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世紀末‾20世紀初め, 日本は海洋進出として富国強兵(富国強兵)国家を成した. この過程で海軍首脳部は 『帝国海軍社では(帝国海軍史論)』を発行して海洋防御が衰えれば海洋進出航路が断絶されると言いながら講釈君では(強海軍論)を開いた.
朝鮮の李舜臣をほめたてて来た海軍中将佐藤デスタでは “私は朝鮮に李舜臣がいることを高く評価する. しかし私たちも海軍名将トゴヘイ八で(以下トゴ) 提督が歴史を新たに飾ることができたことを回想すれば愉快だと言った. 彼は遂にトゴを日本君臣(軍神)で作った. そして ‘李舜臣は東洋のネルソンだ’という言葉で李舜臣をトゴに代置して ‘トゴが東洋のネルソンだ’ という論理を作り出した. 要するにデスタでは西洋の近代海軍力に圧倒されている日本をトゴを支えて劣等感を乗り越えようと思ったのだ. しかし日本の居眠り(卒記)とゾルピョング(卒評)たちの高い李舜臣評価は変わりがなかった. 日本での居眠り(卒記: 後日の審査記録), ゾルピョング(卒評: 後日の評価)は当事者死後(死後) 評価なので客観的なので史実(史実)だ. 李舜臣に対する 1659年刊行された 『朝鮮征伐期(朝鮮 征伐記)』のゾルピョングを例示する. 「李舜臣将軍は戦闘を督励して流れ弾に左側肩に迎え血がヒジまで流れた. しかし将軍は何も言わないで戦闘がすべて終わった後こそ初めて刀で肉を裂いて弾丸を抜きなさいと言った. 弾丸が何寸もほって入って行ってそれを抜き出す姿を見た人々は皆顔色が変わった. しかし李舜臣将軍は参謀たちと談笑を交わして平気だった…」 李舜臣将軍が手術過程の苦痛にもとのままさをほめたたえる文とともに載せられた挿し絵(写真参照)がその事実を言っている. 日本風で描かれた挿し絵だがくちばしくちばしした目つきで船首に立った忠武公を威風堂々に描写された. 挿し絵の中の李舜臣将軍は左側肩で血がほとばしているにも右手をもっては長剣を固く取ったまま顔つきをするがしかめなかった.
1705年頃の僧侶Seikiが発行した 『朝鮮軍旗大田(朝鮮軍記大全)』と作家ババシンが発行した 『朝鮮太平期(朝鮮太平記)』は李舜臣将軍を初めから英雄と称した. 1800年当代人気作家あき瓷土リトが使った 『エホン朝鮮軍旗(絵本朝鮮軍記)』と 19世紀ベストセラーだった 『エホンダイコギ(絵本太閤記)』は李舜臣が導いた朝鮮水軍(海軍)の勇猛さを細細しく描いているのにエホンダイコギ挿し絵の中には日本水軍が大きく敗れる場面まで描かれている. こんな居眠り(本)たちは皆当時庶民が楽しんで読む軽い歴史評伝(歴史評伝)だから歪曲がある法道したのにすべてを事実によって正確に記録している. 例えば “壬辰の乱当時日本朝野は李舜臣言葉だけ出てきてもぶるぶると震えた” などだ. それほど李舜臣将軍は当時日本人たちに竜(勇) 智(知) 徳(徳)を皆取り揃えた偉人に推仰された.
李舜臣を東洋のネルソンに比喩した賛辞は 1892年 『朝鮮耳順神殿(朝鮮李舜臣伝)』に初めて出るのにこの本は李舜臣が豊臣秀吉の大遠征を “高根の花で作った”と記述した. 李舜臣将軍に対する賛辞は日本海軍によって最高潮に達した. 海軍中将佐藤デスタでは後日彼の著書 『帝国国防社では(帝国国防史論)』で “実はネルソンは人格で李舜臣に比肩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 匹敵する者はオランダのドラウィトル(イギリスを退けた海軍提督) 位”と言った. 彼は彼が海戦(海戦) 研究に跳びこんだ同期に対しては “李舜臣の崇高な人格と偉い功績が私の精神を激烈に悟らせたから”と告白した. 海軍参謀小笠原ナがナリは彼の著書 『海上権力社(海上権力史)』を通じて “李舜臣が海上世(海上勢)を確固に守ったから猛進した陸軍がゾソンタングで孤立して敗れた”と言った. 李舜臣敍事が尊敬と賛辞で戦争社(戦争史) 研究で鎭火したのだ.
