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の独立に初めて言及した「カイロ宣言」…日本が占領した東南アジアはなぜ外れたのか
今年、韓国の歴史学界と政治学界の話題は停戦協定70周年、韓米同盟70周年だ。ウクライナ‐ロシア戦争が続き、北東アジア情勢が不安定な時点で、1953年に結ばれた停戦協定と韓米相互条約はその顕在的意味が絶対に小さくない。加えて我々がひとつ覚えておかなくてはならない事件がある。80年前の1943年12月に発表されたカイロ宣言だ。
◇「適切な過程」通じて独立が残したもの
カイロ宣言は米国のルーズベルト大統領、英国のチャーチル首相、そして中華民国の蒋介石総統が会して軍国主義日本の戦後処理問題の原則を決めた宣言だった。カイロ会談はヤルタ会談・ポツダム会談と共に第2次世界大戦中に行われた韓国に関する3大戦中会談の一つとして、中・高校国史問題の一つとしてよく出題された。
カイロ宣言は次の2つの点で注目された。1つ目は列強が韓国に対する独立を宣言した最初の宣言であり、ポツダム宣言につながって韓国の独立を可能にしたという点だ。2つ目は韓国を独立させるものの「適切な過程(in due course)」を経て独立させるという条項を挿入することによって信託統治論争を巻き起こす起源になったという点だ。
◇植民地・韓国の状況を列強に伝達
いつの間にかカイロ宣言をはじめとする戦中会談は忘れられた歴史になった。冷戦の出発点になったヤルタ会談も、日本の無条件降伏を再確認して戦後の領土問題をはじめとする日本の戦後処理問題と戦犯裁判を規定したポツダム宣言も記憶の中へ消えてしまった。しかし周囲を見る暇もなく刻々と変化していく国際秩序の中で、カイロ宣言の意味をもう一度振り返ってみる必要がある。
まず、カイロ宣言で最も注目すべき内容の一つは韓国を独立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を指摘した点だ。「朝鮮の人民の奴隷状態に留意(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するという部分だ。三一運動をはじめ、絶えず行われた韓国の独立運動は植民地韓国の状況を列強に正確に伝達することができた。
日本軍国主義者たちは当然この主張を一蹴した。日本は1943年大東亜会議を開催した。主に日本占領国家(フィリピン・ベトナム・ミャンマー・満州)の傀儡政府首脳を招待した。日本が占領したかったインド傀儡亡命政府指導者も招待した。日本は欧州や米国など西洋帝国主義を追い出してアジア的発展、そしてアジア人の自主権を取り戻さなければ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た。
◇大東亜共栄圏の虚像確認
韓国と台湾はそもそも招待すら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傀儡政府の代わりに日本総督府があった。日本軍国主義者たちは原材料供給基地として、東南アジアの占領を合理化するために、すでに英国と米国から独立を約束されたミャンマーとフィリピンには「ニンジン」政策で遠くない時期に独立を約束した反面、韓国と台湾に対しては独立自体に言及しなかった。
日本は第2次世界大戦で守勢に追い込まれると中立国を通じて2つのことを提案をした。日本は停戦または終戦するという条件で、天皇システムの維持、そして朝鮮と台湾の植民地維持を提示した。朝鮮と台湾を永久的に編入するために日本と朝鮮は一つという内鮮一体を主張する軍国主義者などの立場から「朝鮮の人々の奴隷状態」を受け入れなかった。
カイロとポツダムで日本の「無条件降伏」を決めた連合国は日本の提案を受け入れなかった。加えて韓国に対する永久的植民地政策はアジア人の自立を主張した大東亜共栄圏がどれほど虚像だったかをよく物語っている。このような虚像はその後「植民地近代化論」と結合されたたため、「奴隷状態」という言及が持つ重要な意味をもう一度考えてみることができる。
◇連合軍・西欧に対する配慮
カイロ宣言で韓国と台湾、そして満州を除いて他の地域について言及しなかった点も注目される。単に1914年第1次世界大戦の結果および日本の貪欲によって占領された地域だと通称した。ここには第1次大戦敗戦国ドイツから日本が譲り受けた中国の一部地域と北マリアナ諸島、そして1937年第2次日中戦争以降、日本が占領した東南アジア地域が含まれる。日本の大東亜共栄圏に属する核心地域だった。
満州侵略以降、国際連盟から脱退した日本は真珠湾襲撃直後、米国の経済封鎖危機から抜け出そうとベトナムやインドネシアの産油地域に進出した。この地域はゴムが生産されるマレーシアとともに日本軍国主義者たちの命綱だった。それでもこの地域を具体的に言及しなかったのは連合国だった西欧に対する考慮があった。
ドイツの占領下にあったフランスとオランダ、そして連合国の核心だった英国はどの国もアジアに植民地を有しており、第2次大戦を通じて日本によってインドを除いた植民地地域から追い出された状態だった。日本が崩壊するなら、この地域はどうなるだろうか。独立に続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はないか。しかし敗戦国の植民地だった韓国と過去欧州帝国の植民地だった国はそれぞれ異なる8月15日を迎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フランスとオランダの帰還
