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経済 PositiveNegativeFreeStyleArguments

    1  民主社会が当事者となる正しい戦争の目標は、諸民衆の間(とりわけ敵との間) に成立すべき正しくかつ永続的な平和である


    2  民主社会の戦争相手国は、民主的ではない国家である。このことは、民主的な民衆は相互に戦争を起こさないという事実から帰結する。


    3  戦争を遂行する上で、民主社会は三つの集団 (1)相手国の指導者と要職者、(2) 兵士たち (3) 非戦闘員である住民 、を注意深く区別しなければならない。


    4  民主社会は、相手国の非戦闘員、兵士の人権を尊重しなければならない。二つの理由がある。1)万民法に基づいて、民間人・兵士ともに人権を有しているから。2)戦時においても人権が効力を有するという実例を自ら率先することで敵国に人権を教えるべきだから。


    5  軍事行動と(交戦国や国際社会に対する)声明において正義を自負できる民衆は、自分たちが目標とする平和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るか、自分たちが求める国際関係はどのようなものなのかについて、戦争中においてあらかじめ示すべきである。


    6  戦争目的を達成するための軍事行動や政策が適切かどうかを判定するための思考様式は、つねに上述の五原理の枠内で構成され、これらの原理によって厳格に限定される。



次に広島と東京大空襲に目を向けると、どちらも極度の危機という免責事項に該当しないことがわかる。

その一つの側面は、(仮に)絶対的な権利(いかなる状況においても尊重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権利)が存在しない以上、空爆によって民間人を直接攻撃できる場合が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


(中略)



しかし、(略)、対日戦争においてアメリカが極端な危機免責を受けたことは一度もなかったことは明らかである。戦争遂行の原則は常に適用されたのである。

実際、広島の場合、政府の上層部に携わる多くの人々が、原爆投下が疑わしいものであり、限度を超えていることを認識していた。しかし、1945年6月から7月にかけて連合国首脳が行った討議では、現実的な手段端的な理性の重みが勝利をもたらした。戦争という継続的な重圧のもとでは、道徳的な疑念は明確な見解を得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戦争が進むにつれて、ベルリンや東京などの首都で行われた民間人への激しい火炎放射は、連合国側でも次第に受け入れられるようになった。

開戦後、ルーズベルトは民間人への原爆投下という非人道的な蛮行を行わないよう双方に求めたが、1945年までには、連合国側の指導者たちは、ルーズベルトなら広島に原爆を投下しただろうと考えるようになった。原爆投下は、それ以前に起こったことから生まれた。

広島への原爆投下を正当化する現実的な手段的理由は以下の通りである:


原爆は戦争終結を早めるために投下された。トルーマンをはじめとするほとんどの同盟国指導者が、原爆投下はそのためだと考えていたのは明らかだ。

もう一つの理由は、原爆投下によって人命が救われるからである。日本人の命は、軍人であろうと民間人であろうと、おそらくそれ以下であろう。ここでは、最小の時間と最大の人命救助という計算が相互に支え合っていた。

さらに、原爆投下は天皇と日本の指導者たちに面目を保つ方法を与えることになる。実際、最後には数人の日本のトップリーダーたちが最後の犠牲的な抵抗を望んだが、天皇の支持を受けた他のリーダーたちに却下され、天皇は8月12日に降伏を命じた。天皇はワシントンから、アメリカ軍司令官の命令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理解するのであれば、ここに留ま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言葉を受け取ったからである。

最後の理由は、原爆投下はアメリカの力をロシアに印象づけ、われわれの要求を受け入れやすくするためだったというものだ。この理由は非常に異論が多いが、一部の批評家や学者は重要だと主張している。

これらの理由が戦争遂行の限界を反映したものでないことは明らかである。そこで私は、連合国指導者たちのステーツマンシップの失敗と、なぜそのようなことが起こったのかという、別の問題に焦点を当てる。

トルーマンはかつて、日本人は野獣であり、そのように扱われるべきであると述べた。しかし、ドイツ人や日本人を野蛮人や野獣と呼ぶのは、今となってはなんと愚かなことだろう!ナチスや東条軍国主義者はそうだが、ドイツ人や日本人はそうではない。

チャーチルは後に、情熱と対立の激しさに導かれて原爆投下をやりすぎたと認めている。政治家の義務とは、そのような感情を、それが自然なものであり必然的なものであるにせよ、民主的な国民が平和のために努力すべき最善の道を変えることを許さないことである。政治家は、現在の敵国との関係が特別に重要であることを理解している。

