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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政権、「児童輸出」で年間200億ウォン稼いだ”


[深層取材-韓国海外養子縁組65年] 2.養子縁組の政治経済学②(2)
チョン・ホンギヘ記者| 기사입력 2017.09.12. 00:16:05 最終수정 2017.09.12. 07:57:15

この記事は、国際人権法の専門家、ジェーン・チョン・トレンカ真実と和解のための海外養子縁組者の会代表の協力を得て取材・作成されました。


1970年代、「迷子」を「孤児」に偽装して海外に送り出す

1978年2月、慶尚北道慶山に住むチョン・シハクさん夫婦は長女のミファ(当時9歳)ちゃんを失った。いつもよく従順だった隣家のソモ(25歳)さんが連れ出した後、ミファちゃんは翌朝まで帰宅しなかった。チョンさん夫妻は管轄の竹島交番に行方不明届を出した。チョンさんは美花ちゃんが8歳の時に撮った写真100枚をコピーして警察に写真手配を依頼したが、警察は管内に写真をばら撒いただけで、捜査に熱意を示さなかった。その後、チョン氏が誘拐犯と推定されるソ氏のモンタージュを描いて全国に指名手配するよう要求すると、浦項警察署のある刑事は「ここがどこだと思って騒ぐのか」とチョン氏の頬を殴った。
 
父親のチョンさんは、私財を投じてミファさんの行方を追っていたところ、ソ氏が大邱刑務所で児童誘拐容疑で服役中であることを知り、刑事たちと一緒に彼を二度面会した。彼らはソ氏からミファちゃんを釜山南浦洞で引き離したという自白を受け、釜山を訪れ、南浦洞交番でミファちゃんを釜山市女性会館に送ったという事実を確認した。釜山市女性会館は釜山市社会課に送り、釜山市は美和ちゃんを一時保護所に収容した。 結局、チョンさんは美和ちゃんが誘拐されてから1年10日後の1979年2月18日、養子縁組機関である東方児童福祉会(現東方社会福祉会)を通じてアメリカ人の養父母に養子縁組されたことを知った。
 
さらに驚くべき事実は、東方児童福祉会には、美和 양이陳述した両親、兄弟など家族の名前と年齢、そして自宅の住所と家畜を飼っていることなどが正確に記載されていたことだ。東方社会福祉会は、美和さんの陳述で十分に両親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たにもかかわらず、海外養子縁組を行った。このすべての事実はチョンさんの粘り強い追跡で明らかになり、チョンさんが抗議すると、東方児童福祉会の職員は「私のお金で親を探す義務はないから、告発するならしてくれ」とむしろ大声を出したという。
 
上記の話は、1979年5月16日付<東亜日報>に掲載された記事(”誘拐された娘追跡1年3ヶ月...大人の不本意ですでに米国に養子縁組”)を要約したものだ。
 
似たような話が1975年10月5日、「朝鮮日報」にも報道された。”ひとり息子を返してください”というタイトルの記事によると、1974年6月1日、父親の職場に行った後、宿舎を出て行方不明になった4歳の金卓雲(キム・タクウン)子供は、当日、当該地域の交番を経て、警察署に直接移され、海外養子縁組機関である大韓社会福祉会大邱分室で保護された後、同年11月5日、「ペク・ジョンヒ」という名前でスウェーデンに養子縁組された。
 
上記の記事は、1970-80年代に迷子になった「迷子」がどのような過程を経て海外に養子縁組されるかを示す事例だ。警察は迷子になった子供の家を見つけようとする努力を全くせず、孤児院や養子縁組機関の保護施設に子供を送り、ここで子供は両親が生き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孤児」に偽装されて海外に養子縁組された。養子縁組されるまでの時間もわずか5-6ヶ月しかかからなかった。先の記事でも、養子縁組特例法が施行される2012年まで、孤児発見による単独戸籍(孤児戸籍)発行の数と海外養子縁組児童の数は驚くほど一致するという事実を指摘したことがある。(すぐ見る: [単独]外交部の嘘、米国「一部の韓国養子縁組児は自動市民権を受けられない」)




