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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期寿司で作ったキンバプ
キムは朝鮮時代から全羅道の特産物として記録に残っているが、キムバプに対する記録は日帝強占期ご飯に蝋燭を入れて卵脂団、でんぶ(鯛肉をピンク色に染めたもの)などを中にしてキムに包むと出てくる。
酢で肝臓をしたキムバプは解放後の新聞記事でもそのレシピが見られる。 今日のキンバプは酢よりごま油と塩で肝臓をする。
キムパブの大衆化は日帝強占期のキムがある程度生産され、日本の弁当文化が定着しつつ作られた。
キムバプはご飯に色々な中を入れてキムで巻いて安い食べ物である。
キムは『慶尙道地理志』と『東国輿地勝覽』に全羅南道光陽郡テインドの土産品として初登場する。
韓国がご飯を在庫にしているので、キムをご飯に包んだが、キムバプが朝鮮時代にあったという資料はない。
キムが日帝時代までもかなり貴重な食品だったので、キムバプが朝鮮時代に普及したとは見にくい。
キムバプが広く普及している一次的な条件は、キムが多く供給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日帝強占期本格的にキム生産が増えたため、キムパブはその時期に定着した。
また、キムバプは代表的な弁当メニューだが弁当文化もその時期に社会全般に普及した。
朝鮮時代の官庁で食事を提供していたことが変化し、日帝強占期官庁の職員は昼食時に食堂でご飯を食べたり弁当を食べることになる。
朝から出勤して1日8時間以上勤務する官庁生活で弁当は必須となった。 学校も朝早くから登校して一定時間勉強しながら弁当が必須となった。
昌慶園の桜の花など野遊会に行く時も弁当は必須だった。
もちろん食堂で昼食を買うことができたが、桜の花などには膨大な人派が集まるので弁当を戦う方が楽だっただろう。
すべての弁当はすべてあいまいではなかった。
1920年代、青波洞の長油工場など工場に出勤する婦女子と青少年たちは朝早く朝ごはんを弁当に包んで出勤した。 これを別味だと見るのは難しい。
美味しい弁当はある程度生きる階層が作ることだった。
『東亜日報』1930年3月7日「婦人の知っておく春のレシピ(2)」という記事は、野遊会用弁当の作り方を紹介している。
「昌慶園に花見を行っても昼食の時はなり食堂に入ると量は少なく高価で余暇不経済ではありません。
自宅で準備して取れば楽に食べられます。 ...
サンドイッチ:パン屋さんから機械に切ってもらうと楽です。 自宅で切ってもいいです。
一方にバターを塗り、この片に中を入れます。
中に野菜サンドイッチ、ジャンサンドイッチ、卵サンドイッチがあるのに
ちゃんにはイチゴ、リンゴ、ブドウ、アプリコットがあります。
サムバプ(寿司)としてキムサムバプ(ノリマキズシ)があります。
材料は浅草のりという厚い日本のキムで、朝鮮のキムで使うには二枚を書きます。
ご飯が灸が入るだけで別にボウルに広がり、
酢1ホップ、砂糖2スプーン、塩1スプーン、味の素1スプーンを混ぜてご飯にかけます。
これが寿司飯作りです。
標高を水に呼んで行き、卵はジダンを吹き、でんぶというドミサルをピンク色に染めたものを用意します。
足の上にキムを置き、キムの中で卵、標高、でんぶを置いて巻いていきます。
万物をナイフで取ります。 日本の赤いうなぎを細かく切り、一緒に食べます。」
当代、かなり高価なものをパン、バター、ジャンなどと浅草焼という日本のキム、シイタケ、デンブーなどを材料に言及したこの弁当の製法は中上層を狙ったものだ。
中上階のお弁当レシピにキムサムバプが入っていた。 ここで注目されるのは、ご飯に酢で肝臓をした部分である。
寿司の一種でキムサムバプを作ったのでご飯に酢が入った。 解放後もキンバプ米の時はご飯に酢で肝臓をしている。 『東亜日報』 1958.03.29。
「ピクニック用寿司」という記事でも、米ごはんでご飯をした後、初め1合、砂糖1扉、塩1扉、ミミソ少しを入れるとした。
オボロ(魚肉を糸くず)、パクオガリ、標高、高野豆腐、ほうれん草、ニンジン、ワムチャムジ(たくあん)などを準備した後、キムにご飯を置いて中を作るとして1930年のキムバプ製造法と大きな差がない。
『京郷新聞』 1976.04.14。 「移住日の料理」でもご飯に蝋燭を混ぜてビビゴ、ごぼう、卵、ほうれん草などを中に用意した。
キンバプで酢で肝臓をしないレシピは1970年代末に出てくる。
『毎日経済』1977.03.12。
「春の遊び菜の野外弁当」のキンバプレシピでみじん切りの豚肉を炒めたもの、野菜炒め物をご飯に混ぜて、金を4節に切った後、ご飯を安くした後、ミナリで結んで安くするという新しいキムバプレシピを紹介している。
それなら、キムバプは日帝時代の寿司をキムに包んだノリマキズシに由来したのだろうか?
