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陽に遷都後、人口急増、糞尿処理能力の限界超過のため
「今、都城のほとんどの家が汚れて汚れている。車がなくて汚物を持って行けないからだ。 … ソウルでは毎日庭や街におしっこをして井戸水が全部しょっぱい。 川辺の橋の軸台の周辺には人糞がこびりついて乾き、大きな梅雨でなければ洗われない。」
朝鮮後期の実学者パク·ジェガは『北学義』で首都漢陽の姿をこの様に記録している。 このように文献だけで伝えられた朝鮮時代の漢陽の汚い街並みが実際である可能性が高いという研究結果が出た。
ソウル大学医学部人類学·高病理研究室のシン·ドンフン教授チームは10日、「景福宮の塀、光化門広場の世宗大王銅像の下、市庁舎付近、宗廟広場などソウル主要地点の朝鮮時代の地層から回虫·偏虫などの寄生虫の卵を発見した」と明らかにした。
寄生虫の卵は主に人糞として排出された後、野菜などの食べ物に混ざって再び人の口に入る方式で感染するという点で、この地域に人糞が散らばっていた可能性を示す部分だ。
研究結果、景福宮の前で抽出した土からは1g当たり最高165個の卵が出てきて、残りのサンプルからも平均35個の卵が検出された。
漢陽の街に人糞が溢れるしかなかった事情は何だろうか。
シン教授チームは当時、急増した人口に耐えられる下水道施設が整っていなかったという点に注目している。
朝鮮時代前期の15世紀初頭、約10万人だった漢陽の人口は、18世紀に入って2倍近く増えた。
1785年頃、英国で人口5万人を超えた都市がロンドンなど4ヵ所に過ぎなかったという点を考慮すれば、すごい人口だったわけだ。
シン教授は「中世ヨーロッパの都市が糞尿でめちゃくちゃだったように人口が急増した漢陽も事情は同じだったと見られる」と話した。
実際、『承政院日記』英祖27年条を見ると、人が住んではならない六曹の前の道まで民家が建って木がなくなり土砂が流失し、この土砂が排水路を塞いだため河川が氾濫していると指摘する部分が出ている。
英祖は「都城の中の人民があまりにも多い」と嘆く。 これに比べ、糞尿処理施設はあまりなかった。
パク·ジウォンが書いた<燕巖集>の「礼徳先生伝」には糞を片付ける職業を持ったオム·ヘンスという人物が登場する。
彼は糞尿を専門的に回収し、都城郊外の畑に撒き散らし、その収入で生計を立てた。
人々は時に糞尿を河川に捨てたりもし、梅雨の時期に水が氾濫しながら糞尿混じりの汚水が街のあちこちに広がったりもしたものと推定される。
韓国古典翻訳院のキ·ホチョル研究員は「朝鮮宮島にもトイレは見当たらないが、漢陽の糞尿処理システムはまだ明らかになっていない」とし「イェドク先生のような業者が集めた糞尿を毎日処理するシステムだったと推定されるが、人口が増え、当初計画された範囲を超えてしまったものと見られる」と明らかにした。
糞尿処理能力の限界超過>>
ま、それが犬韓愚民族の歴史だから、仕方ないよなww
한양에 천도 후, 인구 급증, 분뇨 처리 능력의 한계 초과를 위해
「지금, 미야코노죠의 대부분의 집이 더러워지고 더러워져 있다.차가 없어서 오물을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매일뜰이나 거리에 소변을 해 우물물이 전부 짜다. 강변의 다리의 축대의 주변에는 인분이 달라붙어 말라, 큰 장마가 아니면 씻어지지 않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 의」로 수도 한양의 모습을 이와 같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문헌만으로 전해진 조선시대의 한양의 더러운 거리풍경이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울 대학 의학부 인류학·고병리 연구실의 신·돈훈 교수팀은 10일, 「경복궁의 담,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동상아래, 시청사부근, 종묘 광장 등 서울 주요 지점의 조선시대의 지층으로부터 회충·편충등의 기생충의 알을 발견했다」라고 분명히 했다.
기생충의 알은 주로 인분으로서 배출된 후, 야채등의 음식에 섞여 다시 소문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감염한다고 하는 점으로, 이 지역에 인분이 흩어져 있던 가능성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연구 결과, 경복궁의 앞에서 추출한 흙에서는 1 g 당 최고 165개의 알이 나오고, 나머지의 샘플로부터도 평균 35개의 알이 검출되었다.
한양의 거리에 인분이 흘러넘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은 무엇일까.
신 교수팀은 당시 , 급증한 인구에게 견딜 수 있는 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시대 전기의 15 세기 초두, 약 10만명이었던 한양의 인구는, 18 세기에 들어가 2배 가깝게 증가했다.
1785년경, 영국에서 인구 5만명을 넘은 도시가 런던 등 4개소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인구였던 (뜻)이유다.
신 교수는 「중세 유럽의 도시가 분뇨로 엄청이었던 것 같게 인구가 급증한 한양도 사정은 같았다고 볼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실제, 「승정원일기」영조 27년조를 보면,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6조의 전의 길까지 민가가 세우고 나무가 없어져 토사가 유실해, 이 토사가 배수로를 차지했기 때문에 하천이 범람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이 나와 있다.
영조는 「미야코노죠안의 인민이 너무 많다」라고 한탄한다. 이것에 비해, 분뇨 처리 시설은 별로 없었다.
박·지워가 쓴<연암집>의 「례덕선생님전」에는 대변을 정리하는 직업을 가진 옴·헨스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분뇨를 전문적으로 회수해, 미야코노죠 교외의 하타에게 마구 따돌려 , 그 수입으로 생계를 세웠다.
사람들은 때에 분뇨를 하천에 버리기도 해, 장마의 시기에 물이 범람하면서 분뇨 섞인 오수가 거리의 여기저기에 퍼지기도 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한국 고전 번역원의 키·호쵸르 연구원은 「조선 미야지마에도 화장실은 눈에 띄지 않지만, 한양의 분뇨 처리 시스템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해 「이드크 선생님과 같은 업자가 모은 분뇨를 매일 처리하는 시스템이었다고 추정되지만, 인구가 증가해 당초 계획된 범위를 넘어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