独立門
独立門とは、中国の奴隷だった朝鮮人を救うため
日本が中国(清)と戦って勝利して
中国に朝鮮を「もう奴隷にしません」と約束させ
自由になった記念に建てられた門です。
1890年代の朝鮮では、日本の経済進出がすすむ中(輸出の90%以上、輸入の50%を占めた)、反乱を起こした農民を平定するため、朝鮮政府は宗主国だった清へ軍隊の派遣をお願いした。日本は在留邦人や朝鮮人の農民を清軍から保護する為に出兵を決めた。このことが最終的に日清戦争となる。日清戦争により日本が清に勝利し、1895年4月に調印した下関条約にて清の冊封体制からの李氏朝鮮の属国から独立を認めさせた。これにより李氏朝鮮は清の奴隷から解放され、自主独立国家として歩みだすことになり、その記念として清への奴隷の象徴の一つであった迎恩門を壊し、そのすぐ隣に独立門が建設された。また、迎恩門に隣接して建てられた慕華館は独立館と改名された。建設には、朝鮮の開化派の独立協会が中心となり、募金を募り建てている。
『独立新聞』1896年7月4日「論説」
独立新聞の「論説」内容
朝鮮は何年も清国の属国であったが、神様の恩恵で独立され、朝鮮大君主陛下が今は世界の首脳と同等な立場となり、朝鮮人民が世界にまたがる自由な人になったがゆえに、このようなめでたいことを無視するのは道理ではない。朝鮮が独立したことを世界に知らせ、また朝鮮の後生に、この時から朝鮮が永遠に独立したことを伝えるためにも表迹(表象)が必要であり、また朝鮮人民が養生するには新鮮な空気を吸い、景色が良く静かな場所で運動をすべきである。慕華館に新しく独立門を建て、その周辺を公園にして千秋万歳自主独立した公園であると伝える志である。
このように、韓国においては独立門建設の歴史背景が正しく教えられておらず、独立門は「日本からの独立」を記念する門であると誤解されているという。正しくは「清の冊封体制からの独立」を記念したものである。フランスパリのエトワール凱旋門を真似して作られている。
韓国は、事大主義の思想に貫かれた国家であり、常に主人に仕える奴隷国家として存続してきた。新羅時代には唐を宗主国として朝貢を捧げ、考慮時代は宋・元に、朝鮮時代にも明・清を宗主国にして代々、奴隷としてずっと朝貢を続けていた。李氏朝鮮時代には、迎恩門を作り近くには慕華館を作って使者を迎えていた。「慕華」は優雅な大国の使者を迎え中国様を崇拝するという意味であり、地面にひざまずいて頭を9回地面に擦りつけて使節に敬意を表し、宴会を催し、芸を披露して精一杯中国様に喜んで貰うため土下座を繰り返していただけの奴隷だった。朝鮮の国王の最大の仕事は中国の使者に頭を血だらけになるまで9回土下座して擦りつけながら尻尾を振って胡麻することだった。韓国以外の各国でここまで奴隷の扱いを受けた国は記録にない。
奴隷だった証拠 「三田渡碑」
恥ずかしくて土に埋められ隠滅を図ったが
洪水で地表に出て来て仕方なく文化財として保護されてしまった碑。
韓国人が中国の奴隷であったことが
モンゴル語、満州語、漢語で書いてある。
石碑に書かれている内容
我が朝鮮は清国皇帝様の功徳を永遠に忘れず、また清国様に逆らった愚かな朝鮮王の罪を反省するために、この石碑を建て土下座を永遠に続けることにする。
一番古い太極旗の画像にも清の属国と書いてある
反中の象徴・独立門の前で反日万歳を叫んだ文大統領
数百年にわたる中国の束縛から独立した記念として建てられた独立門で、反日イベントを繰り広げる大統領
三・一節に知人とカカオトークのチャットルームで話をしていて、ソウル市西大門区の独立門は抗日独立の意志のために建てたものだと思っている人が意外に多いということを知った。独立門は、中国の圧政から抜け出すことになったのを記念するため、徐載弼(ソ・ジェピル)先生が主軸となって建てたものだ。多くの人が抗中独立門を抗日と誤解していることは、韓国社会の現代史認識の屈曲地点を示している。
韓国は歴史的に中国と日本から多くの被害に遭ったが、その被害の程度でいえば、中国がもたらした屈辱と苦難の方がずっと大きい。さげすみを受けた歳月は500年を優に超える。習近平がトランプに「韓半島は中国の一部だった」と語って韓国人を怒らせたが、実際のところ、中国人は500年以上もそう考えてきた。朝鮮王朝は武力を事実上放棄し、中国の下へ自ら入り込んでいった国だった。中国の皇帝が承認してようやく王になることができた。毎年ささげるべきありとあらゆる献上品のせいで、民は疲れ果てた。その上、中国の使臣の序列は朝鮮国王よりも高かった。ひとたび使臣が現れれば、朝鮮の山川草木がおののいた。中国の朝廷に賄賂を贈って使臣に任命された者たちは、朝鮮にやって来て元手を数倍に増やした。国が毎回すりつぶされそうな有様だった。