先に述べたように、戦争は、敗れた敵国との永続的かつ友好的な和平を可能にし、その国民がどのような扱いを受けることになるかを予期できるような方法で、公然と実施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復讐や報復にさら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現在の敵の不安は解消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現在の敵は、共有された公正な未来の平和の仲間として見な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これらの発言から明らかなように、私の判断では、広島も日本の都市への原爆投下も、政治家としての義務として、政治指導者が危機免除がない限りは避けなければならない大悪であった。私はまた、これ以上の犠牲者を出すことなく、これを行うことができたと信じている。

戦争は事実上終わっていたのだから、その時点で侵略は不要だった。しかし、それが真実であろうとなかろうと、違いはない。危機免除がなければ、これらの爆撃は大きな悪である。しかし、その時点で正義の戦争の原則を明確に表明していたとしても、結果が変わらなかったことは明らかである。遅すぎたのだ。

大統領や首相は、できればもっと前に、少なくとも物事を考える時間と余裕があったときに、こうした問題を慎重に検討していたに違いない。正義の戦争についての考察は、敵対行為の終了間近の日々の出来事の重圧の中で聞くことはできない。

同様に、立憲民主主義の正当性と、それが尊重すべき権利と義務の根拠は、公的な政治文化の一部であり、教育の一環として市民社会の多くの団体で議論されるべきである。それは、日々の普通の政治でははっきりと聞くことはできないが、特別な状況を除いては、政治の日常的な主題ではなく、背景として前提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同じように、正義の戦争の原則の根本的な重要性を事前に十分に理解していなかったために、人命の計算、戦争終結までの最短時間、あるいはその他の費用と便益のバランスといった観点から、実践的な手段的推論が訴えか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な実践的な推論は、あまりにも多くのことをあまりにも簡単に正当化し、支配的な権力が道徳的な懸念を静める方法を提供する。その際に戦争の原則が提示されれば、天秤の中でバランスを取るべき、より多くの考慮事項となりやすい。

都市への原爆投下や広島への原爆投下といった思い切った措置が取られる前に、日本との交渉に入ろうとしなかったことも政治家としての失敗だった。良心的な交渉の試みは道徳的に必要だった。民主的な国民として、私たちは日本国民に対してその義務があった

日本では以前から、戦争を終わらせる方法を模索する議論がなされていた。海軍が壊滅し、外島が占領された以上、戦争は敗北したのだ。確かに、日本人はロシアが同盟国になってくれ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期待に惑わされていた。しかし、交渉とはまさに、その種の妄想を相手側に思いとどまらせるためにあるのだ。政治家は、そのような交渉が、その後の攻撃の衝撃的価値を低下させるかもしれないと考える自由はない。

トルーマンは多くの点で良い、時には非常に良い大統領だった。しかし、戦争を終わらせたやり方は、彼が政治家として失敗したことを示している。彼にとって、それは機会を逸したことであり、国と軍隊にとっても損失であった。

広島への原爆投下に疑問を呈することは、戦争を戦ったアメリカ軍に対する侮辱だと言われることがある。これは理解しがたい。私たちは、50年後に振り返って自分たちの非を考えることができるはずだ。私たちは、ドイツ人や日本人がそうすることを期待している-ドイツ人が言うところの “Vergangenheitsverarbeitung “だ。なぜ我々がそうしないのか?自分たちが道徳的な過ちを犯さずに戦争を遂行したと思っているからではない!

ドイツと日本の戦争責任や、戦争遂行における行動を変えることはできない。

明確に否定されるべきは、2つの虚無主義的な教義である。ひとつは、シャーマンの「戦争は地獄だ」という言葉である。もうひとつは、われわれはみな有罪であり、誰も他人を責め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ものだ。

これらはどちらも表面的なものであり、あらゆる合理的な区別を否定するものである。私たちの非行を弁解しようとしたり、私たちが非難されることはないと弁明したりするために、虚偽の主張がなされるのだ。

こうしたニヒリズムの道徳的空虚さは、公正でまともな文明社会(その制度や法律、市民生活、背景文化など)が、あらゆる状況において重要な道徳的・政治的区別を行うことに絶対的に依存しているという事実に現れている。

確かに戦争は地獄のようなものだが、だからといって道徳的区別がすべて通用しなくなるわけがない。また、すべての人、あるいはほとんどすべての人がある程度の罪を犯している場合もあるが、だからといってすべての人が等しく罪を犯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私たちが道徳的、政治的な原則や束縛から解放される時は決してない。

