泥棒関連諺
https://donbada.tistory.com/880
◆ 泥棒が尻をたたく.
◆ 泥棒が私の足痺れる.
◆ 泥棒一人に守る人十人が歯が立たない.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4200&code=kc_age_40
伊藤博文は 1905年 11月 9日特派大使(特派大使) 資格で韓国を訪問した. これは 1905年 9月 5日締結されたポーツマス条約で露日戦争での勝利が確定されてから薬2ヶ月よ万の仕事だった. 日本は露日戦争での勝利を通じて有力な競争者を追い出した後韓国に対する侵略を本格化するために彼を韓国に派遣したのだった.
Itoはソウルに到着した翌日高宗を謁見して “特派大使の指揮によりなさい”と言う内容を記した日本国王の親書を峰頂こんにちはだった. 彼は 11月 15日再び謁見して外交権委譲などの内容を記した協約の中を高宗に押しこんだ. 高宗はこの協約の中に反対したし政府代わりに中にも反対意見が多かった. しかし彼は強圧的な手段を通じて外部大臣朴斉純を含めた五つ代わり(乙巳五賊)の署名を受け出すことに成功した. 高宗はこの協約を在宅しなかったが彼はこの協約をそのまま追いやった. この協約を第2次韓日協約あるいは乙巳條約だと呼ぶ.
が協約によって韓国は外交権を日本に剥奪されて外国にあった大韓帝国の公使館は皆閉鎖されたしソウルに駐在した各国公使館も皆撤収した. Itoはこの協約が締結された翌年の 1906年 2月ソウルに統監府を設置したし彼が自ら招待痛感になった. 伊藤統監は以後外交だけではなく内政にまで深く介入しながら大韓帝国に対する受付工作を本格化こんにちはだった.
このようなItoの歩みは 1907年 7月にあったヘイグ特使事件でよってもっと加速化された. 彼はこの事件を言葉尻で高宗を脅かして退位を強要したし代わりに従順を即位させた. 彼は 1907年締結されたいわゆる韓日新協約に根拠して各部処の次官に日本人を任命するようにしていわゆる次官政治を通じて韓国の国政を一手に掌握した. 以後軍隊解散と警さつ権の上などを通じて大韓帝国をまさに皮だけ残るようにした. こんなに日帝の大韓帝国に対する侵奪は周密に成り立ったがこれを主導した人物がまさに伊藤博文
◆ヘイグ特使事件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4200&code=kc_age_40
ヘイグ特使事件は 1907年高宗がオランダのヘイグで開催された第2回万国郵平和会議に特使を派遣して日製によって強制締結された乙巳條約の不法性を暴露して韓国の主権回復を列強に訴えた外交活動だ. 高宗は外交権と統治権を剥奪した乙巳條約を承認しないで機会さえあれば乙巳條約に反対する親書を国外で出した. 万国郵平和会議首唱者であるロシア皇帝が極秘裡に招請状を送ると特使を派遣した. しかし会議参加は拒否されたし新文記紫檀国際協会で発言機会を得て韓国の境遇を知らせた. 会議参加拒否に痛憤した李ジュンは殉国で生を終えた.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09/09/28/2009092800009.html
▲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楽, 大勳位伊藤侯爵.” Itoをグルメに比喩して “女グルメ”で皮肉ったマンガ. そのうちには女僧(女僧)も見える.(滑稽新聞, 1903.9.5)
女ずき者の最後
好色漢の最後
安重根義士の義挙に射殺される当時の上刺画
도둑 관련 속담
https://donbada.tistory.com/880
▶ 도둑이 매를 든다.
▶ 도둑이 제 발 저리다.
▶ 도둑 한명에 지키는 사람 열명이 못당한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4200&code=kc_age_40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9일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는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정된 지 약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유력한 경쟁자를 몰아낸 후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그를 한국에 파견한 것이었다.
이토는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고종을 알현하고 “특파대사의 지휘에 따르라”는 내용을 담은 일본 국왕의 친서를 봉정하였다. 그는 11월 15일 재차 알현하여 외교권 이양 등의 내용을 담은 협약안을 고종에게 들이밀었다. 고종은 이 협약안에 반대하였고 정부 대신 가운데에도 반대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다섯 대신(을사오적)의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종은 이 협약을 재가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협약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 협약을 제2차 한일협약 혹은 을사조약이라고 부른다.
이 협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대한제국의 공사관은 모두 폐쇄되었으며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 공사관도 모두 철수하였다. 이토는 이 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으며 그가 스스로 초대 통감이 되었다. 이토 통감은 이후 외교뿐 아니라 내정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접수 공작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이토의 행보는 1907년 7월에 있었던 헤이그특사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협박하여 퇴위를 강요하였으며 대신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는 1907년 체결된 이른바 한일신협약에 근거하여 각 부처의 차관에 일본인을 임명하도록 하여 이른바 차관정치를 통해 한국의 국정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이후 군대해산과 경찰권 위임 등을 통해 대한제국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게 만들었다. 이렇게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은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헤이그 특사사건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4200&code=kc_age_40
헤이그특사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이다. 고종은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만국평화회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가 극비리에 초청장을 보내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회의참석은 거부됐고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발언 기회를 얻어 한국의 처지를 알렸다. 회의참석 거부에 통분한 이준은 순국으로 생을 마감했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09/09/28/2009092800009.html
▲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樂, 大勳位伊藤侯爵."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그중에는 여승(女僧)도 보인다.(滑稽新聞, 1903.9.5)
女ずき者の最後
호색한의 최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사살될 당시의 풍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