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鈴木宣弘:食料・農業問題 本質と裏側】
子供たちから始まる「占領政策」
2021年11月25日
戦後の日本の食生活形成には米国の「意思」が大きく関与している。それは「進化」しつつ、今も続いているように思われる。パン食普及もゲノム食品普及もターゲットは子供たちである。
余剰穀物処理が米国占領政策の柱
「食料自給率がなぜ下がったか」についてよく言われる「誤解」がある。「日本の農地と農業生産力は限られているのに、食生活の変化に伴う食料需要が増大したため、対応しきれなくなった。原因は食生活の変化だから仕方ない」というもの。これは一面の事実だが、鎖国の江戸時代が当然ながら自給率100%だったことを想起すれば、大きな要因は政策だとわかる。
米国の要請で貿易自由化を進め、輸入に頼り、日本農業を弱体化させてしまう政策を採ったからである。しかも米国は日本人の食生活を米国農産物「依存症」に誘導・改変した。日本の戦後の食料難と米国の余剰穀物処理への対処として、早い段階で実質的に関税撤廃された大豆、トウモロコシ(飼料用)、輸入数量割当制は形式的に残しつつも大量の輸入を受け入れた小麦などの品目では、輸入急増と国内生産の減少が加速し、自給率の低下が進んだ。小麦、大豆、トウモロコシ生産の激減と輸入依存度が85%、94%、100%に達する事態となった。
故宇沢弘文教授は友人から聞いた話として、米国の日本占領政策の2本柱は、(1)米国車を買わせる(2)日本農業を米国農業と競争不能にして余剰農産物を買わせる、ことだったと述懐している。
日本の子供たちの食生活「改変」計画
このためには、コメの代わりに小麦を食べさせ、食肉消費も喚起して、飼料穀物需要を増やす必要があった。これを牽引(けんいん)した米国の戦略の一つが学校給食を「突破口」にした日本人の食生活「改善」だった。
独立行政法人農業環境技術研究所『農業と環境』No.106 (2009年2月1日)は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
戦後の食料事情が好転し始めた昭和33(1958)年に、その後の農業に大きなダメージを与えることになる一冊の本が出版される。それは、慶応大学医学部教授の林 髞(はやしたかし)の著書 『頭脳』 である。この本は、今でこそ “迷著” としてほとんど葬り去られ、探すのにも苦労する。しかし当時は、発売後3年目にして50版を重ねるベストセラーとなり、日本の社会へ与えた影響はきわめて大きかったのである。
迷著というより悪書と言っても余りあるこの 『頭脳』 の中には、「コメ食低脳論」 がまことしやかに述べられている。林氏は、日本人が欧米人に劣るのは、主食のコメが原因であるとして、
......これはせめて子供の主食だけはパンにした方がよいということである。 (中略) 大人はもう、そういうことで育てられてしまったのであるから、あきらめよう。悪条件がかさなっているのだから、運命とあきらめよう。しかし、せめて子供たちの将来だけは、私どもとちがって、頭脳のよく働く、アメリカ人やソ連人と対等に話のできる子供に育ててやるのがほんとうである
と述べている。この記述は、まったく科学的根拠のない暴論と言わざるをえないが、当時は正しい学説として国民に広く受け入れられてしまった。
当時の朝日新聞のコラム 「天声人語」 にも、次のようなコメ食否定論が掲載されている。その文章を原文のまま引用すると、
近年せっかくパンやメン類など粉食が普及しかけたのに、豊年の声につられて白米食に逆もどりするのでは、豊作も幸いとばかりはいえなくなる。としをとると米食に傾くものだが、親たちが自分の好みのままに次代の子供たちにまで米食のおつき合いをさせるのはよくない (昭和33年3月11日付)
である。
慶応大学医学部教授の肩書きや、朝日新聞というマスコミパワーにより、一般国民はこの “まやかし理論” に、すっかり洗脳(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されてしまった。
当時は、米国の小麦生産過剰による日本への売り込み戦略の下、国内の各地で 「洋食推進運動」 が実施されることになる。日本人の食生活近代化というスローガンのもとに、「栄養改善普及運動」 や 「粉食奨励運動」 が展開されたのである。これらは、まさに欧米型食生活崇拝運動であり、和食排斥運動でもあった。キッチンカーという調理台つきのバスが、20数台で分担し、全国の都市部のみならず農村部まで津々浦々を巡回して、パン食とフライパン料理などの試食会と講演会(林髞教授もしばしば動員されている)をくり返した。これらの強烈なキャンペーンには、農家の人たちまでが洗脳されて、欧米型食生活崇拝の考え方に陥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短い期間に伝統的な食文化を変化させてしまった民族というのは、世界史上でもほとんど例がないそうである。洗脳キャンペーンがあまりにも強烈だった。
そして、このころから、わが国ではコメ消費量の減少が始まり、コメの生産過剰から水田の生産調整へとつながって行くことになる。これはまた、わが国の農業、農政が凋落(ちょうらく)する始まりでもあった。また食料自給率の低落が始まるのも、この時期と一致している。(引用終わり)
【스즈키 노부히로:식료·농업 문제 본질과 뒤편】
아이들로부터 시작되는 「점령 정책」
2021년 11월 25일
전후의 일본의 식생활 형성에는 미국의 「의사」가 크게 관여하고 있다.그것은 「진화」하면서,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빵식 보급도 게놈 식품 보급도 타겟은 아이들이다.