年度別「飢餓発見」と「国外養子縁組」児童数の比較(出典: <国際養子縁組における子どもの権利の国際法的保護>、イ・ギョンウン、ソウル大学校法学科博士論文、2017)

北朝鮮の非難”貧しい韓国の唯一の輸出品は赤ちゃん”
 
朴正煕政権が1961年に作った孤児養子縁組特例法で法的根拠を作った海外養子縁組は1970-80年代に爆発的に増加した。1950年代、戦争孤児を救済するための一時的な措置という名目で始まった海外養子縁組は「制度化」され、韓国が社会経済的に発展した後も続いた。韓国は国家的な支援と保護が必要な児童を海外に送りながら、これらの児童を自ら世話し、保護するために必要な福祉システムを構築することは怠った。 (Sarri, Baik & Bombyk, “韓国と米国の国際養子縁組における目的変異と依存性”, 1998)  
 
特に、韓国出身養子縁組者の2/3以上が米国に養子縁組されたという点で、海外養子縁組はまた、米国のもう一つの「援助」であった。1970年代半ばから80年代後半の間に米国に養子縁組される児童の20-30%が韓国児童であった。 (Kane S., “認識論的観点から見た国際養子縁組における児童の移動”, 1993)今日、韓国系アメリカ人のうち、韓国人養子縁組者が占める割合は10%に達する(しかし、養子縁組者は米国内の韓国人コミュニティに容易に組み込まれない。韓国出身の児童は、韓国の養子縁組機関と協力する米国内の養子縁組機関を通じて、ミネソタ、ニューヨーク、ミシガンなど7つの州に主に養子縁組される。これらの地域は在日コリアンの割合が高くない。 また、養子縁組者は成人するまで白人中産階級の家庭で育つため、韓国の言語、文化、情緒などを習得できない).
 
朴正煕政権は1970年代初頭、北朝鮮の海外養子縁組に対する非難で、一時は海外養子縁組の中止を政策目標に掲げたこともあった。当時、北朝鮮は「韓国が経済的利益を得るために赤ちゃんを欧米人に売っており、貧しい韓国が輸出できる商品は子供だけだ」と猛烈に非難した。 (イ・サムドル, <海外養子と韓国の民族主義>, 2008)北朝鮮も韓国戦争後、孤児をソ連と東欧諸国に委託養育や施設保護のために送ったが、この時、教師が児童と同行し、後に彼らは北朝鮮に戻ったという。北朝鮮の非難に朴正煕政権は1976年に養子縁組特例法を作り、国内養子縁組を活性化しようとした。朴正煕政権は国内養子縁組活性化5ヵ年計画を策定し、養子縁組機関に国内養子縁組の数に比例して海外養子縁組の数を配分する割当制を導入した。 また、毎年国内養子縁組を10%ずつ増やし、1985年には海外養子縁組を中止するという計画も立てた。

 
しかし、海外養子縁組割当制度は導入2年後に破綻するなど、朴正煕政権の「海外養子縁組中断」計画は宣言にとどまった。北朝鮮の非難に立ち向かうという政治的要求よりも、当面の経済発展のために福祉費用を最小化しようとする経済的要求が大きかった。孤児院など児童保護施設に送られていた海外援助も1970年代以降減少した。朴正煕政府は財政を投入して児童保護施設を増やしたり、ひとり親家庭など脆弱な家庭を支援する方策の代わりに海外養子縁組を選択したのだ。

