さつまいもの歴史
一説では、日本のさつまいもは1597年に宮古島に入ったのが最初と言われていますが、定かではないようです。
1605年に中国との貿易の貿易船の責任者野国総管によって中国福建省から鉢植えの状態で琉球に入りました。野国総管は後に芋大主と呼ばれ尊敬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沖縄県嘉手納町には「甘藷発祥の地」の石碑があり、毎年10月の第一土曜日、日曜日に野国総管祭があります。
野國總管
儀間真常
その後、儀間真常という役人が15年かけて琉球全体に広めて行きます。その偉業により儀間真常は琉球五偉人の一人となっています。
1705年に薩摩の国山川の前田利右衛門が琉球より苗を持ち帰り栽培したことで「薩摩芋」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て長崎など、瞬く間に九州全土で広く栽培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中国から伝わったお芋なので「唐芋」、または中国と同じ呼び方で、じゃがいもを「馬鈴藷」というのに対して、さつまいもは「甘藷」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
鹿児島県指宿市山川にある「徳光神社」は「からいも神社」と呼ばれ、「さつまいも発祥の地」とされています。
その後、江戸時代中期までのたび重なる飢饉によって救荒作物として注目され、西南暖地を中心に全国に広く普及していきます。
1732年の享保の大飢餓の時も薩摩藩はお芋のおかげで餓死する人が少なかったそうです。
関東には1735年、蘭学者の青木昆陽が徳川吉宗に言われて薩摩から江戸に種芋を取り寄せ、小石川御薬園(現:小石川植物園/東京都文京区)や現在の千葉県幕張周辺で試作したのが始まりとされています。京成千葉線幕張駅のすぐ側に「昆陽先生甘藷試作之地」と刻まれた記念碑があります。また、幕張には青木昆陽の偉業を讃えて「昆陽神社」(別名 芋神様)が建てられています。「蕃藷考」という古書にも関東に伝えたときの栽培方法などの記録が残されています。
さつまいものことを関西では「琉球芋」、関東では「薩摩芋」と呼び、江戸の女性は「阿薩/おさつ」と呼んでいたそうです。
それから16年後の1751年に埼玉県の川越藩とその周辺地域で本格的に栽培が始まりました。ちなみに、1番最初に川越芋が作られたのは現在の所沢市南永井というところで吉田弥右衛門という人が、種芋200個から始めたそうです。これが「川越芋」のはじまりで、吉田家には、吉田家文書という古文書がが残されていて、所沢市の文化財に指定されています。吉田家の庭には「川越芋始作地」の記念碑もあります。
寛政の頃(1700年代末)に「川越芋」が爆発的に流行します。江戸から近くて運びやすかった事もあり、当時「川越芋」は質も良く最高級品とされていたようです。赤沢仁兵衛という人が栽培方法の研究と苦労を重ねて「川越芋」を確立させたそうです。後に「赤沢仁兵衛・実験甘藷栽培方法」という書物を残しています。
江戸で1番最初に焼き芋が売られたのは1793年の冬で、本郷四丁目で木戸番の人が「八里半」と書いた旗を立てて焼き芋を売ったそうです。8里半は栗(9里)より少しだけ劣るという意味で付けた洒落。謙虚です。
1789年には122種類のさつまいも料理のレシピ本「甘藷百珍」も出発されています。
天保時代(1830年頃)の書物「諸国名物番付」に、さつまいもの代表産地として川越地方と記載されました。当時の焼芋屋さんは、さつまいもを十三里と呼んで「栗(九里)より(四里)うまい十三里」という看板を出していたそうです。13里は江戸から川越までのおよその距離でこちらも洒落です。自信満々です。
大阪では焼き芋を「ほっこり」と呼んでいたそうです。
江戸時代の後期には、現在と変わらない栽培方法が確立され、貯蔵も行われていたようです。
「江戸繁盛記」に焼き芋について「4文も買えば泣き叫ぶ子供をなだめられる。10文も買えば食べ盛りの書生の朝めしのかわりになる」という文が残されています。4文は現在の金銭価値で80円くらい。また、当時の大名や裕福な人達も喜んで食べていたようです。
東北本線が引かれ、1889年埼玉県大宮の飯野喜四郎によって福島県にもお芋が売られました。初めて売りに出したお芋は言い値で直ぐに売れたそうです。
鉄道が北へ伸びるにつれて、寒くて栽培できない地方にまでお芋が届くようになりました。
今ではは北海道でも栽培を試みていて、独自の栽培方法や保存方法の研究が日々行われています。
現在の「さつまいも」の生産量は1位が鹿児島県、2位が茨城県、3位が千葉県となっています。圧倒的な生産量の鹿児島県ですが、そのほとんどが焼酎の材料になる黄金千貫などの「飲むさつまいも」で、焼き芋にして美味しい「食べるさつまいも」の生産量では茨城県がトップになります。ただ収穫量が多いだけではなく茨城県は独自のブランド芋を作り、巨大な貯蔵施設を造ったり、他県より「食べるさつまいも」の研究と努力をしてきました。
魅力度ランキング最下位に選ばれたりする茨城県ですが、甘藷に関しては日本一だと思います。
品種登録されたお芋の苗、生芋は日本国外への持ち出しは禁止されています。