アメリカの海洋軍事理論家エルプリドモヘン(Alfred Mahan, 1840年 9月 27日‾1914年12月 1日)の 『海洋圏(Sea Power)では』この 19世紀末世界を強打した. アメリカは “海を支配した者が世界を支配する”と言うモヘンのこの一言マルウルよって国家戦略を変えて一躍世界覇権帝国で成長した.
ところでモヘンはロシア・日戦争を勝利に導いたトゴを教えたAkiyamaサネユキから師事を受けた. 日本は李舜臣将軍を研究したあげく遂に海の戦略的価値に目覚めたし世界的な海洋人才モヘンをツルヒョンシキョッドンゴッだ. 当時日本には海軍英雄がいなかった. それで賊将(敵将)だったが朝鮮の李舜臣を引っぱって半面先生方式で海洋力の価値を磨き上げたのだ. 米海軍提督まで昇進したモヘンは海洋戦略地政学(海洋戦略地政学)を研究した. 彼は “国際政治は海を統制するための持続的な闘い”と重ねて強調した. 強い海軍を保有した国家が国際的にもっと大きい影響力を発揮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話だ. モヘンは海洋空間(空間)とヘアングトングサングロ(海洋通商路) 掌握が強大国の必須條件だと指摘しながら ‘海洋力(Sea Power)’という概念を提示して起動性と大量運送能力のため海洋勢力が大陸勢力より優勢だと結論した. ところで事実はモヘンの海洋戦略地政学理論が出るずっと前にイギリスが悟って行った. イギリスは地中海入口のジブラルタルと地中海と紅海を連結するスエズ運河, インドと東南アジアを連結するマラッカ海峡, 中国南部の貿易港である香港をお互いに連結する通常路を掌握したから 1815年‾1914年期間 ‘パックスブリタニカ(Pax Britannica・イギリスによる平和)’時代を開いて世界覇権国家で君臨したのだ.
各説して, 1930年日帝強制占領期間時代, 韓国の鎭海ぶりに駐屯していた日本海軍は忠武公李舜臣将軍を仕える統営忠武寺だ(忠武祠堂)を毎年定期的に捜して祭祀をあげたことと知られた. この事実は近現代韓・日関係詞を掘り出した著述家異種閣の著書 『日本人と李舜臣』を通じて確認された.
조선의 이순신을 칭찬한 지 얼마 안되는이라고 온 해군 중장 사토 데스타에서는 “ 나는 조선에 이순신이 있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도 해군 명장 트고헤이8으로(이하 트고) 제독이 역사를 새롭게 장식할 수 있던 것을 회상하면 유쾌하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트고를 일본 군신(군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동양의 넬슨이다라는 말로 이순신을 트고에 대치해 트고가 동양의 넬슨이다 라고 하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요컨데 데스타에서는 서양의 근대 해군력에 압도 되고 있는 일본을 트고를 지지하고 열등감을 넘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앉아 졸기(졸기)와 조르표그(졸평)들의 높은 이순신 평가는 변화가 없었다. 일본에서의 앉아 졸기(졸기: 후일의 심사 기록), 조르표그(졸평: 후일의 평가)는 당사자 사후(사후) 평가이므로 객관적이므로 사실(사실)이다. 이순신에 대한 1659 연간행 된 「조선 정벌기(조선 정벌기)」의 조르표그를 예시한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를 독려 해 유탄에 좌측어깨에 마중피가 팔꿈치까지 흘렀다. 그러나 장군은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전투가 모두 끝난 후야말로 처음으로 칼로 고기를 찢고 탄환을 뽑으세요라고 말했다. 탄환이 무슨치수라고 들어가서 가서 그것을 뽑아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참모들과 담소를 주고 받아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수술 과정의 고통에도와인 채 를 칭찬한 참는 문장과 함께 실린 꽂아 그림(사진 참조)이 그 사실을 말한다. 일본풍으로 그려진 꽂아 그림이지만 부리 부리 한 눈초리로 뱃머리에 선 충무공을 위풍 당당에 묘사되었다. 꽂아 그림안의 이순신 장군은 좌측어깨로 피날리고 있기에도 오른손을 가지고는 장검을 질기게 취한 채로 얼굴을 하지만 찡그리지 않았다.