特に海外養子縁組は、養父母から少なからずの手数料まで取る「二重の経済的利益」をもたらす事業だった。朴正煕政府は1967年、孤児養子縁組特例法を改正し、海外養子縁組業務は政府から許可を受けた機関でのみ行うことを明記し、関連費用は養父母に請求するようにした。これに伴い、1964年に大韓社会福祉会、1971年に東方児童福祉会(1972年から養子縁組事業開始)が設立され、養子縁組機関を通じた海外養子縁組は、一種の児童福祉システムとして位置づけられ始めた。1960年代、養子縁組機関から養父母に1人当たり130ドル程度が支払われたという。1965年の韓国の1人当たりGDPが106ドルに過ぎなかった。






チョン・ドゥファン政権「養子縁組は移民活性化と民間外交
 
朴正煕政権で制度化された海外養子縁組は、全斗煥政権下で急増した。 北朝鮮など外部の視線を意識した朴正煕政権とは異なり、全斗煥政権は「移民拡大と民間外交」という名目で海外養子縁組を大幅に増やした。 (Sarri, Baik & Bombyk, 1998)その結果、1980年代の韓国児童の海外養子縁組は最高潮に達し、10年の間になんと6万5511人の児童が海外に養子縁組された(保健福祉部統計)。 特に一年に8000人を超える児童が海外に養子縁組された1985年(8837人)と1986年(8680人)を含め、1984年から1988年までの5年間は、一年間に生まれた総出生児のうち1%を超える児童が海外に養子縁組された。




韓国女性政策研究院、「韓国の未婚母福祉に関する研究:海外養子縁組、関連統計、先進国の福祉政策を中心に」、2009 から再引用






年度別海外養子縁組児の割合(%)




この時期にも米国への養子縁組が絶対多数を占める傾向は続いた。1976-1981年には韓国の養子縁組者が米国全体の海外養子縁組の50%を占め、1986年に米国に養子縁組された韓国出身の養子縁組者は6188人で米国全体の海外養子縁組の59%に達した。1980年代後半、駐韓米国大使館で韓国児童の米国養子縁組のためのビザ発給を担当していた米国INSの移民ビザ担当領事であるロバート・アークマン氏は、韓国で養子縁組が「ビジネス」になってしまったと診断した。彼は1988年、米国の「プログレッシブ」とのインタビューで「月に500人の赤ちゃんは、単に人道的な理由だけでは説明できない過度に多い数だ。人道主義が止まり、事業が始まる地点がどこなのか問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話した。
 
米メディア「1980年代、韓国の児童1人当たり5000ドル、年間児童輸出で2000万ドル稼いだ




米月刊誌「プログレッシブ」1988年1月号の表紙。




米国の進歩的な月刊誌「プログレッシブ」は1988年1月のカバーストーリーで韓国の海外養子縁組について取り上げた。”赤ちゃん売買-韓国が赤ちゃんを作り、米国がそれらを買う”というタイトルの記事は、月に数百人が海外に養子縁組される韓国の実態を詳しく紹介した。
 

この記事は、養子縁組機関は養父母から児童1人当たり5000ドルを受け取っており、韓国が海外養子縁組で稼ぐお金は1年に1500万-2000万ドルに達すると報じた。児童1人の合計養子縁組費用が5000ドルを基準にすると、8837人の児童が海外に養子縁組された1985年に合計4418万ドルほどのお金が養子縁組を媒介に韓国に流入したという計算になる。

また<プログレッシブ>の記事は、韓国政府が事実上「準政府機関」である養子縁組機関に養子縁組業務を任せ、政策的利益を享受していると批判する。

”海外養子縁組は政府に多くの目的を提供する。まず、彼らは年間約1500万ドルから2000万ドル程度のお金をもたらします。第二に、政府は(彼らにとっては予算の浪費と言える)子供たちの世話をする費用を軽減してくれる。第三に、韓国政府の強迫観念である人口コントロールを助ける。最後に、海外養子縁組は孤児と捨てられた子供たちをどうするかという難しい社会問題も解決する。”
 
同年、「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にも韓国の海外養子縁組を批判する記事が掲載された。
 