中国の使臣が来たとき、朝鮮国王が出ていって迎接していた場所が「迎恩門」だ。中国皇帝の恩恵を迎える、というわけだ。1894年の日清戦争で中国が敗れると、朝鮮王朝は遂に中国からの独立を宣言した。その後、迎恩門を取り壊し、中国の束縛から抜け出した歴史的瞬間を記念するため1897年にちょうど同じ場所に建てたのが独立門だ。
朝鮮日報 (韓国語) 2021年3月4日
독립문
독립문이란, 중국의 노예였던 한국인을 구하기 위해
일본이 중국(청)과 싸워 승리해
중국에 조선을 「더이상 노예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약속시켜
자유롭게 된 기념에 지어진 문입니다.
1890년대의 조선에서는, 일본의 경제 진출이 스스무중(수출의90%이상, 수입의50%를 차지한), 반란을 일으킨 농민을 평정 하기 위한(해), 조선 정부는 종주국이었던 청에 군대의 파견을 부탁했다.일본은 재류 방인이나 한국인의 농민을 청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출병을 결정했다.이것이 최종적으로 청일 전쟁이 된다.청일 전쟁에 의해 일본이 청에 승리해, 1895년 4월에 조인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의 책봉 체제로부터의 이씨 조선의 속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하게 했다.이것에 의해 이씨 조선은 청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자주 독립국가로서 걸음 내게 되어, 그 기념으로서 청에의 노예의 상징의 하나인 영은문을 부수어, 그 바로 근처에 독립문이 건설되었다.또, 영은문에 인접해 지어진 모화관은 독립관과 개명되었다.건설에는, 조선의 개화파의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모금을 모집해 세우고 있다.
「독립신문」1896년 7월 4일 「논설」
독립신문의 「논설」내용
조선은 몇 년이나 청나라의 속국이었지만, 신의 혜택으로 독립되어 조선 대군주폐하가 지금은 세계의 수뇌와 동등한 입장이 되어, 한국인민이 세계에 걸치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지만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사스러운 것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조선이 독립한 것을 세계에 알려 또 조선의 후생에, 이 때부터 조선이 영원히 독립한 것을 전하기 위해서도 표 적(표상)이 필요하고, 또 한국인민이 요양하려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셔, 경치가 잘 조용한 장소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모화관에 새롭게 독립문을 지어 그 주변을 공원으로 해 천추 만세 자주 독립한 공원이다고 전하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한국에 있고는 독립문 건설의 역사 배경이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지 않고,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문이라고 오해 받고 있다고 한다.정확하게는 「청의 책봉 체제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 것이다.프랑스 파리의 에트워르 개선문을 흉내내 만들어져 있다.
