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苔]
三國遺事 第一卷 1 紀異 延烏郎 細烏女
* 「藻」です。
『酉陽雑俎』段成式[撰]—->旁説話=金錐説話(パンソリ自体は朝鮮後期の作)
未調査
牧隱詩藁 卷之三十一 詩
* 「海衣」の初出。
『慶尙道地理志』における「海衣」(1/2)
『慶尙道地理志』における「海衣」(2/2)【参考:「海菜」の記述】
* 「海衣」の初出とされている文献。地方の特産品として。海苔食、海苔養殖の記事なし。
「海衣」の記述 [世宗莊憲大王實錄十四冊 卷第四十五]
新增東國輿地勝覽 第40卷 光陽縣
* 「海衣」と「甘苔」とは別の産品として記録されている。
本草綱目 第16冊 第19巻 草部八 (草之八 水草類二十二種)
* 「海藻」の部分に「新羅國」についての記述がある。
許筠『屠門大嚼』 蔬菜之類
* 「海衣」と「甘苔」は別個の食べ物とされている。また、その特徴から、アマノリに相当するのは「甘苔」である。
その結果、この時代の「海衣」は、海苔とは別個の海藻だということになる。
『東醫寶鑑』における「甘苔」他の記述
* 「海衣」の記述がなく、「甘苔」の記述がある。
ただし、「海菜」の部分に、本草の記述の引用として「紫菜」の説明がある。
潛谷先生遺稿卷之六 請順湖南民情。速爲變通箚。 戊戌七月初十日
* 「海衣」と「海苔」が別の物として記されている。
星湖先生僿說卷之五 萬物門 綸組
* 「作片如紙」の記述
[機械翻訳] 光陽海苔始殖址指定番号:全羅南道記念物第113号
光陽の朝鮮時代6 -事実を知り是非の判断の先駆者,金汝翼海苔養殖に成功する
* 「始殖海衣」の記述。現在墓標は残っていない。
莞島郡伝承
未調査
『物名攷』
* 「海衣 採海中石衣 作薄片如紙」の記述があるとされる。
しかし、海衣自体がない。紫菜。
丁若鏞 『經世遺表』 第14冊 均役事目追議 第1 藿税
* 「海苔」の初出とされていたが、より古い記述がある。現在の分類に直接関連している?
『萬機要覽』 財用編三 海稅
全羅道光陽縣玉谷面太仁島海衣及津下面船所鎭浦市收稅冊
朝鮮総督府農商工部編纂『韓國水産誌』[第1冊]第1輯
* 古老への聞き取り調査。
鄭文基「朝鮮海苔」(『朝鮮之水産』第百四十四號別刷)
未調査
* 上述の伝承などに関連する文献。
鄭文基 朴九秉 朴丞源 金仁培 저 「韓國近世科學技術 100年史 調査硏究 」
[のり巻き]
「海衣裹」の記述
* 『京都雜志』『洌陽歲時記』『東國歳時記』の調査。海衣で飯を包んだ料理は、『洌陽歲時記』以降。
また、『京都雜志』と『東國歳時記』との比較により、 「海衣裹」は、19世紀に入ってからの風俗だということが判明する。
海苔) 日本人は嘘を守るために努力しているが,
日本の 海苔
養殖 手始め : 1684年
紙形態で加工手始め: 1717年
韓国の 海苔
養殖 手始め : 1164年
紙形態で加工手始め:最小 14世紀
↑
このような事実に対する反論は全然できないでしょう?
どうして日本人は単純な事実に対してそのようにまで怒ることですか? w
牧隱詩藁 卷之三十一 詩 は海衣の初出。14世紀
「作片如紙」の記述があるのは、星湖先生僿說卷之五 萬物門 綸組
武(ぶ)または倭 武(わぶ、生没年不詳)は、5世紀後半(古墳時代中期)の倭王[1]。「倭王武」とも[1]。
済の子、興の弟で、「倭の五王」の最後の1人。第21代雄略天皇に比定する説が有力視される。
海苔、俗云「乃理(nori)」
[김]
삼국유사제일권 1 기이연오낭세오녀
* 「조」입니다.