これらのニヒリズムは、常に私たちに完全に適用される原則や拘束から自由であるかのように装っているのだ。



1921年、メリーランド州ボルチモアに生まれた。ボルチモアの学校にしばらく通った後、コネチカット州にあるプレップスクールに転校。1939年に卒業し、プリンストン大学に入学。この頃より哲学に関心を持つようになる。1943年に学士号を取得して半期繰り上げ卒業後、アメリカ陸軍に兵士として入隊。第二次世界大戦中は歩兵としてニューギニア、フィリピンを転戦、降伏後の日本を占領軍の一員として訪れて、広島の原爆投下の惨状を目の当たりにする。この経験からすっかり軍隊嫌いとなり、士官への昇任を辞退し、1946年に兵士として陸軍を除隊する。


兵役、1943-46年

ロールズは1943年2月にアメリカ陸軍に入隊した[23]。第二次世界大戦中、ロールズは歩兵として太平洋戦争に従軍し、ニューギニアで任務に就き、青銅星章を授与された[24]。フィリピンでは激しい塹壕戦に耐え、暴力と流血のトラウマとなる光景を目の当たりにした[25][26]。

日本の降伏後、ロールズはマッカーサー元帥の占領軍の一員となり[15]、軍曹に昇進した[29]。しかし、広島の原爆投下の後遺症を見て軍に幻滅した[30]。


[30]「物理的なインフラの完全な消滅と、それ以上におぞましい人的被害は、彼に深い衝撃を与えた......そして、破壊が自軍によって意図的に加えられたという事実は、彼を深く不安にさせた。彼は、その光景が50年経った今でも彼を悩ませていると書いている。” Military History Monthly』2014年6月13日号掲載、Iain Kingによる記事「Thinker at War: Rawls」より、2014年11月20日閲覧。


RE: 오늘의 수수께끼의 미국 병사

1  민주 사회가 당사자가 되는 올바른 전쟁의 목표는, 제민중의 사이(특히 적과의 사이)에 성립해야 할 올바르고 한편 영속적인 평화롭다


2  민주 사회의 전쟁 상대국은, 민주적이 아닌 국가이다.이것은, 민주적인 민중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귀결한다.


3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민주 사회는 세 개의 집단 (1) 상대국의 지도자와 요직자, (2) 병사들 (3) 비전투원인 주민 , 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


4  민주 사회는,상대국의 비전투원, 병사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두 개의 이유가 있다.1) 만민법에 근거하고, 민간인·병사 모두 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2) 전시에 있어도 인권이 효력을 가진다고 하는 실례를 스스로 솔선하는 것으로 적국에 인권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5  군사 행동이라고(교전국이나 국제사회에 대한다) 성명에 대해 정의를 자부할 수 있는 민중은, 스스로가 목표로 하는 평화가 어떠한 것인지, 스스로가 요구하는 국제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전쟁중에 있어 미리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이다.


6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군사 행동이나 정책이 적절할지를 판정하기 위한 사고 님 식은, 항상 상술의5 원리의 범위내로 구성되어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엄격하게 한정된다.



다음에 히로시마와 도쿄 대공습에 관심을 가지면, 어느쪽이나극도의 위기라고 하는 면책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것을 안다.

그 하나의 측면은, (만일) 절대적인 권리(어떠한 상황에 있어도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될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공폭에 의해서 민간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약어),대일 전쟁에 대해 미국이 극단적인 위기 면책을 받은 것은 한번도 없었던 (일)것은 분명하다.전쟁 수행의 원칙은 항상 적용되었던 것이다.

실제, 히로시마의 경우, 정부의 상층부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원폭 투하가 의심스러운 것이어, 한도를 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그러나, 1945년 6월부터 7월에 걸쳐 연합국 수뇌가 간 토의에서는, 현실적인 수단 단적인 이성의 중량감이 승리를 가져왔다.전쟁이라고 하는 계속적인 중압의 아래에서는, 도덕적인 의념은 명확한 견해를 얻을 수 없었다.전쟁이 진행되는 것에 따라, 베를린이나 도쿄등의 수도에서 행해진 민간인에게의 격렬한 화염 방사는, 연합국측에서도 점차 받아 들여지게 되었다.