最後に日本に「さつまいも」が入る前の起源について。
南米の熱帯地に生息するトリフィーダという植物が原種だということが研究から判明しています。
長い年月の中で交雑と選抜を繰り返し変異しながら世界中に広まったとされています。
紀元前3000年には既に栽培されていたらしく、紀元前1000年にはポリネシアに渡っていたという説もあります。紀元前200~600年に作られた、ペルーのモチーカ文化のサツマイモの形の土器なども発見されているようです。
ヨーロッパにはコロンブスによってスペインに入りましたが、気候が合わず栽培されなかったようです。
イギリスに持ち込まれたお芋はペルーでの塊茎を意味する言葉 batata から patate と呼ばれ、じゃがいも/potatoに対して、さつまいもは sweet potatoと呼ば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現在もさつまいもは英語でスイートポテトです。
その後、東南アジアに広がり、1571年にフィリピン、中国には1594年に陳振龍によってフィリピンから福建省に伝わっています。そのわずか11年後に野国総管によって日本に持ち込まれました。
고구마의 역사
일설에서는, 일본의 고구마는 1597년에 미야코섬에 들어간 것이 최초라고 말해집니다만 , 확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605년에 중국과의 무역의 무역선의 책임자야국 총관에 의해서 중국 푸젠성으로부터 화분 상태로 류큐에 들어갔습니다.야국 총관은 후에 우대주로 불려 존경받게 됩니다.오키나와현 카데나쵸에는 「사탕수수 발상지」의 비석이 있어, 매년 10월의 제일 토요일, 일요일에 야국 총관제가 있어요.
야국총관
기마진상
그 후, 기마진상이라고 하는 공무원이 15년 걸려 류큐 전체에 넓혀서 갑니다.그 위업에 의해 기마진상은 류큐5 위인의 한 명이 되고 있습니다.
1705년에 사츠마의 쿠니야마강의 마에다 리에몬이 류큐에서(보다) 모종을 가지고 돌아가 재배한 것으로 「고구마」라고 불리게 되어 나가사키 등, 순식간에 큐슈 전 국토에서 넓게 재배되게 됩니다.중국에서 전해진 감자이므로 「고구마」, 또는 중국과 같은 부르는 법으로, 감자를 「청동제의 말의 장신구저」라고 하는데 대하고, 고구마는 「사탕수수」라고 하는 일도 있어요.
카고시마현 이부스키시 야마카와에게 있는 「토쿠미츠 신사」는 「매운 것도 신사」라고 불려 「고구마 발상지」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후, 에도시대 중기까지의 여행 겹치는 기근에 의해서 구황 작물로서 주목받아 서남난지를 중심으로 전국에 넓게 보급되어 있어 옵니다.
1732년의 향보의 대기아때도 사츠마 번은 감자 덕분에 아사하는 사람이 적었다고 합니다.
관동에는 1735년, 난학자의 아오키 곤요가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들어 사츠마로부터 에도에 씨감자를 들여와 코이시카와약원(현:코이시카와 식물원/도쿄도 분쿄구)이나 현재의 치바현 마쿠하리 주변에서 시작한 것이 시작으로 되어 있습니다.게이세이 치바선마쿠하리역의 곧 측에 「코야 선생님 사탕수수 시작지지」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있어요.또, 마쿠하리에는 아오키 곤요의 위업을 칭송해 「코야 신사」(별명감자 신)이 지어지고 있습니다.「번저고」라고 하는 고서에도 관동에게 전했을 때의 재배 방법등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구마를 칸사이에서는 「고구마」, 관동에서는 「고구마」라고 불러, 에도의 여성은 「아살/고구마」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6년 후의 1751년에 사이타마현의 카와고에번과 그 주변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재배가 시작되었습니다.덧붙여서, 1번 최초로 카와고에감자가 만들어진 것은 현재의 토코로자와시 미나미나가이라고 하는 (곳)중에 요시다 야에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씨감자 200개로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이것이 「카와고에감자」의 시작으로, 요시다가에는, 요시다가 문서라고 하는 고문서가가 남아 있고, 토코로자와시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요시다가의 뜰에는 「카와고에우시작지」의 기념비도 있습니다.