”アジアの新興工業国であり、88年のオリンピック開催国である韓国は、政府の密やかな支援の下、毎年6000人ほどの子どもをアメリカの家庭に養子縁組しており、アメリカの家庭に養子縁組される外国人子どもの59%が韓国出身である。”

1986年のアジア大会、1988年のオリンピックをきっかけに、「オリンピックまで誘致するほど目覚ましい経済発展を遂げた国が、貧しくて子どもを育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海外に養子を送る」という矛盾を指摘する外国メディアの報道が相次いだ。このような報道の影響で、国内メディアでも「毎年8千人...”孤児輸出”世界1位」(<京郷新聞>、1989年1月30日)、「赤ちゃん輸出1位の汚名、洗い流せないのか」(<ハンギレ>、1989年2月10日)などの批判報道が続いた。

 
国内外メディアの批判報道が88年オリンピック前後で続くと、政府は養子縁組事業改善指針を策定した。これにより、1986年にピークを迎えた海外養子縁組児童数はわずか3年後の1989年に4191人と半分以下に減少した。1年後の1990年には2962人と再び半分近く減少した。 その間、出産率が急激に低下したわけでもないのに、わずか4年で海外養子縁組児童の数が3分の1水準に落ちるという、もう一つの「漢江の奇跡」が起きたことになる。これはつまり、必要以上に多くの子どもを海外に養子に出したということだ。
 
チョン・ドゥファン政権時代に「移民活性化」の一環として奨励された海外養子縁組は、「児童輸出国」という汚名で国家イメージを失墜させたため、ノ・テウ政権になって再び政策の方向性が変わった。1989年、海外養子縁組を減らすために国内養子縁組を増や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国内養子縁組のための「聖家庭養子縁組院」が設立された。 また、ノ・テウ政府は混血児や障害児を除く児童の海外養子縁組を1996年までに中止するという計画を立てた。外務省が1990年に国会に提出した国政監査資料によると、毎年4000人余りに達する海外養子縁組者数を1995年まで1年に10-20%ずつ削減し、1996年以降は完全に中止する計画だと明らかにした。
 
しかし、この計画は金泳三政権の1995年、国内養子縁組数が不足しているという理由で廃棄された。代わりに金泳三政府は、国内養子縁組家庭に住宅分譲500-1000万ウォンの割増支援、障害児養子縁組家庭に養育補助手当及び医療費支援など、国内養子縁組活性化政策を展開した。しかし、1997年のIMF危機で海外養子縁組は再び微増した。
 

(この記事は▲イ・ギョン(法学博士)の「国際養子縁組における子どもの権利の国際法的保護」(ソウル大学校2017年博士号論文)、▲韓国女性政策研究院、「韓国の未婚母福祉に対する研究:海外養子縁組、関連統計、先進国の福祉政策を中心に」(2009)、二つの文章を参考にしました)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67856#0DKU

(機械翻訳)


おまけ

韓国で出生届なき「消えた子供」2000人超 ネットの闇売買や殺害・遺棄次々判明 - 産経ニュース

https://www.sankei.com/article/20230708-OINPZIEZCFMM3LZV6IYSIDK2LA/


(재게) 근대에 있어서의 한국의 Mabiki

전두환 정권, 「아동 수출」로 연간 200억원 번”


[심층 취재-한국 해외 양자 결연 65년] 2.양자 결연의 정치 경제학②(2)
정·혼기헤 기자| 2017.09.12. 00:16:05 최종 2017.09.12. 07:57:15

이 기사는, 국제인권법의 전문가, 제인·정·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양자 결연자의 회 대표의 협력을 얻어 취재·작성되었습니다.


