
미국측의 복수의 연구가 분명히 하고 있지만, 북한이 사정의 긴 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하는 것은 1980년대의 반으로, 그 비거리가 성장하고, 국외를 사정에 두기 시작하는 것은 1980년대의 마지막이다.
핵카이하츠에 도착해 집, 북한이 흑연노를 만드는 것이 1986년으로, 그 후 개발을 진행시켜 나가, 안전보장상의 문제를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지적되어 의혹이 단번에 부상하는 것이 1993년이다.즉, 거의 동시기에 미사일 개발과 병행해 핵개발을 본격화시키고 있던 것이 된다.
왜일까.전 와세다 대학 교수 시게무라 사토시계는, 그 이유를
보다 결정적인 것은,북한에 의한 납치사건이 발각된일이다.대한항공기 폭파 사건(1987년 11월 29일) 해명의 과정에서 실행범, 김 켄 왕비(김·홀히)의 일본어 교사, 이은혜(리·우네)가 납치된 일본인인 것을 알 수 있어, 1988년 3월 26일의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 대해 납치사건의 존재를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인정했다.이 이후, 일본 정부는 서서히 북한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도록(듯이) 되어 간다.
즉, 아사히 신문에 위안부 문제의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가는 시기는, 북한이 미사일·핵개발을 본격화해, 납치 문제에 대응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있는 시기와 일치한다.
위안부 문제로 일한 이간 획책
이만큼 우연히가 겹치면, 단순한 우연히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지만, (2)그리고 안 됨을 누를 필요가 있다.코리아 국제 연구소 소장, 박두진(박·투 진)은, 조총련 기관지 「조선일보」(2002년 6월 6 일자), 시미즈 스미코의 「리우정(이·우젼)씨를 애도한다」에, 이러한 기술을 찾아냈다.
「 나와 리우정씨와의 직접적인 만남은, 한국의 군정이 민정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1987년 8월, 한국으로부터 처음으로 그녀가 원수금세계 대회에 참가했을 때이다.2명은, KCIA(대한민국 중앙 정보부)의 눈을 경계해 나가사키 만의 선상에서 서로 이야기했다.그녀는 「김일성 주석, 북쪽의 동포를 들려주어!」 「일본에서 북쪽의 동포·여연구(요·영그)씨와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당신이라면 가능한다」라고 나의 손을 잡았다.나는 민족의 뜨거운 마음작동되었다.그리고 2명이서 지혜를 짠 것이“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실행 위원회”에서 만났다」
박두진은, 이것이
그 후, 일본에서 가이후 내각 발족 후의 1990년 9월 26일에 조선노동당과 일본의 자민당, 사회당과의 「일·북 3당공동선언」이 발표되어 동년 11월, 한국에서는 「정 대 협」이 결성된다.다음 해의 5월, 일본 사회당 산하의 「일본 부인회의」가 조직 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신포쥬움」의 제1회가 도쿄에서 개최되어 북한 대표 여연구·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 의장과 「정 대 협」공동 대표의 윤정옥(윤·존 오크) 씨와 리효재(이·효제) 씨가 거기에 참가해, 남북 공투에 합의했다.
게다가 1992년에 평양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신포쥬움」에서는 「정 대 협」멤버가 김일성 주석과 면회한다.박두진은, 북한의 의향에 따라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의해서 일한 이간 공작을 추진해 가는 것이 결정된 것은 이 때라고 한다.
문제를 크게 한 아사히 신문
그렇지만, 박이 그린 「음모」는 있었을 것이다가, 그것만으로는 오늘과 같은 위안부 문제는 되지 않는다.거기에 미디어가 동원되지 않으면, 일·북한국의 극히 일부의 관계자가 무엇인가 획책 했다 곳?`·나, 그 효과는 알려져 있다.