너그러운 정치의 무렵(1700년대말)에 「카와고에감자」가 폭발적으로 유행합니다.에도로부터 가까워서 옮기기 쉬웠던 일도 있어, 당시 「카와고에감자」는 질도 자주(잘) 최고급품으로 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아카자와 히토시 무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재배 방법의 연구와 고생을 거듭해 「카와고에감자」를 확립시켰다고 합니다.후에 「아카자와 히토시 무관·실험 사탕수수 재배 방법」이라고 하는 서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에도에서 1번 최초로 군고구마가 팔린 것은 1793년의 겨울로, 혼고 욘초메에서 문지기의 사람이 「군고구마」라고 쓴 기를 세우고 군고구마를 팔았다고 합니다.8리반은 률(9리)보다 약간 뒤떨어진다고 하는 의미로 붙인 쇄락.겸허합니다.
1789년에는 122 종류의 고구마 요리의 레시피책 「사탕수수백진」이나 출발되고 있습니다.
에도말기의 연호 시대(1830년경)의 서적 「제국 명물 순위」에, 고구마의 대표 산지로서 카와고에 지방이라고 기재되었습니다.당시의 군고구마가게는, 고구마를 군고구마라고 불러 「률(구리)보다 (4리) 맛있는 군고구마」라고 하는 간판을 내고 있었다고 합니다.13리는 에도로부터 카와고에까지의 대략의 거리로 이쪽도 멋부려입니다.자신만만합니다.
오사카에서는 군고구마를 「넌더리나」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에도시대의 후기에는, 현재와 다르지 않는 재배 방법이 확립되고 저장도 행해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
「에도 번성기」에 군고구마에 대해 「4문도 사면 울부짖는 아이를 달랠 수 있다.10문도 사면 식욕이 왕성한 시기의 학생의 아침째 해 의 것인지 비교적 된다」라고 하는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4문은 현재의 금전 가치로 80엔 정도.또, 당시의 오나나 유복한 사람들도 기꺼이 먹고 있던 것 같습니다.
토호쿠본선이 끌려 1889년 사이타마현 오미야의 이노 키시로우에 의해서 후쿠시마현에도 감자가 팔렸습니다.처음으로 판 감자는 부르는 값으로 곧바로 팔렸다고 합니다.
철도가 북쪽에 성장하는 것에 따라, 추워서 재배할 수 없는 지방에까지 감자가 닿게 되었습니다.
지금은은 홋카이도에서도 재배를 시도하고 있고, 독자적인 재배 방법이나 보존 방법의 연구가 날마다 행해지고 있습니다.
매력도 랭킹 최하위로 선택되거나 하는 이바라키현입니다만, 사탕수수에 관해서는 일본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품종 등록된 감자의 모종, 생우는 일본외에의 지출은 금지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일본에 「고구마」가 들어가기 전의 기원에 대해.
남미의 열대지에 생식 하는 새 피더라고 하는 식물이 원종이라고 하는 것이 연구로부터 판명되어 있습니다.
긴 세월 중(안)에서 교잡과 선발을 반복해 변이하면서 온 세상에 퍼졌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럽에는 콜롬부스에 의해서 스페인에 들어갔습니다만, 기후가 맞지 않고 재배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영국에 반입된 감자는 페루에서의 덩이줄기를 의미하는 말 batata 로부터 patate 로 불려 감자/potato에 대해서, 고구마는 sweet potato로 불리게 되었습니다.현재도 고구마는 영어로 스위트 포테이토입니다.
그 후, 동남아시아에 퍼져, 1571년에 필리핀, 중국에는 1594년에 진진용에 의해서 필리핀으로부터 푸젠성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그 불과 11년 후에 야국 총관에 의해서 일본에 반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