関東大震災100年:日本の警察、1日夕刻から「朝鮮人が殺人・放火」と流言飛語をばらまいた
戒厳軍、翌日から朝鮮人の殺害を始める
日本の一部メディアもフェイクニュースに加担
1923年9月の関東大震災当時、「朝鮮人が混乱に乗じて攻撃してくる」という流言飛語は急速に広まり、その中心には日本政府と軍・警察がいた。
9月1日午前11時58分、マグニチュード7.9(推定)の大地震が東京・横浜など関東地方を襲い、10万人を超える人命被害が発生した。日本政府は、国民の不満を他にそらす工作を展開し始めた。山田昭次・立教大学名誉教授の研究によると、地震が起きた1日の夕刻から、日本の警察は「朝鮮人が殺人・放火をしている」という流言飛語をばらまいた。
翌2日、うわさは一段と急速に広がった。「朝鮮人が井戸に毒を入れた」「産業施設を破壊している」「略奪・暴行までやっている」という根拠のないうわさが、日本の軍人・警察官によって広められた。故・姜徳相(カン・ドクサン)在日韓人歴史資料館長は生前、9月2日午前10時の時点で一部地域の警察署長は「朝鮮人は殺してもよい」と公々然と発言していた、と明かした。
2日午後6時に戒厳令が宣布され、内務省警保局長後藤文夫の名義で「朝鮮人が各地で放火しており、爆弾を所持して石油をまく者がいるので厳しく取り締まるべき」という電文が全国に発せられた。実弾を持った戒厳軍が出動して東京や千葉などで朝鮮人を殺害し、退役軍人などからなる自警団が各地で組織され、街頭を闊歩(かっぽ)してほしいままに虐殺を行った。
軍・警察の電文を根拠に、一部メディアが作り出した「フェイクニュース」もまた、流言飛語の流布に加担した。『関東大震災「虐殺否定」の真相』の著者で元朝日新聞記者の渡辺延志氏の研究によると、9月3日発行の大阪朝日新聞は「朝鮮人が爆発物を持って石油缶を運び、放火しようとしている」と報じた。これは、同日午前に千葉県の海軍送信所から発信された電文によるものだった。4日付の名古屋新聞は「朝鮮人が列車爆破計画を自白した」と報じたが、その後、この事件に関する記録は全くない。
「朝鮮人暴動」の実体が明らかになると、日本政府は5日に臨時震災救護事務局警備部名義で「(朝鮮人が暴動を起こしたという)風説を徹底的に取調べ、之を事実として出来得る限り肯定することに努むること」という奇怪な決定を下した。自分たちがばらまいた流言飛語が事実であるかのように捏造(ねつぞう)し、虐殺の責任を隠蔽(いんぺい)しようというのだ。
しかしその後、司法省の調査で放火・殺人・強盗・強姦(ごうかん)などを働いたとされる朝鮮人120人のうち115人は「姓名不明」であって、残りは「所在不明」「逃亡」「死亡」だった。うわさの実体は全く存在しなかったのだ。
鄭在貞(チョン・ジェジョン)ソウル市立大学名誉教授は「今の日本で、ほとんどの良心的な人は『朝鮮人暴動』が捏造されたものだという真実を理解しているが、一部の極右勢力は依然としてあれは事実だったと主張する」とし「関東大震災のフェイクニュースがまだ流布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と語った。
관동 대지진 100년:일본의 경찰, 1 일 저녁각으로부터 「한국인이 살인·방화」라고 유언 비어를 뿌린
계엄군, 다음날부터 한국인의 살해를 시작한다
일본의 일부 미디어도 페이크 뉴스에 가담
1923년 9월의 관동 대지진 당시 , 「한국인이 혼란을 타 공격해 온다」라고 하는 유언 비어는 급속히 퍼져, 그 중심에는 일본 정부와 군·경찰이 있었다.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 매그니튜드 7.9(추정)의 대지진이 도쿄·요코하마 등 관동지방을 덮쳐, 10만명을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일본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그 밖에 딴 데로 돌리는 공작을 전개하기 시작했다.야마다 쇼우지·릿쿄 대학 학명예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지진이 일어난 1일의 저녁때부터, 일본의 경찰은 「한국인이 살인·방화를 하고 있다」라고 하는 유언 비어를 뿌렸다.
다음 2일, 소문은 한층 급속히 퍼졌다.「한국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있다」 「약탈·폭행까지 하고 있다」라고 하는 근거가 없는 소문이, 일본의 군인·경찰관에 의해서 넓힐 수 있었다.고 ·강덕상(강·드크산) 재일 한인 역사 자료관장은 생전, 9월 2일 오전 10시의 시점에서 일부 지역의 경찰서장은 「한국인은 죽여도 괜찮다」라고 공들연이라고 발언하고 있었다, 라고 밝혔다.
군·경찰의 전문을 근거로, 일부 미디어가 만들어 낸 「페이크 뉴스」도 또한, 유언 비어의 유포에 가담했다.「관동 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의 저자로 설날 아침 닛신문기자 와타나베연지씨의 연구에 의하면, 9월 3일 발행의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한국인이 폭발물을 가져 석유캔을 옮겨, 방화하려고 하고 있다」라고 알렸다.이것은, 동일 오전에 치바현의 해군 송신소로부터 발신된 전문에 의하는 것이었다.4 일자의 나고야 신문은 「한국인이 열차 폭파 계획을 자백했다」라고 알렸지만, 그 후,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후, 사법성의 조사에서 방화·살인·강도·강간(강간)등을 일했다고 여겨지는 한국인 120명중 115명은 「성명 불명」이며, 나머지는 「소재 불명」 「도망」 「사망」이었다.소문의 실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 재정(정·제이 존) 서울 시립대 학명예교수는 「지금의 일본에서, 대부분의 양심적인 사람은 「한국인 폭동」이 날조 된 것이라고 하는 진실을 이해하고 있지만, 일부의 극우 세력은 여전히 저것은 사실이었다고 주장한다」라고 해 「관동 대지진의 페이크 뉴스가 아직 유포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