日本が崩壊したその場にフランスとオランダが再び復帰した。1945年8月15日は韓国にとっては日本帝国から解放された日だったが、ベトナムとインドネシアにはまた別の帝国に対する独立戦争が始まった日だった。ドイツの占領で大きな被害を受けたフランスとオランダには再建が必要だった。これらは植民地を再建の足掛かりとしようと考えた。
フランスとオランダ、そして日本から独立を勝ち取るために独立運動を展開した勢力にとってはあきれる結果に違いなかった。カイロ宣言に含まれた台湾も慌てた。日本占領者に反対した台湾原住民には清が出て行くと日本が入ってきて、日本が出て行くと国民党が入ってきた。清と国民党の公権力を比較したら日本のほうが良かったと判断することになった台湾の人々の考えも理解できる。
韓国の独立活動家にも不安な要素があった。独立を約束したことには感謝したが「適切な過程」が問題だった。1945年以前に委任統治をした地域が少なくなかった。敗戦国の植民地は帝国から抜け出したが、独立した地域もあり、再び委任統治地域に入った地域もあった。
ドイツからは脱したが再び日本の影響圏に入った南太平洋地域、オスマン帝国が崩壊して英国とフランスによって人為的に分離させられ、その影響圏下に入った中東や北アフリカ地域の姿は独立活動家が望んだ未来ではなかった。これらは未来が不確かな委任統治や信託統治に民族の将来を預け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徹底できなかった日本戦犯処罰
結果的に見るなら、日本崩壊以降の処理過程はカイロ宣言とポツダム宣言の内容通りに進んだ。日本が占領した地域と植民地から日本の公権力が撤収し、連合国に降参した。韓半島(朝鮮半島)分割占領を規定した一般命令第一号は日本軍を武装解除して降参を受けるための過程だった。
日本では東京裁判が進められた。しかしドイツのニュルンベルク裁判がそうだったように徹底した戦犯処罰には至らなかった。処罰までではないが戦争犯罪を犯した人々や戦争に同調した人々に自身の行動を振り返る機会を与えるべきだった。これを通じて、これ以上みじめな戦争が勃発し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カイロとポツダム精神の屈折
もちろん日本に対する民主化改革と戦争を再開できないようにする産業構造再編、再武装禁止などの政策が初期に実行されたのは確かだ。だが、冷戦体制が到来して日本とドイツを米国の最も重要な同盟国に復活させる政策への転換に移っていった。その結果、最も大きな被害国だった韓国と中国が参加しない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が結ばれた。ドイツは冷戦によって平和条約も結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
冷戦と脱冷戦を経たが、東アジアでサンフランシスコ体制が今も続いている。もちろん冷戦下で革命と熱戦を経験したのでカイロ宣言とポツダム宣言の内容と体制をそのまま継承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だろう。しかしこれ以上世界大戦のような悲劇があってはならないという精神は今でも継続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カイロ宣言とサンフランシスコ体制が同居していると言おうか。
強大国がアジアよりも欧州のほうを優先視した状況がカイロ宣言を作り出したとすれば、冷戦はサンフランシスコ体制の背景になった。脱冷戦時代を経て、21世紀の東アジアはどちらの方向に進むだろうか。80年経過した今でもカイロ宣言はすべての国家が自分たちの利害関係を優先するという国際政治の現実、そしてそれに対する冷徹な分析が必要だという点を教訓として与えている。
한국의 독립에 처음으로 언급한 「카이로 선언」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시아는 왜 빗나갔는지
금년, 한국의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의 화제는 정전협정 70주년, 한미 동맹 70주년이다.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계속 되어, 북동 아시아 정세가 불안정한 시점에서, 1953년에 연결된 정전협정과 한미 상호 조약은 그 현재적 의미가 절대로 작지 않다.더해 우리가 하나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이 있다.80년전의 1943년 12월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이다.
