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人が誇りに思う朝鮮通信使
果たして日本人は歓迎していたのでしょうか?
これは京都大学所蔵の朝鮮通信使の日常の一こまを描いたものだそうです。
エンコリはもうな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が歴史に詳しい人たちがこういうことを書き残しています。
https://detail.chiebukuro.yahoo.co.jp/qa/question_detail/q1317108083
『江戸時代を「探検」する』 山本博文 新潮社 には、次の記述があります。
「通信使の随員の中には、そのような扱いに慣れ(日本のおもてなしのことだと思う)、段々と尊大な行動をする者も現れた。
出船の時に、前夜出された夜具を盗んで船に積み込んだり、食事に難癖をつけて、魚なら大きいものを、野菜ならば季節外れのものを要求したりというような些細なことから、予定外の行動を希望し、拒絶した随行の対馬藩の者に唾を吐きかけたりするようなこともあったという」
現在、多くの日本人、韓国人は、何人かの朝鮮通信使と日本の儒学者との間に親交があったと思っています。それは、確かに一つの歴史的事実です。
しかし、同時に、朝鮮通信使の傲慢で尊大な態度と無礼で無法な行為の数々を苦々しく思い、憤りを感じていた日本人が多かったことも、また歴史的事実なのです。
朝鮮通信使は、まるで頭の悪い不良中学生と同じですから、日本の庶民が、朝鮮通信使は猫が大好物であると、彼らを笑い者にするような噂をしても、当然でしょう。
布団のように嵩張るものさえ盗むのですから、持ち運びやすいものなどは、すかさず盗んだことでしょう。まさしく朝鮮通信使は国家使節の皮を被った窃盗団だったのです。
さぁ、みなさん、今日の「その時」がやってまいります。 その時、1764年4月6日。 この日の昼、江戸からの帰途、大阪は長浜の荷揚げ場で、朝鮮の下級官人が鏡を紛失しました。
通信使の都訓導(中級官人)、崔天宗という者が、これを咎め、 「日本人は、盗みの仕方が上手だ」 というような悪口を言いました。
これに対応した鈴木伝蔵(Suzuki Denzou)という対馬藩の通詞(通訳)は、紛失しただけで何の証拠も無く日本人が盗ったと言われたのは「日本の恥辱」になると感じ、また、日頃から通訳として朝鮮通信使のそばにいて、彼らの姑息な窃盗にうんざりしていたので、
「日本人のことをそのように言うが、韓半島人も、食事の際に出た飾りの品々(食器など)を持って帰っているではないか。これをどう思うのか」 と言い返しました。
そうです。朝鮮通信使は、食器も盗んでいたのです。 当然、接待役の武士は、このような朝鮮通信使の盗癖を知っていたでしょう。武士たちは、国を代表する使節が宴会で出された料理の皿を盗むのを見て、驚き呆れてしまったことでしょう。
こんな幼稚な人々に下手に関わるよりも、さっさと他領へ送り出せばそれでよいと考えたとしても無理ありません。あるいは、朝鮮は清の属国であることから、韓半島人を低く見て、可哀想だからと大目に見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このような態度は結果として、朝鮮通信使を益々増長させ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物を盗むことは犯罪であると教えてあげたほうが、朝鮮通信使のためにも良かったと思います。
鈴木伝蔵(Suzuki Denzou)に痛いところを突かれた崔天宗は、身に覚えがあったからでしょう頭に血が上り、人々が見ている前で、鈴木伝蔵(Suzuki Denzou)を杖で何度も打ちました。 鈴木伝蔵(Suzuki Denzou)は、下級の武士とはいえ武士です。このままでは、武士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ません。思いつめた鈴木伝蔵(Suzuki Denzou)は、仕方なく崔を殺すことを決心します。 その夜、鈴木伝蔵(Suzuki Denzou)は、崔天宗の喉を槍で突き刺し殺害しました。
気の毒に鈴木伝蔵はその後自害をしています。
朝鮮通信使と付き合うのは苦行であり不運で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
조선 통신사
한국인이 자랑으로 생각하는 조선 통신사
과연 일본인은 환영하고 있었는지요?