한국은, 사대주의의 사상에 관철해진 국가이며, 항상 주인을 시중드는 노예 국가로서 존속해 왔다.신라시대에는 당을 종주국으로서 조공을 바쳐 고려 시대는 송·바탕으로, 조선시대에도 아키라·키요시를 종주국으로 해 대대, 노예로서 쭉 조공을 계속하고 있었다.이씨 조선 시대에는, 영은문을 만들어 가까운 곳에는 모화관을 만들고 사자를 맞이하고 있었다.「모화」는 우아한 대국의 사자를 마중 중국 님을 숭배한다고 하는 의미이며, 지면에 무릎 꿇어 머리를 9회 지면에 문질러 사절에 경의를 나타내, 연회를 개최해, 재주를 피로해 힘껏 중국 님에 기꺼이 받기 위해 땅에 엎드려 조아림을 반복해 받을 수 있어의 노예였다.조선의 국왕의 최대의 일은 중국의 사자에 머리를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9회 땅에 엎드려 조아림해 문지르면서 꼬리를 털어 참깨 하는 것이었다.한국 이외의 각국에서 여기까지 노예의 취급을 받은 나라는 기록에 없다.
노예였던 증거 「미타 도비」
부끄러워서 흙에 묻혀 인멸을 도모했지만
홍수로 지표에 나와 어쩔 수 없이 문화재로서 보호되어 버린 비.
한국인이 중국의 노예였던 것이
몽고어, 만주어, 한문어로 써 있다.
비석에 쓰여져 있는 내용
우리 조선은 키요쿠니 황제 님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나라 님에 거역한 어리석은 조선왕의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비석을 건물 땅에 엎드려 조아림을 영원히 계속하기로 한다.
제일 낡은 태극기의 화상에도 청의 속국이라고 써 있다
반중의 상징·독립문의 앞에서 반일 만세를 외친 문대통령
수백년에 걸치는 중국의 속박으로부터 독립한 기념으로서 지어진 독립문에서, 반일 이벤트를 펼치는 대통령
3·일절에 지인과 카카오 토크의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서울시 서대문구의 독립문은 항일 독립의 의지를 위해서 세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독립문은, 중국의 압정으로부터 빠져 나가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때문에), 서재필(소·제이 필)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이다.많은 사람이 항중 독립문을 항일과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현대사 인식의 굴곡 지점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했지만, 그 피해의 정도로 말하면, 중국이 가져온 굴욕과 고난이 훨씬 크다.내림 먹을 받은 세월은 500년을 우아하게 넘는다.습긴뻬이가 트럼프에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하고 한국인을 화나게 했지만, 실제의 곳, 중국인은 500년 이상이나 그렇게 생각해 왔다.조선 왕조는 무력을 사실상 방폐해, 중국아래에 스스로 비집고 들어가고 간 나라였다.중국의 황제가 승인해 간신히 왕이 될 수 있었다.매년 바쳐야 할 온갖 헌상품의 탓으로, 백성은 완전히 지쳐 버렸다.게다가, 중국의 사신의 서열은 조선 국왕보다 높았다.한번 사신이 나타나면, 조선의 산천 초목이 부들부들 떨었다.중국의 조정에 뇌물을 주어 사신으로 임명되어 자들은, 조선에 와 자본을 수배로 늘렸다.나라가 매회 갈아서 으깨어질 것 같은 모양이었다.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조선 국왕이 나와 있어라는 영접 하고 있던 장소가 「영은문」이다.중국 황제의 혜택을 맞이한다, 라고 하는 것이다.1894년의 청일 전쟁으로 중국이 지면, 조선 왕조는 결국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그 후, 영은문을 무너뜨려, 중국의 속박으로부터 빠져 나간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때문에) 1897년에 정확히 같은 장소에 세운 것이 독립문이다.
조선일보 (한국어) 2021년 3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