1970년대, 「미아」를 「고아」에게 위장하고 해외에 내보낸다

1978년 2월, 경상북도 케이잔에 사는 정·시하크씨부부는 장녀의 미파(당시 9세) 를 잃었다.언제나 잘 온순했던 인가의 소모(25세)씨가 데리고 나간 후, 미파 는 이튿날 아침까지 귀가하지 않았다.정씨부부는 관할의 타케시마 파출소에 행방 불명계를 보냈다.정씨는 미화가 8세 때에 찍은 사진 100매를 카피해 경찰에 사진 준비를 의뢰했지만, 경찰은 관내에 사진을 장미 뿌린 것만으로, 수사에 열의를 나타내지 않았다.그 후, 정씨가 유괴범과 추정되는 소씨의 몽타쥬를 그려 전국에 지명 수배하도록 요구하면, 포항 경찰서가 있는 형사는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떠드는 것인가」라고 정씨의 뺨을 때렸다.

부친 정씨는, 사재를 투자해 미파씨의 행방을 쫓고 있던 참, 소씨가 대구 형무소에서 아동 유괴 용의로 복역중인 것을 알아, 형사들과 함께 그를 두 번 면회했다.그들은 소 씨한테서 미파 를 부산 남포동으로 갈라 놓았다고?`「자백을 받고 부산을 방문해 남포동 파출소에서 미파 를 부산시 여성 회관에 보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했다.부산시 여성 회관은 부산시 사회과에 보내, 부산시는 미와를 일시 보호소에 수용했다. 결국, 정씨는 미와가 유괴되고 나서 1년 10일 후의 1979년 2월 18일, 양자 결연 기관인 동방 아동복지회(현동방 사회 복지회)를 통해서 미국인의 양부모에게 양자 결연 된 것을 알았다.

한층 더 놀랄 만한 사실은, 동방 아동복지회에는, 미와 진술한 부모님, 형제 등 가족의 이름과 연령, 그리고 자택의 주소와 가축을 기르고 있는 것등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던 것이다.동방 사회 복지회는, 미와씨의 진술로 충분히 부모님을 찾아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양자 결연을 실시했다.이 모든 사실은 정씨의 끈질긴 추적으로 밝혀져, 정씨가 항의하면, 동방 아동복지회의 직원은 「 나의 돈으로 부모를 찾을 의무는 없기 때문에, 고발한다면 해 줘」라고 오히려 큰 소리를 냈다고 한다.

상기의 이야기는, 1979년 5월 16 일자<동아일보>에 게재된 기사(”유괴된 딸(아가씨) 추적 1년 3개월...어른의 본의가 아닙니다로에 미국에 양자 결연”)를 요약한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1975년 10월 5일, 「조선일보」에도 보도되었다.”혼자 아들을 돌려주세요”라고 하는 타이틀의 기사에 의하면, 1974년 6월 1일, 부친의 직장에 간 후, 숙소를 나와 행방 불명이 된 4세의 금탁운(김·타크운) 아이는, 당일, 해당 지역의 파출소를 거치고, 경찰서에 직접 옮겨져 해외 양자 결연 기관인 대한 사회 복지회 대구 분실에서 보호된 후, 동년 11월 5일, 「페크·젼히」라고 하는 이름으로 스웨덴에 양자 결연 되었다.

상기의 기사는,1970-80연대에 미아가 된 「미아」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해외에 양자 결연 되는지를 나타내는 사례다.경찰은 미아가 된 아이의 집을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고아원이나 양자 결연 기관의 보호 시설에 아이를 보내, 여기서 아이는 부모님이 살아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고아」에게 위장되어 해외에 양자 결연 되었다.양자 결연 될 때까지의 시간도 불과5-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앞의 기사에서도, 양자 결연 특례법이 시행되는 2012년까지, 고아 발견에 의한 단독 호적(고아 호적) 발행의 수와 해외 양자 결연 아동의 수는 놀라울 정도 일치한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이 있다.(곧 본다: [단독]외교부의 거짓말, 미국 「일부의 한국 양자 결연아는 자동 시민권을 받을 수 없다」)




연도별 「기아 발견」과「국외 양자 결연」아동수의 비교(출전: <국제 양자 결연에 있어서의 아이의 권리의 국제법적 보호>, 이·골운, 서울 대학교 법학과박사 논문, 2017)

