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中の行事
庶民の行事
年中行事絵巻
ねんじゅうぎょうじえまき
絵巻。平安時代における宮中の儀式や、祭事、法会(ほうえ)、民間の宗教上の風俗など、年中の行事を集めて描いたもの。平安末期に後白河(ごしらかわ)法皇が六十巻余に及ぶ絵巻を常盤光長(ときわみつなが)を中心に制作させ、藤原基房(もとふさ)に校閲させて蓮華(れんげ)王院(三十三間堂)の宝蔵に収め後世に伝えた。この原本はしだいに散逸し、残ったものも江戸時代に幾たびかの内裏(だいり)の炎上で焼失した。現在は失う前に模した模本が伝わり、田中家その他に分蔵される。これは、1661年(寛文1)ごろ、宮中にあった原本を土佐広通(ひろみち)(住吉如慶(じょけい))が写した白描(はくびょう)模写十六巻をはじめとしたもので、二十四、五巻分の図様を伝えている。近世の模写とはいえ、平安時代の風俗資料としてきわめて高い価値を有する。
[村重 寧]
『福山敏男編『新修日本絵巻物全集24 年中行事絵巻』(1978・角川書店)』▽『小松茂美編『日本絵巻大成8 年中行事絵巻』(1977・中央公論社)』
縄文時代に入ると盛んに造られるようになり、弥生時代以降にも引き継がれた。伏屋式と壁立式があり、そのうち伏屋式が主流で、壁立式は拠点集落の大形建物に限られ、首長居館として権威を示す形式として弥生時代から古墳時代の両時代に建築されたと考えられている。そして、日本の農家や民家のもととなっていった。竪穴建物自体は平安時代ごろまで造られ、さらに時代が下がった例として東北地方では室町時代まで造られていた。ただし、特に近畿地方では、平安時代にはほとんどが平地建物へ移行したとされる[11]。鎌倉時代以降は、東北地方や関東地方(特に鎌倉周辺)で「方形竪穴建築」や「方形竪穴建物」として一部名残を残すものの、全面的に消失していく(一部近世・近代にも小屋として存続)[6]。
궁중의 행사
서민의 행사
연중 행사 그림 두루마기
자지 않는 총일 글자네장작
그림 두루마기.헤이안 시대에 있어서의 궁중의 의식이나, 제사, 법회(편네),민간의 종교상의 풍속등, 연중의 행사를 모아 그린 것.평안 말기에 후 시라카와(다섯 손가락등이나 원) 법황이 60권여에 이르는 그림 두루마기를 도키와 미쓰나가(영원 봐 개인이)를 중심으로 제작시켜, 후지와라노 모토후사(야)에게 교열 시켜 연꽃(렝게) 왕원(33간당)의 보장에 마지막 후세에게 전했다.이 원본은 차츰 흩어 없어짐 해, 남은 것도 에도시대에 얼마 여행인가의 대궐(다 필요해)의 염상으로 소실했다.현재는 잃기 전에 본뜬 모본이 전해져, 타나카가 그 외에 분장 된다.이것은, 1661년(간분 1)경, 궁중에 있던 원본을 토사히로통(히로미치)(스미요시 죠케이(모계))가 찍은 백묘(입는 초) 모사 16권을 시작으로 한 것으로, 24, 5권분의 도안 모양을 전하고 있다.근세의 모사라고 해도, 헤이안 시대의 풍속 자료로서 극히 높은 가치를 가진다.
[촌중녕]
「후쿠야마 토시오편 「신수 일본 그림 두루마리 전집 24 연중 행사 그림 두루마기」(1978·카도카와 서점)」▽「코마츠 시게미편 「일본 그림 두루마기 대성 8 연중 행사 그림 두루마기」(1977·중앙공론사)」
죠몽 시대에 들어가면 활발히 만들어지게 되어, 야요이 시대 이후에도 인계되었다.후시야식과 벽립식이 있어, 그 중 후시야식이 주류로, 벽립식은 거점 취락의 대형 건물에 한정되어 수장 저택으로서 권위를 나타내는 형식으로서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분 시대의 양시대에 건축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그리고, 일본의 농가나 민가의 근원이 되고 갔다.수혈건물 자체는 헤이안 시대경까지 만들어져 한층 더 시대가 흐른 예로서 동북지방에서는 무로마치 시대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다만, 특히킨키 지방에서는, 헤이안 시대에는 대부분이 평지 건물에 이행 했다로 여겨지는[11].가마쿠라 시대 이후는,동북지방이나 관동지방(특히 카마쿠라 주변)에서 「방형수혈건축」이나 「방형수혈건물」로서 일부 자취를 남기지만, 전면적으로 소실해 나가는(일부 근세·근대에도 오두막으로서 존속)[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