「서양잡조」단성식[찬]--->방설화=금 송곳 설화(판소리 자체는 조선 후기의 작)
미조사
목은시고권지 31시
* 「해 의」의 초출.
「경도우지리지」에 있어서의 「해 의」(1/2)
「경도우지리지」에 있어서의 「해 의」(2/2)【참고:「해 채」의 기술】
* 「해 의」의 초출로 되어 있는 문헌.지방의 특산품으로서.김식, 김양식의 기사 없음.
「해 의」의 기술 [세종장헌대왕실십4권권 제 45]
신토국여지승람 제 40권코오요현
* 「해 의」와「감태」란별의 산품으로서 기록되고 있다.
본초강목 제 16권 제 19권쿠사카베8 (초지8 수초류 22종)
* 「해조」의 부분에 「신라국」에 대한 기술이 있다.
허 「도문대작」채소지류
* 「해 의」와「감태」는 별개의 음식으로 되어 있다.또, 그 특징으로부터, 아마노리에 상당하는 것은 「감태」이다.
그 결과, 이 시대의 「해 의」는, 김과는 별개의 해조라고 하는 것이 된다.
「동의보감」에 있어서의 「감태」다른 기술
*「해 의」의 기술이 없고, 「감태」의 기술이 있다.
다만, 「해 채」의 부분에, 초목의 기술의 인용으로서 「자채」의 설명이 있다.
잠 타니 선생님 유고권지6청순호남 민정.속위변통차. 무술7월 첫10일
* 「해 의」와「김」이 다른 물건으로서 기록되고 있다.
성호선생님권지5만물문륜조
* 「작 편여지」의 기술
[기계 번역] 코오요 김시식지지정 번호:전라남도 기념물 제 113호
코오요의 조선시대 6 -사실을 알아 시비의 판단의 선구자, 금여익김양식에 성공한다
* 「시식해의」의 기술.현재 묘비는 남지 않았다.
완도군 전승
미조사
「물명고」
* 「해 의채해중석의작 박편여지」의 기술이 있다로 여겨진다.
그러나, 해 의자체가 없다.자채.
정약 「경세유표」 제14권균역사목추의 제 1 세
* 「김」의 초출로 되어 있었지만, 보다 낡은 기술이 있다.현재의 분류에 직접 관련하고 있어?
「만기요람」재용 편3해
전라도 코오요현타마타니면태인도해의급진아래쪽 면 후나도코로진포시수책
조선 총독부 농상 코우베 편찬 「한국수산잡지」[제1권]제1집
*노인에게의 청취 조사.
정문기 「조선 김」( 「조선지수산」 제백 44호별쇄)
미조사
*상술의 전승 등에 관련하는 문헌.
정문기박9병박승원김 히토시배 「한국근세과학기술 100년사 조사구 」
[김밥]
「해 의이」의 기술
* 「쿄토잡지」 「렬양시 기」 「동국세시기」의 조사.해 의로 밥을 싼 요리는, 「렬양시 기」이후.
또, 「쿄토잡지」와 「동국세시기」라는 비교에 의해, 「해 의이」는, 19 세기에 들어가고 나서의 풍속이라고 하는 것이 판명된다.
김) 일본인은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일본의 김
양식 시작 : 1684년
지 형태로 가공 시작: 1717년
한국의 김
양식 시작 : 1164년
지 형태로 가공 시작:최소 14 세기
↑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반론은 전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 일본인은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 그처럼까지 화내는 것입니까? w
목은시고권지 31시는 해 의의 초출.14 세기
「작 편여지」의 기술이 있다의는,성호선생님권지5만물문륜조
무() 또는 야마토무(, 태어나고 죽은 해 미상)는,5 세기 후반(고분 시대 중기)의 야마토왕[1].「왜왕무」라고도[1].
제의 아이, 흥의 남동생으로, 「왜의 오왕」의 마지막 1명.제21대 유랴크 천황에게 비정 하는 설이 유력시 된다.
김, 속운 「내리(n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