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軍の戦闘で勇敢に戦ったとされる「李 舜臣」。
実は卑怯な人物であった。
休戦協定を結んだ瞬間に戦闘を仕掛けて来た薄汚く卑怯な将軍
この卑怯な「李 舜臣」にとどめをを刺したのが島津義弘。
当時の薩摩軍は日本軍の中でも精強でした。
軍史(明の史書にも記載がある)に則ると停戦協定に従い、薩摩軍は撤退を始める(秀吉が死んだからという説もある)
撤退を開始し船に乗った瞬間に、李 舜臣が攻撃を仕掛けて来た。
これで精強・薩摩軍の島津義弘が激怒する。
即、反撃を開始する。
この状況を見た「明」の連合軍も、薩摩軍の怒りに満ちた勢いと、李 舜臣の裏切りぶりに呆れて、明軍が李を捨てる。
孤立した李 舜臣が島津の攻撃で敢え無く戦死。
島津の勇猛な戦いぶりは韓国の史書にも残されている(李氏朝鮮が記録にとどめている)
島津武士は全く死を恐れず、戦いの号令がかかると、我れ先にと戦いを望んで行く、朝鮮語では「シーマンズ」と発音するらしい。
島津(薩摩)では、現在で言うところのお裁き(裁判所)はあるが牢屋(刑務所)はないと言われる。
これは死刑になれば、自ら自決(切腹)するからである。
例えば現在でいうところの禁固5年と沙汰が下ると、自ら自宅に竹やりを入り口に×に掛けて一歩も出てこないで蟄居するからである。
この、どさくさの英雄「李 舜臣」を国内中に銅像を建てて、広めて、英雄として国民に定着させたのが、朴正煕。
この行為は反日を盛り上げる意図であり政治的な政策で実態と違う卑怯な英雄を現在も韓国民に洗脳浸透させているのは朴正煕である。
その後、反日・政治戦略に使われるのは、やはり銅像・・・・現在は「少女像」 朝鮮の歴史の再構築は変わらないのである。
※明史、征韓録、懲毖録など参照
文句あるなら読んでから指摘しろよ、具体的にw
※韓国人は論理的と言うけど歴史の改ざんは日常茶飯事。
たとえば、
高句麗の広開土王碑(韓国の学者が、日本による改ざんを唱えていましたが、中国で拓本が発見され、改ざんなしとわかっています)には「倭が新羅や百済を臣民とした」と記されています。
韓国は「改ざん」と主張していましたが、後日、中国で拓本が発見され、「改ざん」説は否定されています。
高句麗を朝鮮とみれば、朝鮮の石碑に記載されています。
日本書紀の「雄略紀」や「欽明紀」などにも、朝鮮半島南部の伽耶の一部を含む任那に倭国の出先統治機関があったと記載されています。
そうなると前方後円墳をを三つに分断始めるw
そもそも現在の科学では出土した木材や石材を調べれば日本から来ていることがわかる。
ゆえに韓国人は埋め戻したり壊したりしている。
前方後円墳を横に三つに切り、真ん中を盛り上げて、3つの古墳が連続してあるかのようにして古代朝鮮の発祥の様に、今作っている、
(松鶴洞前方後円墳など)
歴史の改ざんを大規模に平気でやる韓国・・・どんな資料を提示されても信用できるわけないだろw
歴史を創作する韓国人を信用できるわけもなくw
일본군의 전투로 용감하게 싸웠다고 여겨지는 「이순신」.
실은 비겁한 인물이었다.
휴전 협정을 체결한 순간에 전투를 걸어 온 추레하고 비겁한 장군
이 비겁한 「이순신」에 일곡을을 찌른 것이 시마즈 요시히로.
당시의 사츠마군은 일본군 중(안)에서도 정강이었습니다.
군사(명의 사서에도 기재가 있다)에 준거하면 정전협정에 따라, 사츠마군은 철퇴를 시작하는(히데요시가 죽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철퇴를 개시해 배를 탄 순간에, 이순신이 공격을 걸어 왔다.
이것으로 정강·사츠마군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격노한다.
즉, 반격을 개시한다.
고립한 이순신이 시마즈의 공격으로 어이없게 전사.
시마즈의 용맹한 싸우는 모습은 한국의 사서에도 남아 있다(이씨 조선이 기록에 세우고 있다)
시마즈 타케시는 완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움의 호령이 나돌면, 나끝에싸움을 바래서 가는, 조선어에서는 「시만즈」라고 발음하는 것 같다.
시마즈(사츠마)에서는, 현재에 말하는 곳(중)의 중재(재판소)는 있다가 감옥(형무소)은 없다고 말해진다.
이것은 사형이 되면, 스스로 자결(할복 자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재에 말할 곳의 금고 5년으로 소식이 내리면, 스스로 자택에 대나무를 입구에×에 걸고 한 걸음도 나오지 말고 칩거 하기 때문이다.
이, 혼잡의 히데오 「이순신」을 국내안에
이 행위는 반일을 북돋우려는 의도이며 정치적인 정책으로 실태와 다른 비겁한 영웅을 현재도 한국민에게 세뇌 침투시키고 있는 것은 박정희이다.
그 후, 반일·정치 전략에 사용되는 것은,역시 동상····현재는 「소녀상」조선의 역사의 재구축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있다.
※명사, 정한록, 징록 등 참조
불평 있다라면 읽고 나서 지적해라, 구체적으로 w
※한국인은 논리적이라고 하지만 역사의 개찬은 일상다반사.
예를 들어,
고구려의 광개토왕비(한국의 학자가, 일본에 의한 개찬을 주창하고 있었습니다만, 중국에서 탁본이 발견되어 개찬 없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에는 「야마토가 신라나 (쿠다라)백제를 신민으로 했다」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고구려를 조선이라고 보면, 조선의 비석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일본 서기의 「웅략기」나 「흠아키노리」 등에게도, 한반도 남부의 가야의 일부를 포함한 임라에 야마토국의 행선지 통치 기관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방 후원분을을 세 개에 분단 시작하는 w
원래 현재의 과학에서는 출토한 목재나 석재를 조사하면 일본에서 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묻어 되돌리거나 부수거나 하고 있다.
전방 후원분을 옆에 세 개에 잘라, 한가운데를 북돋우고, 3개의 고분이 연속해 있다인가와 같이 해 고대 조선의 발상과 같이, 지금 만들고 있는,
(쇼카쿠동전방 후원분 등)
역사를 창작하는 한국인을 신용할 수 있는 것도 없고 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