개전 후, 루즈벨트는 민간인에게의 원폭 투하라고 하는 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도적인 만행을 실시하지 않게 쌍방으로 요구했지만, 1945년까지는, 연합국측의 지도자들은, 루즈벨트라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원폭 투하는, 그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부터 태어났다.

히로시마에의 원폭 투하를 정당화 하는 현실적인 수단적 이유는 이하와 같다:


원폭은 전쟁 종결을 앞당기기 위해서 투하되었다.트르만을 시작해 와 어느 동맹국 지도자가, 원폭 투하는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원폭 투하에 의해서 인명이 구해지기 때문이다.일본인의 생명은,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아마 그것 이하일 것이다.여기에서는, 최소의 시간과 최대의 인명 구조라고 하는 계산이 서로 서로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원폭 투하는 천황과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면목을 유지하는 방법을 주게 된다.실제, 마지막에는 몇사람의 일본의 톱 리더들이 마지막 희생적인 저항을 바랬지만, 천황의 지지를 받은 다른 리더들에게 각하 되어 천황은 8월 12일에 항복을 명했다.천황은 워싱턴으로부터, 미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기에 머물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이다.

마지막 이유는, 원폭 투하는 미국의 힘을 러시아에 인상을 남겨 우리의 요구를 받아 들이기 쉽게하기 위해(때문에)였다고 하는 것이다.이 이유는 매우 이론이 많지만, 일부의 비평가나 학자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가전쟁 수행의 한계를 반영한 것이 아닌(일)것은 분명하다.거기서 나는, 연합국 지도자들의 정치가의 수완의 실패와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라고 하는, 다른 문제에 초점을 맞힌다.

트르만은 일찌기, 일본인은 야수이며, 그처럼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그러나, 독일인이나 일본인을 야만인이나 야수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와서는 너무나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나치스나 토우죠 군국주의자는 그렇지만, 독일인이나 일본인은 그렇지 않다.

처칠은 후에, 정열과 대립의 격렬함에 이끌려 원폭 투하를 너무 했다고 인정하고 있다.정치가의 의무란, 그러한 감정을,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필연적인 물건이다고 해도, 민주적인 국민이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할 최선의 길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정치가는, 현재의 적국과의 관계가 특별히 중요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먼저 말한 것처럼,전쟁은, 진 적국과의 영속적 한편 우호적인 평화를 가능하게 해, 그 국민이 어떠한 취급을 받게 될까를 예기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공연하게 실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복수나 보복에 노출되는 것은 아닐것인가 라고 하는 현재의 적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된다.현재의 적은, 공유된 공정한 미래의 평화의 동료로서 보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발언으로부터 분명한 것 같게, 나의 판단으로는, 히로시마도 일본의 도시에의 원폭 투하도, 정치가로서의 의무로서정치 지도자가 위기 면제가 없는 한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큰 죄악이었다.나는 또,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는 일 없이, 이것을 실시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전쟁은 사실상 끝나 있었다이니까, 그 시점에서침략은 불요였다.그러나, 그것이 진실해도 않아도, 차이는 없다.위기 면제가 없으면,이러한 폭격은 큰 악이다.그러나, 그 시점에서 정의의 전쟁의 원칙을 명확하게 표명하고 있었다고 해도,결과가 변하지 않았던(일)것은 분명하다.너무 늦었다것이다.

대통령이나 수상은, 할 수 있으면 더 전에, 적어도사물을 생각하는 시간과 여유가 있을 때에, 이러한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던 것임에 틀림없다.정의의 전쟁에 대한 고찰은, 적대 행위의 종료 직전의 나날의 사건의 중압 중(안)에서 (들)물을 수 없다.

같이 입헌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그것이 존중해야 할 권리와 의무의 근거는, 공적인 정치 문화의 일부이며, 교육의 일환으로서시민사회가 많은 단체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그것은, 나날의 보통 정치에서는 분명히 (들)물을 수 없지만, 특별한 상황을 제외해서는, 정치의 일상적인 주제에서는 없고, 배경으로서 전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똑같이, 정의의 전쟁의 원칙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사전에 충분히 이해하지 않았기(위해)때문에,인명의 계산, 전쟁 종결까지의 최단 시간, 있다 있어는 그 외의 비용과 편익의 밸런스라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실천적인 수단적 추론이 호소할 수 없었다 것인다.

이러한 실천적인 추론은,너무 많은 일을 너무 간단하게 정당화해, 지배적인 권력이 도덕적인 염려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제공한다.그 때에 전쟁의 원칙이 제시되면, 천칭 중(안)에서 밸런스를 취해야 할, 보다 많은 고려사항이 되기 쉽다.