1705년경의 승려 Seiki가 발행한 「조선 군기 대전(조선 전쟁 이야기 대전)」와 작가 바바신이 발행한 「조선 태평기(조선 태평기)」는 이순신 장군을 처음부터 영웅과 칭했다. 1800년 당대 인기 작가 빈 곳자토리트가 사용한 「에혼 조선 군기(그림책 조선 전쟁 이야기)」와 19 세기 베스트셀러였다 「에혼다이코기(그림책 다이코키)」는 이순신이 이끈 조선수군(해군)의 용맹함을 자질구레하게 그리고 있는데 에혼다이코기 꽂아 그림안에는 일본수군이 크게 지는 장면까지 그려져 있다. 이런 앉아 졸기(본)들은 모두 당시 서민이 즐겨 읽는 가벼운 역사 평전(역사 평전)이니까 왜곡이 있다 법도 했는데 모든 것을 사실에 의해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임진의 란당시 일본 조정과 재야는 이순신 말만 나와도 부들부들 떨린” 등이다. 그만큼 이순신 장군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룡(용) 지(지) 덕(덕)을 모두 갖춘 위인에게 추앙 되었다.
이순신을 동양의 넬슨에 비유한 찬사는 1892년 「조선 이순 신전(조선 이순신전)」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이 책은 이순신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원정을 “하늘의 별로 만든”이라고 기술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찬사는 일본해군에 의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군 중장 사토 데스타에서는 후일그의 저서 「제국 국방사에서는(제국 국방 역사 이론)」로 “ 실은 넬슨은 인격으로 이순신에 비견 될 수 없는
필적하는 사람은 네델란드의 드라위톨(영국을 치운 해군 제독) 위”라고 말했다. 그는 그가 해전(해전) 연구에 뛰어든 동기에 대해서는 “이순신의 숭고한 인격과 훌륭한 공적이 나의 정신을 격렬하게 깨닫게 했기 때문에”라고 고백했다. 해군 참모 오가사와라나가 나리는 그의 저서 「해상권력사(해상권력사)」를 통해서 “이순신이 해상세(해상세)를 확고하게 지켰기 때문에 맹진한 육군이 조손탕으로 고립해 진”이라고 말했다. 이순신 서사가 존경과 찬사로 전쟁사(전쟁사) 연구로 진화 했던 것이다.
미국의 해양 군사 이론가 에르프리드모헨(Alfred Mahan, 1840년 9월 27일~1914연 12월 1일)의 「해양권(Sea Power)에서는」이 19 세기말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은 “바다를 지배한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하는 모헨의 이 한마디 마르울이야는 국가 전략을 바꾸어 일약 세계 패권 제국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모헨은 러시아·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트고를 가르친 Akiyama 사네유키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일본은 이순신 장군을 연구한 끝에 결국 바다의 전략적 가치에 눈을 떴고 세계적인 해양 인재 모헨을 트르홀시콩돈곡이다. 당시 일본에는 해군 영웅이 없었다. 그래서 적장(적장)이었지만 조선의 이순신을 끌어들여 반면 선생님 쪽식에서 해양력의 가치를 연마했던 것이다. 미 해군 제독까지 승진한 모헨은 해양 전략 지정학(해양 전략 지정학)을 연구했다. 그는 “국제 정치는 바다를 통제하기 위한 지속적인 싸워”라고 거듭해 강조했다. 강한 해군을 보유한 국가가 국제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다. 모헨은 해양 공간(공간)과 헤앙톤그상로(해양 통상로) 장악이 강대국의 필수 조건이라고 지적하면서 해양력(Sea Power)이라고 하는 개념을 제시해 기동성과 대량 운송 능력이기 때문에 해양 세력이 대륙 세력보다 우세하다고 결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모헨의 해양 전략 지정학 이론이 나오는 훨씬 전에 영국이 깨달아서 갔다. 영국은 지중해 입구의 지브랄타와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마락카 해협, 중국 남부의 무역항인 홍콩을 서로 연결하는 통상로를 장악 했기 때문에 1815년~1914연기간 팍스 Britannica(Pax Britannica·영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열어 세계 패권 국가에서 군림했던 것이다.
각설 하고, 1930년 일제 강제 점령 기간 시대, 한국의 진해상에 주둔 하고 있던 일본해군은 충무공이순신 장군을 시중드는 통영 충무절이다(충무 사당)를 매년 정기적으로 찾고 제사를 준 것과 알려졌다. 이 사실은 근현대한·일관계사를 파낸 저술가 이종각의 저서 「일본인과 이순신」을 통해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