統営の名物である忠武キンバプはご飯に何の調味もしなかった。 長い間変質しないように、キムの中にご飯だけ入れて巻いて親指の大きさに切ったのだ。
このキンバプにムキムチとイカムチムをおかずにする。
忠武キムパブがいつ作られたのかは分からないが、キムが比較的一般的な日帝強占期に作られただろうと推定できる。
忠武キンバプを作るとき、その当時一般的な常識であるご飯に蝋燭を混ぜずにご飯だけ安いのは、キンバプの調理が多様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
日帝時代にも酢の代わりに他の調味をしたり調味をしないキンバプが存在した可能性がある。
参考資料
定期刊行物 「夫人の知っておく春鉄料理法(二)」。 東亜日報(1930.03.06):五面社会。
定期刊行物 「ピーク狩用用」寿司。 東亜日報(1958.03.29):4面生活/文化。
定期刊行物 「移住日の料理」 京郷新聞(1976.04.14):四面生活/文化。
定期刊行物 「春遊びチャビー野外弁当」 毎日の経済(1977.03.12):8面の生活/文化。
執筆者
カン・ムンソク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2951
근대 신문에서 보는 음식 > 개항 이래 들어 온 음식과 식재
일제 강점기 스시로 만든 킨바프
김은 조선시대부터 전라도의 특산물로서 기록에 남아 있지만, 킴바프에 대한 기록은 일제 강점기 밥에 초를 넣어 란지단, (도미육을 핑크색에 물들인 것)등을 안으로 하고 김에 싸면 나온다.
식초로 간장을 한 킴바프는 해방 후의 신문 기사에서도 그 레시피를 볼 수 있다. 오늘의 킨바프는 식초보다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장을 한다.
김밥의 대중화는 일제 강점기의 김이 있다 정도 생산되어 일본의 도시락 문화가 정착하면서 만들어졌다.
킴바프는 밥에 다양한 중을 들어갈 수 있고 김으로 감아 싼 음식이다.
김은 「경도우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전라남도 코오요군 테인드의 선물품으로서 첫등장 한다.
한국이 밥을 재고로 하고 있으므로, 김을 밥에 쌌지만, 킴바프가 조선시대에 있었다고 하는 자료는 없다.
김이 일제 시대까지도 꽤 귀중한 식품이었으므로, 킴바프가 조선시대에 보급했다고는 보기 나쁘다.
킴바프가 넓게 보급되어 있는 일차적인 조건은, 김이 대부분 공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제 강점기 본격적으로 김 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에, 김밥은 그 시기에 정착했다.
또, 킴바프는 대표적인 도시락 메뉴이지만 도시락 문화도 그 시기에 사회 전반에 보급했다.
조선시대의 관청으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 변화해, 일제 강점기 관청의 직원은 점심 식사시에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도시락을 먹게 된다.
아침부터 출근해 1일 8시간 이상 근무하는 관청 생활로 도시락은 필수가 되었다. 학교도 아침 일찍부터 등교해 일정시간 공부하면서 도시락이 필수가 되었다.
창경원의 벚꽃 등 야유회에 갈 때도 도시락은 필수였다.
물론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살 수 있었지만, 벚꽃등에는 방대한 인파가 모이므로 도시락을 싸우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모든 도시락은 모두 애매하지 않았다.
1920년대, 세이하동의 장유 공장 등 공장에 출근하는 부녀자와 청소년들은 아침 일찍 아침 밥을 도시락에 싸 출근했다. 이것을 별미라고 보는 것은 어렵다.
맛있는 도시락은 있다 정도 사는 계층이 만드는 것이었다.
