戦前日本の領土には朝鮮半島や台湾が含まれていた。文化や風習に加えて行政システムの違いはあるにせよ、これらの地域は当時、関東地方や関西地方などといった地域区分と同じく、「朝鮮地方」「台湾地方」と呼ぶべき地域でもあった。
これら3“地方”は、日本本土からの移入文化として野球が浸透していた。
そして朝鮮と満洲は1921年の第7回大会で“デビュー”している。このときの予選参加校数は全国で207に過ぎない。2年遅れて台湾からも代表校が送られるようになった。
それから戦争により大会が中止されるまでの18大会、1940年の第26回大会まで3“地方”から代表が送られ続けている。このときの予選参加校数は617だった。
大連商業は甲子園ベスト4を経験、嘉義農林は準優勝を果たす
第7回大会に出場した大連商業(満洲)は何とベスト4に進出した。釜山商業(朝鮮)もベスト8だ。後者が負けた相手は、その年の優勝校だった。一方、第9回大会で初登場した台湾。台北一中は惜しくも初戦(1回戦シードで2回戦から)で敗退した。
当時の3“地方”は本土からの移住者も多く、朝鮮人や台湾人(当時は日本人だが)などといった現地人と日本人の混成チームが多かった。しかし実力的に本土と大きな開きがあったわけではなく、通算成績で台湾と満洲は3割7分以上、朝鮮も2割8分以上という記録を残している。ザックリいえば長崎県や石川県、秋田県などと同等レベルだ。
決して強豪ひしめく地域ではなかったものの、語り継がれる偉業を成し遂げた学校もあった。それが1931年の第17回大会に参加した台湾の嘉義農林で、決勝戦まで進み準優勝を果たしている。
전쟁 전 일본의 영토에는 한반도나 대만이 포함되어 있었다.문화나 풍습에 가세해 행정 시스템의 차이는 있다이든, 이러한 지역은 당시 , 관동지방이나 관서지방등이라고 하는 지역구분과 같이, 「조선 지방」 「대만 지방」이라고 불러야 할 지역이기도 했다.
이것들 3“지방”은, 일본 본토로부터의 이입 문화로서 야구가 침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과 만주는 1921년의 제7회 대회에서“데뷔”하고 있다.이 때의 예선 참가교수는 전국에서 207에 지나지 않는다.2년 늦어 대만으로부터도 대표교가 보내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의해 대회가 중지될 때까지의 18 대회, 1940년의 제26회 대회까지 3“지방”으로부터 대표가 계속 보내지고 있다.이 때의 예선 참가교수는 617이었다.
대련 상업은 코시엔 베스트 4를 경험, 요시노리 농림은 준우승을 완수한다
제7회 대회에 출장한 대련 상업(만주)은 뭐라고 베스트 4에 진출했다.부산 상업(조선)도 베스트 8이다.후자가 진 상대는, 그 해의 우승교였다.한편, 제9회 대회에서 첫등장 한 대만.타이뻬이1중은 아깝게도 초전(1회전 배정으로 2 회전으로부터)에서 패퇴했다.
당시의 3“지방”은 본토로부터의 이주자도 많아, 한국인이나 대만인(당시는 일본인이지만)등이라고 하는 현지인과 일본인의 혼성 팀이 많았다.그러나 실력적으로 본토와 큰 열림이 있던 것이 아니고, 통산 성적으로 대만과 만주는 3할 7푼이상, 조선도 2할 8푼이상이라고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작크리 말하면 나가사키현이나 이시카와현, 아키타현등과 동등 레벨이다.
결코 강호 북적거리는 지역은 아니기는 했지만, 구전되는 위업을 완수한 학교도 있었다.그것이 1931년의 제17회 대회에 참가한 대만의 요시노리 농림으로, 결승전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이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