북한의 비난”궁핍한 한국의 유일한 수출품은 아기”

박정희 정권이 1961년에 만든 고아 양자 결연 특례법으로 법적 근거를 만든 해외 양자 결연은1970-80연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1950년대, 전쟁 고아를 구제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라고 하는 명목으로 시작된 해외 양자 결연은 「제도화」되어 한국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한 후도 계속 되었다.한국은 국가적인 지원과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해외에 보내면서, 이러한 아동을 스스로 돌봐,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게을리했다. (Sarri, Baik & Bombyk, “한국과 미국의 국제 양자 결연에 있어서의 목적 변이와 의존성”, 1998)

특히, 한국 출신 양자 결연자의2/3이상이 미국에 양자 결연 되었다고 하는 점으로, 해외 양자 결연은 또, 미국의 또 하나의 「원조」였다.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의 사이에 미국에 양자 결연 되는 아동의20-30%가 한국 아동이었다. (Kane S.,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국제 양자 결연에 있어서의 아동의 이동”, 1993) 오늘, 한국계 미국인 가운데, 한국인 양자 결연자가 차지하는 비율은10%에 이른다(그러나, 양자 결연자는 미국내의 한국인 커뮤니티에 용이하게 짜넣어지지 않다.한국 출신의 아동은, 한국의 양자 결연 기관과 협력하는 미국내의 양자 결연 기관을 통해서, 미네소타, 뉴욕, 미시간 등 7개의 주에 주로 양자 결연 된다.이러한 지역은 재일 코리안의 비율이 높지 않다. 또, 양자 결연자는 성인 할 때까지 백인 중산계급의 가정에서 자라기 위해, 한국의 언어, 문화, 정서등을 습득할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초두, 북한의 해외 양자 결연에 대한 비난으로, 한때는 해외 양자 결연의 중지를 정책 목표로 내건 적도 있었다.당시 , 북한은 「한국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아기를 구미인에 팔고 있어 궁핍한 한국을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은 아이 뿐이다」라고 맹렬하게 비난 했다. (이·샘 달러, <해외 양자와 한국의 민족주의>, 2008) 북한도 한국전쟁 후, 고아를 소련과 동구 제국에 위탁 양육이나 시설 보호를 위해서 보냈지만, 이 때, 교사가 아동과 동행해, 후에 그들은 북한으로 돌아왔다고 한다.북한의 비난에 박정희 정권은 1976년에 양자 결연 특례법을 만들어, 국내 양자 결연을 활성화 하려고 했다.박정희 정권은 국내 양자 결연 활성화 5개년 계획을 책정해, 양자 결연 기관에 국내 양자 결연의 수에 비례해 해외 양자 결연의 수를 배분하는 할당제를 도입했다. 또, 매년 국내 양자 결연을 10%두개 늘려, 1985년에는 해외 양자 결연을 중지한다고 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해외 양자 결연 할당 제도는 도입 2년 후에 파탄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해외 양자 결연 중단」계획은 선언에 머물렀다.북한의 비난으로 향한다고 하는 정치적 요구보다, 당면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복지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경제적 요구가 컸다.고아원 등 아동 보호 시설에 보내지고 있던 해외 원조도 1970년대 이후 감소했다.박정희 정부는 재정을 투입해 아동 보호 시설을 늘리거나 혼자 친가뜰 등 취약한 가정을 지원하는 방책 대신에 해외 양자 결연을 선택했던 것이다.

