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のび太
唐と新羅は、同盟を結び、660年に百済を、668年に高句麗を滅ぼした。しかし、唐は、百済の地に熊津都督府を、高句麗の地には安東都護府を設け、さらに新羅も鶏林州都督府として、新羅の文武王自身も鶏林州大都督とし、朝鮮半島全体を支配しようとした。このため唐と新羅は対立するようになった。文武王は、高句麗遺民の高句麗復興運動を支援した。
670年3月、高句麗遺民軍と新羅軍が鴨緑江を渡り唐軍を攻撃し、戦争が始まった。また、新羅は高句麗の安勝を高句麗王にした。
新羅は、百済地域の唐軍も攻撃し82個城を奪い、671年には泗沘城を陥落させ、所夫里州を設置して、百済地域を占領した。671年10月、百済に向かっていた薛仁貴が率いる唐の水軍が、黄海で新羅の水軍に敗れた。
一方672年7月、唐軍と靺鞨軍が平壌を占領し、8月には韓始城と馬邑城も占領した。高句麗復興軍と新羅軍は、672年12月に白氷山で唐軍に敗れた。673年には瓠瀘河でも唐軍に敗れ、高句麗復興運動は衰えた。新羅は674年に安勝を百済地域に設けた報徳国の王とした。
674年1月、唐の高宗は文武王の冊封を取り消し、代わりに文武王の弟の金仁問を新羅王に冊封した。文武王は、675年2月に謝罪使を派遣し、元の状態に戻った。
675年9月に新羅軍は、泉城で唐の薛仁貴の軍を破り、買肖城戦闘でも李謹行の軍を破った。さらに、676年11月、新羅の水軍が錦江河口の伎伐浦海戦で薛仁貴の水軍を破る。唐は、熊津都督府と安東都護府を遼東に移し、朝鮮半島から撤退した。この結果、新羅が勝利するようになり、朝鮮半島の三国統一をした。新羅は、戦争中も唐との朝貢冊封関係を維持し、唐の年号を使い続けていた[4]。
신라=뻗어 태
당과 신라는,동맹을 맺어,660년에(쿠다라)백제를,668년에고구려를 멸했다.그러나, 당은, (쿠다라)백제의 땅에웅진도독부를,고구려의 땅에는안동 도호부를 마련해 한층 더 신라도계 숲주 도독부로서 신라의문무왕 자신도 계림주 대도시독으로 해,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다.이 때문에 당과 신라는 대립하게 되었다.문무왕은, 고구려 유민의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했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과 신라군이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공격해, 전쟁이 시작되었다.또, 신라는 고구려의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했다.
신라는, (쿠다라)백제 지역의 당군도 공격해 82개성을 빼앗아,671년에는사성을 함락시켜,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쿠다라)백제 지역을 점령했다.671년 10월, (쿠다라)백제를 향하고 있던설인귀가 인솔하는 당의 수군이,황해에서 신라의 수군에 졌다.
한편672년 7월, 당군과말갈군이평양을 점령해,8월에는 한시성과 마 읍성도 점령했다.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은, 672년 12월에 흰색 빙산에서 당군에 졌다.673년에는 호로하에서도 당군에 져 고구려 부흥 운동은 쇠약해졌다.신라는674년에 안승을 (쿠다라)백제 지역에 마련한보은국의 왕으로 했다.
674년 1월, 당의고종은 문무왕의책봉을 취소해, 대신에 문무왕의 남동생의김 히토시문을 신라왕에게 책봉 했다.문무왕은,675년 2월에 사죄사를 파견해, 원 상태로 돌아왔다.
675년 9월에 신라군은, 천성으로 당의 설인귀의 군을 물리쳐,매초성전투에서도리근행의 군을 물리쳤다.게다가 676년 11월, 신라의 수군이금에가와구의기벌포해전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물리친다.당은, 웅진도독부와 안동 도호부를 랴오둥으로 옮겨, 한반도로부터 철퇴했다.이 결과, 신라가 승리하게 되어, 한반도의 삼국 통일을 했다.신라는, 전쟁중도 당과의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해, 당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던[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