◇「적절한 과정」통하고 독립이 남긴 것
카이로 선언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화 민국의 장개석 총통이 모여 군국주의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의 원칙을 결정한 선언이었다.카이로 회담은 야르타 회담·포츠담 회담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중에 행해진 한국에 관한 3 대전중 회담의 하나로서, 중·고교 국사 문제의 하나로서 자주(잘) 출제되었다.
◇식민지·한국의 상황을 열강에 전달
어느새인가 카이로 선언을 시작으로 하는 전시중 회담은 잊을 수 있었던 역사가 되었다.냉전의 출발점이 된 야르타 회담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재확인해 전후의 영토 문제를 시작으로 하는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와 전범 재판을 규정한 포츠담 선언도 기억안에 사라져 버렸다.그러나 주위를 볼 틈도 없고 시시각각 변화해 나가는 국제 질서 중(안)에서, 카이로 선언의 의미를 한번 더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당연 이 주장을 일축 했다.일본은 1943년 대동아 회의를 개최했다.주로 일본 점령국가(필리핀·베트남·미얀마·만주)의 괴뢰 정부 수뇌를 초대했다.일본이 점령하고 싶었던 인도 괴뢰 망명 정부 지도자도 초대했다.일본은 유럽이나 미국 등 서양 제국주의를 내쫓아 아시아적 발전, 그리고 아시아인의 자주권을 되찾지 않으면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동아공영권의 허상 확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면 중립국을 통해서 2를 제안을 했다.일본은 정전 또는 종전한다고 하는 조건으로, 천황 시스템의 유지, 그리고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 유지를 제시했다.조선과 대만을 영구적으로 편입하기 위해서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하는 동안 센이치체를 주장하는 군국주의자등의 입장으로부터 「조선의 사람들의 노예 상태」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연합군·서구에 대한 배려
카이로 선언으로 한국과 대만, 그리고 만주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 도착해 언급하지 않았던 점도 주목받는다.단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및 일본의 탐욕에 의해서 점령된 지역이라고 통칭 했다.여기에는 제1차 대전 패전국 독일에서 일본이 양도한 중국의 일부 지역과 북쪽 마리아나 제도, 그리고 1937년 제 2차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시아 지역이 포함된다.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속하는 핵심 지역이었다.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와 네델란드, 그리고 연합국의 핵심이었던 영국은 어느 나라도 아시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어 제2차 대전을 통해서 일본에 의해서 인도를 제외한 식민지 지역으로부터 내쫓아진 상태였다.일본이 붕괴한다면, 이 지역은 어떻게 될까.독립에 계속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그러나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과거 유럽 제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는 각각 다른 8월 15일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귀환
프랑스와 네델란드,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차지하기 위해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 세력에 있어서는 질리는 결과가 틀림없었다.카이로 선언에 포함된 대만도 당황했다.일본 점령자에게 반대한 대만 원주민에게는 청이 나가면 일본이 들어 오고, 일본이 나가면 국민당이 들어 왔다.청과 국민당의 공권력을 비교하면 일본 쪽이 좋았다고 판단하게 된 대만의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독립 활동가에게도 불안한 요소가 있었다.독립을 약속했던 것에는 감사했지만 「적절한 과정」이 문제였다.1945년 이전에 위임통치를 한 지역이 적지 않았다.패전국의 식민지는 제국에서 빠져 나갔지만, 독립한 지역도 있어, 다시 위임통치 지역에 들어간 지역도 있었다.
◇철저하고 나무 없었던 일본 전범 처벌
결과적으로 본다면, 일본 붕괴 이후의 처리 과정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내용 대로에 진행되었다.일본이 점령한 지역과 식민지에서 일본의 공권력이 철수해, 연합국에 항복했다.한반도(한반도) 분할 점령을 규정한 일반 명령 제일호는 일본군을 무장해제 하고 항복을 받기 위한 과정이었다.
일본에서는 도쿄 재판이 진행되었다.그러나 독일의 뉘른베르크 재판이 그랬던 것 같게 철저한 전범 처벌에는 이르지 않았다.처벌까지는 아니지만 전쟁 범죄를 범한 사람들이나 전쟁에 동조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 볼 기회를 주어야 했다.이것을 통해서, 더 이상 비참한 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해야 했다.
◇카이로와 포츠담 정신의 굴절
냉전과 탈냉전을 거쳤지만, 동아시아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물론 냉전하에서 혁명과 열전을 경험했으므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내용과 체제를 그대로 계승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정신은 지금도 계속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카이로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동거하고 있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