이것은 쿄토 대학 소장의 조선 통신사의 일상의 한 토막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엔코리는 이제(벌써) 없어져버렸습니다만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못 쓰고 남기고 있습니다.
https://detail.chiebukuro.yahoo.co.jp/qa/question_detail/q1317108083
「에도시대를 「탐험」한다」야마모토 히로후미 신쵸오샤에는, 다음의 기술이 있어요.
「통신사의 수행원안에는, 그러한 취급에 익숙해(일본의 대접라고 생각한다), 점점거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출범때에, 전야 나온 침구를 훔치고 배에 싣거나 식사에 트집을 잡고, 물고기라면 큰 것을, 야채라면 철에 맞지 않음의 것을 요구하거나라고 하는 사소한 일로부터, 예정외의 행동을 희망해, 거절한 수행의 쓰시마번의 사람에게 침을 토해 가거나 하는것 같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많은 일본인, 한국인은, 몇명의 조선 통신사와 일본의 유학자와의 사이에 친교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 통신사의 오만하고 거만한 태도와 무례하고 무법인 행위의 여러 가지를 불쾌하다고 생각해, 분노를 느끼고 있던 일본인이 많았던 일도, 또 역사적 사실입니다.
조선 통신사는, 마치 머리의 나쁜 불량 중학생과 같기 때문에, 일본의 서민이, 조선 통신사는 고양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그들을 웃음거리로 하는 소문을 해도, 당연하겠지요.
이불과 같이 커지는 것 조차 훔치니까, 운반하기 쉬운 것 등은, 재빠르게 훔친 것이지요.바야흐로 조선 통신사는 국가 사절의 가죽을 감싼 절도단이었습니다.
, 여러분 , 오늘의 「그 때」가 해 가겠습니다. 그 때, 1764년 4월 6일. 이 날의 낮, 에도로부터의 귀도, 오사카는 나가하마의 짐싣기장에서, 조선의 하급 관리가 거울을 분실했습니다.
통신사의 수도 훈도(중급 관리), 최천종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것을 비난해 「일본인은, 도둑질의 방법이 능숙하다」 그렇다고 하는 욕을 했습니다.
이것에 대응한 스즈키전장(Suzuki Denzou)이라고 하는 쓰시마번의 통사(통역)는, 분실한 것만으로 어떤 증거도 없게 일본인이 훔쳤다고 들은 것은 「일본의 치욕」이 된다고 느껴 또, 평소부터 통역으로서 조선 통신사의 곁에 있고, 그들의 고식적인 절도에 진절머리 나고 있었으므로,
「일본인을 그처럼 말하지만, 한반도인도, 식사 시에 나온 장식의 물건들(식기등)을 가지고 돌아가지 아니겠는가.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이렇게 말해 돌려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조선 통신사는, 식기도 훔치고 있었습니다. 당연, 접대역의 무사는, 이러한 조선 통신사의 도벽을 알고 있었지요.무사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이 연회에서 나온 요리의 접시를 훔치는 것을 보고, 놀라 기가 막혀 버린 것이지요.
이런 유치한 사람들에게 서투르게 관련되는 것보다도, 빨리 타령에 배웅하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무리 없습니다.있다 있어는, 조선은 청의 속국인 것부터, 한반도인을 낮게 보고, 불쌍하기 때문에와 너그럽게 봐주었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조선 통신사를 더욱 더 증대 시키게 되었습니다.물건을 훔치는 것은 범죄이라고 가르쳐 주는 편이, 조선 통신사를 위해서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스즈키전장(Suzuki Denzou)에 아픈 곳을 찔린 최천종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지요 머리에 피가 올라, 사람들이 보고 있기 전으로, 스즈키전장(Suzuki Denzou)을 지팡이로 몇번이나 쳤습니다. 스즈키전장(Suzuki Denzou)은, 하급의 무사라고 해도 무사입니다.이대로는, 무사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깊은 생각에 빠진 스즈키전장(Suzuki Denzou)은, 어쩔 수 없이 최를 죽이는 것을 결심합니다. 그 밤, 스즈키전장(Suzuki Denzou)은, 최천종의 목을 창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안되게스즈키전장은 그 후 자해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와 교제하는 것은 고행이고 불운해서 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