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q 23-08-06 02:32
参照で追加すれば三国志記録は倭にある
30国 向こうの消息はわからない. と言及しているのに, その頃の東北地域は 毛人の領土だから, 中部あるいは関東にあったと考えられる
狗奴国とその隣近関東地域の 倭までに, 消息が触れてと言及していることと考えられる.
そして三国志記録を見れば, 当時 邪馬台国がもう 倭の大部分を占めていたし, 彌生, 古墳時代は関東地域の人口密度が低い方だったから, 人口が記録されない国々の人口をもっと高く推正すると言っても, スレッドに書いていることで特に違わないだろう.
colin mcevedyや 鬼頭宏の前近代日本人口推定でも当時日本の人口を 70万人 三国志記録近くで推正するから特に違うことがない. 私見ではスレッドに書いていることのように70万人よりは 90万人に近かったはずだと思う.
朴方龍
国立慶州博物館
『三国遺事』 の ‘十七万八千九百三十六戸” は戸数ではなく、 人口とみなした方がより妥当であると思われる。
朝鮮半島の人口は、 高麗時代の末32万(320万?)程度であったとされている。
以下最近の研究者による日本の推定人口をまとめる。これによると日本の人口が1000万人を越えたのは中世後期、早くとも15世紀以降と考えられる。
bibimbap 23-08-11 21:58
https://www.kjclub.com/jp/board/exc_board_9/view/id/3710489
当時の社会構成は支配者と奴隷から成る農業中心の原始社会であった。もともと朝鮮半島は気候が不順であったし、支配者は誅税しか興味を示さず農業生産力は低迷し、しばしば飢饉が発生し多数の餓死者がでた。 さらに鎖国政策をとってきた
稲作中心の家族農業形態をとっていたが、女子は労働に参加する習慣がなく、 労働力は成人男子 だけであった。
参考
https://www.kjclub.com/jp/board/exc_board_9/view/id/3707564
この後漢書の戸数を文字通り捉える研究者はいませんし、三國遺事の数字を参照するのが韓国のまともな研究者です。
その上で、考古学的調査の結果や同時代の他国を踏まえて、慶州100万人と言ってるまともな人口学者はいませんwww
booq 23-08-06 02:32
참조로 추가하면 삼국지 기록은 야마토에 있다
30국 저 편의 소식은 모른다. (와)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무렵의 토호쿠 지역은 모인의 영토이니까, 중부 있다 있어는 관동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나노쿠니와 그 인근 관동 지역의 야마토까지, 소식이 접해와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 기록을 보면, 당시 사마일국이 이제(벌써) 야마토의 대부분을 차지해, 미생, 고분 시대는 관동 지역의 인구밀도가 낮은 분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기록되지 않는 나라들의 인구를 더 높고 추정 한다고 말해도, 스렛드에 쓰고 있는 것으로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colin mcevedy나 키토우굉의 전근대 일본인구 추정에서도 당시 일본의 인구를 70만명 삼국지 기록 근처에서 추정 하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사견에서는 스렛드에 쓰고 있는 것과 같이70만명부터는 90만명에게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방용
국립경주박물관
「삼국유사」의 17만8천9백 36호" 는 호수가 아니고, 인구로 간주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라고 생각된다.
한반도의 인구는, 고려시대말 32만(320만?)정도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하 최근의 연구자에 의한 일본의 추정 인구를 정리한다.여기에 따른일본의 인구가1000만명을 넘은 것은중세 후기, 빨리와도 15 세기 이후라고 생각할 수 있다.
bibimbap 23-08-11 21:58
https://www.kjclub.com/jp/board/exc_board_9/view/id/3710489
당시의 사회 구성은 지배자와 노예로부터 완성되는 농업 중심의 원시 사회였다.원래 한반도는 기후가 불순했고 , 지배자는 주세 밖에 흥미를 나타내지 않고 농업 생산력은 침체해, 자주 기근이 발생해 다수의 아사자가 나왔다. 한층 더 쇄국 정책을 취해 온
벼농사 중심의 가족 농업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노동에 참가하는 습관이 없고, 노동력은 성인 남자 뿐이었다.
참고
https://www.kjclub.com/jp/board/exc_board_9/view/id/3707564
이 후한서의 호수를 문자 그대로 파악하는 연구자는 없고, 삼국유사의 숫자를 참조하는 것이 한국의 착실한 연구자입니다.
그 위에, 고고학적 조사의 결과나 동시대의 타국을 근거로 하고, 경주 100만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착실한 인구 학자는 없습니다 w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