특히 해외 양자 결연은, 양부모로부터 많이의 수수료까지 받는 「이중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사업이었다.박정희 정부는 1967년, 고아 양자 결연 특례법을 개정해, 해외 양자 결연 업무는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기관에서만 실시하는 것을 명기해, 관련 비용은 양부모에게 청구하도록(듯이) 했다.이것에 수반해, 1964년에 대한 사회 복지회, 1971년에 동방 아동복지회(1972년부터 양자 결연 사업 개시)가 설립되어 양자 결연 기관을 통한 해외 양자 결연은, 일종의 아동복지 시스템으로서 자리 매김되기 시작했다.1960년대, 양자 결연 기관으로부터 양부모에게 1 인당 130 달러 정도가 지불되었다고 한다.1965년의 한국의 1 인당 GDP가 106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정·두판 정권 「양자 결연은 이민 활성화와 민간 외교

박정희 정권으로 제도화된 해외 양자 결연은, 전두환 정권하에서 급증했다. 북한 등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박정희 정권과는 달라, 전두환 정권은 「이민 확대와 민간 외교」라고 하는 명목으로 해외 양자 결연을 큰폭으로 늘렸다. (Sarri, Baik & Bombyk, 1998) 그 결과, 1980년대의 한국 아동의 해외 양자 결연은 최고조에 이르러, 10년간에 무려 6만 5511명의 아동이 해외에 양자 결연 되었다(보건복지부 통계). 특히 일년에 8000명을 넘는 아동이 해외에 양자 결연 된 1985년(8837명)과 1986년(8680명)을 포함해 1984년부터 1988년까지의 5년간은, 1년간에 태어난 총출동생아중 1%를 넘는 아동이 해외에 양자 결연 되었다.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 「한국의 미혼어머니 복지에 관한 연구:해외 양자 결연, 관련 통계, 선진국의 복지정책을 중심으로」, 2009 로부터 재인용






연도 벳카이외 양자 결연아의 비율(%)




이 시기에도 미국에의 양자 결연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경향은 계속 되었다.1976-1981해에는 한국의 양자 결연자가 미국 전체의 해외 양자 결연의50%를 차지해 1986년에 미국에 양자 결연 된 한국 출신의 양자 결연자는 6188명이서 미국 전체의 해외 양자 결연의59%에 이르렀다.1980년대 후반, 주한미국 대사관에서 한국 아동의 미국 양자 결연을 위한 비자 발급을 담당하고 있던 미국 INS의 이민 비자 담당 영사인 로버트·아크 맨씨는, 한국에서 양자 결연이 「비즈니스」가 되어 버렸다고 진단했다.그는 1988년, 미국의 「프로그래시브」라는 인터뷰로 「한달에 500명의 아기는, 단지 인도적인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도하게 많은 수다.인도주의가 멈추어, 사업이 시작되는 지점이 어디인가 묻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했다.

미국의 미디어 「1980년대, 한국의 아동 1 인당 5000 달러, 연간 아동 수출로 2000만 달러 벌었다




미 월간지 「프로그래시브」1988년 1월호의 표지.




미국의 진보적인 월간지 「프로그래시브」는 1988년 1월의 커버 스토리로 한국의 해외 양자 결연에 대해 채택했다.”아기 매매-한국이 아기를 만들어, 미국이 그것들을 산다”라고 하는 타이틀의 기사는, 한달에 수백명이 해외에 양자 결연 되는 한국의 실태를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 기사는, 양자 결연 기관은 양부모로부터 아동 1 인당 5000 달러를 받고 있어 한국이 해외 양자 결연으로 버는 돈은 1년에 1500만-2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알렸다.아동 1명의 합계 양자 결연 비용이 5000 달러를 기준으로 하면, 8837명의 아동이 해외에 양자 결연 된 1985년에 합계 4418만 달러 정도의 돈이 양자 결연을 매개에 한국에 유입했다고 하는 계산이 된다.

또<프로그래시브>의 기사는, 한국 정부가 사실상 「 준정부 기관」인 양자 결연 기관에 양자 결연 업무를 맡겨 정책적 이익을 향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해외 양자 결연은 정부에 많은 목적을 제공한다.우선, 그들은 연간 약 15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 정도의 돈을 가져옵니다.2번째로, 정부는(그들에게 있어서는 예산의 낭비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을 돌보는 비용을 경감해 준다.제3에, 한국 정부의 강박 관념인 인구 컨트롤을 돕는다.마지막으로, 해외 양자 결연은 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어려운 사회 문제도 해결한다.”