사실, 전술의 키무라는, 정 대 협이 한국에서 인지를 얻는 것은, 아사히 신문 보도에 추종해 한국 미디어의 보도량이 증가하고 나서라고 지적하고 있다.환언하면, 일반적으로 일본측이 생각하고 있도록(듯이), 정 대 협이 위안부 문제를 크게 한 것은 아니고, 아사히 신문이 위안부 문제를 크게 해, 정 대 협을 한국에 있어 인지시켜, 한국 정치에 있어서의 하나의 세력에 성장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아사히 신문은 왜 재빨리 위안부 보도 캠페인을 시작한 것일까.그것은
또, 마츠이 본인도 「아시아 여성들의 회」를 설립하고, 사회운동가라고 해도 활동하고 있다.이러한 배경이 없었다고 해도 신문기자·사회운동가이므로, 원수금운동에도 여성 운동에도 관련되고 있어 신기하다는 아니지만, connection가 있었으니까 더욱 더 깊게 관련되었을 것이다.
위안부에 관해서 말하면, 마츠이는 1984년 11월 2일의 석간지상에 「해외주재 일본인 순경이 강제 연행 21세 고국 갈라 놓아진다」라고 제목을 붙인 당시 타이 거주의 한국인 위안부의 기사를 쓰고 있지만, 여성 문제의 운동가로서 그녀에게 흥미를 가졌던 것도 납득이 간다.또, 이것은 2년전의 9월에 사화사, 요시다 세이지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기사 「조선의 여성 나도 연행 폭행 더해 억지로」의 뒤를 받은 것이기도 했다.
구대일본 제국에 대한 혐오감,크리스트교회, 원수금운동, 여성 운동,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정치 문제화로 보도량 증가
그렇다고는 해도, 아사히 신문도 오신문이므로, 한기자의 열의만으로는 보도량이 증가하거나는 하지 않는다.보도량에 증가를 볼 수 있던 것은, 위안부를 꺼내면 문제화하기 쉬운 정치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가이후 내각은 1990년 9월, 카나마루 북한 방문단으로서 평양을 방문한 자민당과 사회당은 「일·북 3당(조선노동당이 들어가므로) 합의」를 정리해 국교 정상화 후의 보상 문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 3당합의에 근거해 1991년 1월, 평양에서 일·북 국교 정상화 예비 회담이 행해졌다.「제국의 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는, 이 회담에서, 북한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상 조치를 강구하도록 요구한 것을 지적한다.그러니까, 마츠이가 위안부 문제의 기사의 기획을 아사히 신문내에서 통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동년 8월 11일,
마츠이들은, 동년 11월 서울에서 행해진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11월 10일부터 29일까지 거의 연일, 아사히 신문의 지면에서 보고하고 있다.이것도, 키무라가 나타내 보인 것 같은, 위안부와 강제 연행을 표제로 하는 기사의 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다음 해의 1992년, 미야자와 정권은, 일한의 현안이 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도모해, 방한에 의해서 그 성과를 나타내고 싶으면 움직였다.가이후 정권으로 북한에 대한 보상의 대상으로 여겨진 위안부 문제는, 미야자와 정권에서는 한국의 원위안부에 대한 「보상」문제로서 정치화했다.위안부 문제는, 이번은 일한의 사이의 문제가 되어/`A 이 관련의 보도량은 한층 더 증가해 나간다.
일한에 있어서 큰 위협
결국,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원위안부에게 고통을 준 것을 사죄해, 그것을 코노 담화로서 발표해, 아시아 여성 기금을 창설해, 그것을 통해 한국인원위안부에게 「위문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결착을 도모했다.이 프로세스에는 후쿠시마(당시는 아직 변호사)가 관련되고 있었다.
그런데 ,
이후에, 아베 정권에서는, 열탕을 마셔 2015년 「위안부 문제 일한 합의」를 정리했는데, 정 대 협(현정의련)은 화해안에 대하고 상담을 받지 않고, 따라서 비동의라고 주장했다.화해안에 대해 듣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후에 거짓말이라고 알았지만, 박근 메구미 대통령의 뒤를 받은 문 재토라 대통령은, 원위안부들이 동의 하고 있지 않는 이상, 합의는 무효라고 하고 휴지로 해 버렸다.그 후,
이와 같이,위안부 문제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일한 이간 선전 공작이다.그것은 일본군에 의한 전쟁 범죄도 아니면,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도 아니고, 역사 문제 조차 아니다.이 북한의 책모로부터 나타난 코노 담화는, 오늘도 일본인의 명예를 훼손해, 해외에 있는 해외주재 일본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따라서, 가급적 신속하게 파기해야 한다.(경칭생략)
필자:아리마 테츠오 교수(와세다 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