잉여 곡물 처리가 미국 점령 정책의 기둥
「식료 자급율이 왜 내렸는지」에 임해서 잘 말해지는 「오해」가 있다.「일본의 농지와 농업 생산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식생활의 변화에 수반하는 식료 수요가 증대했기 때문에, 대응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원인은 식생활의 변화이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것은 일면의 사실이지만, 쇄국의 에도시대가 당연히 자급율100%였던 일을 상기하면, 큰 요인은 정책이라고 안다.
미국의 요청으로무역 자유화를 진행시키고 수입에 의지해, 일본 농업을 약체화 시켜 버리는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이다.게다가 미국은일본인의 식생활을 미국 농산물 「의존증」에 유도·개변했다.일본의 전후의 식량난과
고 우택히로후미 교수는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로서 미국의 일본 점령 정책의 2 홈바시라는, (1)미국차를 사게 하는(2)일본 농업을 미국 농업과 경쟁 불능으로 해 잉여 농산물을 사게 하는, 일이었다고 술회 하고 있다.
일본의 아이들의 식생활 「개변」계획
이 때문에는, 쌀 대신에밀을 먹여 식육 소비도 환기하고,사료 곡물 수요를 늘릴필요가 있었다.이것을 견인(견인)한 미국의 전략의 하나가학교급식을 「돌파구」로 한 일본인의 식생활 「개선」이었다.
독립 행정법인 농업 환경 기술 연구소 「농업과 환경」No.106 (2009년 2월 1일)(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후의 식료 사정이 호전되기 시작한 쇼와 33(1958) 년에, 그 후의 농업에 큰 데미지를 주게 되는 1권의 책이 출판된다.그것은, 케이오 대학 의학부 교수 림체(하야시 타카시)의 저서 「두뇌」이다.이 책은, 지금은 "미저" 로서 거의 매장해 떠나져 찾는데도 고생한다.그러나 당시는, 발매 후 3년 봐 50판을 거듭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의 사회에 준 영향은 극히 컸기 때문에 있다.
미저라고 하는 것보다 악서라고 말해도 남음이 있는 이 「두뇌」안에는,「쌀식저뇌론」 이 마코토 해나 게 기술되어 있다.하야시씨는, 일본인이 구미인에 뒤떨어지는 것은, 주식의 쌀이 원인이다고 하여,
......이것은 적어도 아이의 주식만은 빵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중략) 어른은 이제(벌써), 그런 것으로 자라 버렸던 것이다로부터, 포기하자.악조건이 빌려주어 되어 있으니까, 운명과 포기하자.그러나, 적어도 아이들의 장래만은, 저희들 (와) 달리, 두뇌가 좋게 일하는, 미국인이나 소련인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아이에게 길러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라고 말하고 있다.이 기술은,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폭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당시는 올바른 학설로서 국민에게 넓게 받아 들여져 버렸다.
당시의 아사히 신문의 칼럼 「천성인어」에도, 다음과 같은 쌀식 부정론이 게재되고 있다.그 문장을 원문인 채 인용하면,
근년 모처럼 빵이나 멘류 등 분식이 보급 밖에 자리수의 것에, 풍년의 소리에 끌려 백미식에 역돌아오는 것은 , 풍작도 다행 토바 빌려는 말할 수 없게 된다.(으)로 해를 취하면 정식에 기우는 것이지만, 부모들이 자신의 취향대로 차세대의 아이들에게까지 정식의 수행원합 있어를 시키는 것은 좋지 않은 (쇼와 33년 3월 11 일자)
이다.
케이오 대학 의학부 교수의 직함이나, 아사히 신문이라고 하는 매스컴 파워에 의해, 일반 국민은 이 "속임수 이론" 에, 완전히 세뇌(마인드 컨트롤)되어 버렸다.
당시는, 미국의 밀생산과잉에 의한 일본에의 팔아 전략아래, 국내의 각지에서 「양식 추진 운동」이 실시되게 된다.일본인의 식생활 근대화라고 하는 슬로건의 아래에서,「영양 개선 보급 운동」이나 「분식 장려 운동」이 전개된 것인다.이것들은, 확실히 구미형 식생활 숭배 운동이며, 일식 배척 운동이기도 했다.키친 카라고 하는 조리대포함의 버스가, 20수대로 분담해, 전국의 도시지역 뿐만 아니라 농촌부까지 츠츠포들을 순회하고, 빵식과 프라이팬 요리등의 시식회와 강연회(림체교수도 자주 동원되고 있다)를 반복했다.이러한 강렬한 캠페인에는, 농가의 사람들까지가 세뇌되고,
그리고, 요즘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쌀 소비량의 감소가 시작되어, 쌀의 생산과잉으로부터 논의 생산조정으로 연결되어서 가게 된다.이것은 또, 우리 나라의 농업, 농정이 조락(나비등구) 하는 시작이기도 했다.또 식료 자급율의 저락이 시작되는 것도, 이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인용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