동년, 「뉴욕 타임즈」에도 한국의 해외 양자 결연을 비판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이며, 88년의 올림픽 개최국인 한국은, 정부의 은밀한 지원아래, 매년 6000명 정도의 아이를 미국의 가정에 양자 결연 있어, 미국의 가정에 양자 결연 되는 외국인 아이의59%가 한국 출신이다.”

1986년의 아시아 대회, 1988년의 올림픽을 계기로, 「올림픽까지 유치할 만큼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궁핍해서 아이를 기를 수 없으면 해외에 양자를 보낸다」라고 하는 모순을 지적하는 외국 미디어의 보도가 잇따랐다.이러한 보도의 영향으로, 국내 미디어에서도 「매년 8천명...”고아 수출”세계 1위」(<옛 쿄토의벼슬아치 신문>, 1989년 1월 30일), 「아기 수출 1위의 오명, 씻어 흘릴 수 없는 것인가」(<한기레>, 1989년 2월 10일)등의 비판 보도가 계속 되었다.


국내외 미디어의 비판 보도가 88년 올림픽 전후로 계속 되면, 정부는 양자 결연 사업 개선 지침을 책정했다.이것에 의해, 1986년에 피크를 맞이한 해외 양자 결연 아동수는 불과 3년 후의 1989년에 4191명과 반이하에 감소했다.1년 후의 1990년에는 2962명과 다시 반 가깝게 감소했다. 그 사이, 출산율이 급격하게 저하한 것도 아닌데, 불과 4년에 해외 양자 결연 아동의 수가 3분의 1 수준에 떨어진다고 하는, 또 하나의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된다.이것은 즉, 필요이상으로 많은 아이를 해외에 양자에게 냈다고 하는 것이다.

정·두판 정권 시대에 「이민 활성화」의 일환으로서 장려된 해외 양자 결연은, 「아동 수출국」이라고 하는 오명으로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켰기 때문에, 노·태우 정권이 되어 다시 정책의 방향성이 바뀌었다.1989년, 해외 양자 결연을 줄이기 위해서 국내 양자 결연을 늘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국내 양자 결연을 위한 「성가정 양자 결연원」이 설립되었다. 또, 노·태우 정부는 혼혈아나 장해아를 제외한 아동의 해외 양자 결연을 1996년까지 중지한다고 할 계획을 세웠다.외무성이 1990년에 국회에 제출한 국정 감사 자료에 의하면, 매년 4000명 남짓에 달하는 해외 양자 결연자수를 1995년까지 1년에10-20% 두개삭감해, 1996년 이후는 완전하게 중지할 계획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김영삼 정권의 1995년, 국내 양자 결연수가 부족하다고 하는 이유로 폐기되었다.대신에 김영삼 정부는, 국내 양자 결연 가정에 주택 분양500-1000만원의 할증 지원, 장해아 양자 결연 가정에 양육 보조 수당 및 의료비 지원 등, 국내 양자 결연 활성화 정책을 전개했다.그러나, 1997년의 IMF 위기로 해외 양자 결연은 다시 미증 했다.


(이 기사는▲이·골(법학 박사)의 「국제 양자 결연에 있어서의 아이의 권리의 국제법적 보호」(서울 대학교 2017년 박사 학위 논문),▲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 「한국의 미혼어머니 복지에 대한 연구:해외 양자 결연, 관련 통계, 선진국의 복지정책을 중심으로」(2009), 두 개의 문장을 참고로 했습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67856#0DKU

(기계 번역)


한국에서 출생 신고없는 「사라진 아이」2000명초넷의 어둠 매매나 살해·유기 차례차례 판명 - 산케이 뉴스

https://www.sankei.com/article/20230708-OINPZIEZCFMM3LZV6IYSIDK2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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