「동아일보」1930년 3월 7일 「부인이 알아 두는 봄의 레시피(2)」라고 하는 기사는, 야유회 용무를 마침 바로 그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창경원에 하나미를 실시해도 점심 식사때는 되어 식당에 들어가면 양은 적고 고가이고 여가 무익하지는 않습니다.
자택에서 준비하고 취하면 편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
샌드위치:빵집으로부터 기계에 잘라 주면 편합니다. 자택에서 잘라도 괜찮습니다.
한편에 버터를 발라, 이 편에 중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안에 야채 샌드위치, 쟌 샌드위치, 알샌드위치가 있다의에
에는 딸기, 사과, 포도, 아프리콧트가 있어요.
삼바프(스시)로서 킴삼바프(노리마키즈시)가 있어요.
재료는 아사쿠사김이라고 하는 두꺼운 일본의 김으로, 조선의 김으로 사용하려면 2매를 씁니다.
밥이 뜸이 들어가는 것만으로 별로 볼에 퍼져,
식초 1 호프, 설탕 2 스푼, 소금 1 스푼, 아지노모토 1 스푼을 혼합하고 밥에 칩니다.
이것이 스시밥만들기입니다.
표고를 물에 불러서 가, 알은 지단을 불어, 라고 하는 도미 원숭이를 핑크색에 물들인 것을 준비합니다.
다리 위에 김을 두어, 김 중(안)에서 알, 표고, 를 두어 감아서 갑니다.
만물을 나이프로 취합니다.일본의 붉은 장어를 세세하게 잘라, 함께 먹습니다.」
당대, 꽤 고가의 것을 빵, 버터, 쟌등과 아사쿠사소라고 하는 일본의 김, 표고버섯, 덴브등을 재료에 언급한 이 도시락의 제법은 나카가미층을 노린 것이다.
나카가미층의 도시락 레시피에 킴삼바프가 들어가 있었다. 여기서 주목받는 것은, 밥에 식초로 간장을 한 부분이다.
스시의 일종으로 킴삼바프를 만들었으므로 밥에 식초가 들어갔다. 해방 후도 킨바프미때는 밥에 식초로 간장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1958.03.29.
「피크닉용 스시」라고 하는 기사에서도, 미 밥으로 밥을 한 후, 처음 1합, 설탕 1문, 소금 1문, 미미소 조금을 넣는다고 했다.
오보로(어육을 솜털), 파크오가리, 표고, 언두부, 시금치, 당근, 웜체무지(싶게 팥고물)등을 준비한 후, 김에 밥을 두고 안을 만든다고 하여 1930년의 킴바프 제조법과 큰 차이가 없다.
「옛 쿄토의벼슬아치 신문」 1976.04.14. 「이주일의 요리」라도 밥에 초를 혼합해 비비고, 우엉, 알, 시금치등을 안에 준비했다.
킨바프로 식초로 간장을 하지 않는 레시피는 1970년대말에 나온다.
「매일 경제」1977.03.12.
「봄의 놀이나물의 야외 도시락」의 킨바프레시피로 잘게 썬 것의 돼지고기를 볶은 것, 야채 볶아 것을 밥에 혼합하고, 돈을 4절에 자른 후, 밥을 싸게 한 후, 미나리로 묶어 싸게 한다고 하는 새로운 킴바프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킴바프는 일제 시대의 스시를 김에 싼 노리마키즈시에 유래한 것일까?
통영의 명물인 충무 킨바프는 밥에 무슨조미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변질하지 않게, 김안에 밥만 넣어 감아 엄지의 크기에 잘랐던 것이다.
이 킨바프에 무킴치와 이캄팀을 반찬으로 한다.
충무 김밥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김이 비교적 일반적인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 있다.
충무 킨바프를 만들 때, 그 당시 일반적인 상식인 밥에 초를 혼합하지 않고 밥만 싼 것은, 킨바프의 조리가 다양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일제 시대에도 식초 대신에 다른 조미를 하거나 조미를 하지 않는 킨바프가 존재한 가능성이 있다.
참고 자료
정기간행물 「부인이 알아 두는 춘철요리법(2)」. 동아일보(1930.03.06):5면사회.
정기간행물 「피크수용용」스시. 동아일보(1958.03.29):4면생활/문화.
정기간행물 「이주일의 요리」옛 쿄토의벼슬아치 신문(1976.04.14):사면 생활/문화.
정기간행물 「봄놀이 차비-야외 도시락」매일의 경제(1977.03.12):8면의 생활/문화.
집필자
캔·문소크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2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