도시에의 원폭 투하나 히로시마에의 원폭 투하라고 한대담한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 일본이라는 교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정치가로서의 실패였다.양심적인 교섭의 시도는 도덕적으로 필요했다.민주적인 국민으로서 우리는 일본국민에 대해서 그 의무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전부터, 전쟁을 끝내는 방법을 모색하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해군이 괴멸 해, 외도가 점령된 이상, 전쟁은 패배했던 것이다.확실히, 일본인은 러시아가 동맹국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고 하는 기대에 유혹해지고 있었다.그러나, 교섭과는 확실히, 그 종의 망상을 상대 측에 단념하게 하기 위해서 있다의다.정치가는, 그러한 교섭이, 그 후의 공격의 충격적 가치를 저하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유는 없다.

트르만은 많은 점으로 좋은, 가끔 매우 좋은 대통령이었다.그러나,전쟁을 끝낸 방식은, 그가 정치가로서 실패한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기회를 벗어난 것이어, 나라와 군대에 있어서도 손실이었다.

히로시마에의 원폭 투하에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전쟁을 싸운 미군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있다.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우리는, 50년 후에 되돌아 보고 스스로의 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독일인이나 일본인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독일인이 말하는 곳(중)의 "Vergangenheitsverarbeitung"(이)다.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지?스스로가 도덕적인 잘못을 범하지 않고 전쟁을 수행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독일과 일본의 전쟁 책임이나, 전쟁 수행에 있어서의 행동을 바꿀 수 없다.

명확하게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2개의 허무주의적인 교의이다.하나는, 셔맨의 「전쟁은 지옥이다」라고 하는 말이다.또 하나는, 우리는 모두 유죄이며, 아무도 타인을 탓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어느쪽이나 표면적인 물건이며, 모든 합리적인 구별을 부정하는 것이다.우리의 비행을 변명하려고 하거나 우리가 비난 당할 것은 없다고 변명하거나 하기 위해서, 허위의 주장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허무주의의 도덕적 공허함은, 공정하고 착실한 문명사회(그 제도나 법률, 시민 생활, 배경 문화등)가, 모든 상황에 있어 중요한 도덕적·정치적 구별을 실시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나타나고 있다.

확실히 전쟁은 지옥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구별이 모두 통용되지 않게 될 리가 없다.또, 모든 사람, 있다 있어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있다 정도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전`함오구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우리가 도덕적, 정치적인 원칙이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때는 결코 없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항상 우리에게 완전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가와 같이 가장하고 있다.



1921년, 메릴랜드주 보르치모아로 태어났다.보르치모아의 학교로 해 장미구 다닌 후, 코네티컷주에 있는 진학 전문 사립 학교에 전학.1939년에 졸업해, 프린스톤 대학에 입학.요즘보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194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해 반기 앞당기기 졸업 후, 미국 육군에게 병사로서 입대.제이차 세계대전중은 보병으로서 뉴기니, 필리핀을 전전,항복 후의 일본을 점령군의 일원으로서 방문하고,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의 참상을 눈앞으로 한다.이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군대 싫다고 되어, 사관에게의 승진을 사퇴해, 1946년에 병사로서 육군을 제대한다.


병역,1943-46해

로르즈는 1943년 2월에 미국 육군에게 입대한[23].제이차 세계대전중, 로르즈는 보병으로서 태평양전쟁에 종군 해, 뉴기니에서 임무에 올라, 청동호시 아키라가 수여된[24].필리핀에서는 격렬한 참호전에 참아 폭력과 유혈의 트라우마가 되는 광경을 눈앞으로 한[25][26].

일본의 항복 후, 로르즈는 막카서 원수의 점령군의 일원이 되어[15], 군조에 승진한[29].그러나,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의 후유증을 보고 군에 환멸 한[30].


[30]「물리적인 인프라의 완전한 소멸과 그 이상으로 무서운 인적 피해는,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그리고, 파괴가 자군에 의해서 의도적에 더해졌다고 하는 사실은, 그를 깊고 불안하게 시켰다.그는, 그 광경이 50년 지난 지금도 그를 괴롭힐 수 있고 있다고 쓰고 있다." Military History Monthly」2014년 6월 13일호게재, Iain King에 의한 기사 「Thinker at War: Rawls」보다, 2014년 11월 20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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