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崎公立大学人文学部紀要 第23巻 第1号
1 オリンピックにおけるピクトグラムの登場
ピクトグラムを国際的なメジャーイベントに用いた初の例が 1936 年のオリンピックベルリン大会である。ベルリン大会は、ナチスによる国威向上イベントとしての色彩がきわめて強い大会となった。そのため、オリンピックの理念とはほど遠い大会となったが、テクノロジーの視点からみると、世界で初めてのテレビ中継が行われたり、大会運営に関しても組織だった運営が初めて行われた大会といえる。その一環として、ピクトグラムの用がオリンピックにおいて初めておこなわれた。使われたピクトグラム(図-2、3)は、各競技を表すもので、抽象化することで視覚的に不必要なものがそぎ落とされ、体系化されており非常に完成度は高い。ピクトグラムは、競技自体ではなく競技に使われる用具をモチーフに作成され、統一的な画像言語となった。
2 東京大会とピクトグラム
1964 年に開催された東京大会は、ピクトグラムに関して注目すべき大会となった。東京大会は、アジア初のオリンピックである。今までは、西欧先進国中心のオリンピック大会であったが、非ヨーロッパ言語圏での初の開催という点で、全く異なる文字システムを持つ文化圏の観客が集うことが想定されたため、非言語情報伝達手段としてのピクトグラムは大いに効果を期待された。
作成されたピクトグラムは、勝見勝により考案され、初めてピクトグラムが採用されたベルリン大会のものと比べ、競技自体の動作を基本に作成された(図-4)。また、競技のピクトグラムだけでなく、会場案内やショッピングセンター、郵便局、劇場などオリンピック競技とは直接関連がないもの(図-5)もピクトグラム化された案内表示が作られた。つまり、ピクトグラムの役割は、単に競技大会のためのピクトグラムから開催都市のためのピクトグラムへと大きく拡大した転機となった大会といえる。
東京大会以降、オリンピックは規模、動員観客数ともに拡大していく。また、東京大会でのピクトグラムの成功を踏まえて、その後の大会でもピクトグラムの採用が続いている。ピクトグラムの構造については、1972 年開催のミュンヘン大会でのオトル・アイヒャーによるデザインがその後のピクトグラムに大いに影響を与えた。アイヒャーは、東京大会での方法を踏襲しつつ、ピクトグラムのモチーフのステレオタイプ化・体系化を促進して、抽象化を限りなく進めた。そのため、非言語の情報伝達の側面も洗練化され、その影響はそれ以降のオリンピック大会に大いに与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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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の日本では外国人向けの案内標識が整備されていなかったため、海外からの来訪者に向けたもてなしの一環として考案されました。
これらのピクトグラムは、発起人でもあるデザイナーの勝見勝氏の「社会に還元すべき」という考えのもと、著作権が放棄され、全世界に広まっていき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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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ュンヘンオリンピックでのアイデンティティ・デザインの中で、オトル・アイヒャーの功績としてとりわけ広く認められているのがピクトグラムです。競技種目から施設までの直感的で明瞭なピクトグラムシステムを構築しました。これは高く評価され、それ以降のオリンピックのピクトグラムの基準となりました。ピクトグラムで使われた人間のシルエットから、アイヒャーは「幾何学人間の父(father of the geometric man)」と呼ばれたりもします。
言葉がなくても情報を伝えることができるピクトグラムの価値と有用性を世界に知らしめたのが1964年に開催された東京オリンピックであることはよく知られています。オリンピックデザインチームのリーダーを託されたアイヒャーは、東京オリンピックのデザインプロジェクトを率いた勝見勝(かつみまさる)の意見を聞きます。そして、東京オリンピックのピクトグラムをベースにしながら、さらに緻密なグリッドとカラーパレットを厳格に用いて、今日のピクトグラムの基準と言えるシステムに高めたのがオトル・アイヒャーなのです。
てへぺろ
おそろしいです
미야자키 공립대학 인문 학부 기요 제 23 각권 1호
1 올림픽에 있어서의 픽토그램의 등장
픽토그램을국제적인 메이저 이벤트에 이용한 첫 예가 1936 년의 올림픽베를린 대회이다.베를린 대회는, 나치스에 의한 국위 향상 이벤트로서의 색채가 극히 강한 대회가 되었다.그 때문에, 올림픽의 이념과는만큼 먼 대회가 되었지만, 테크놀로지의 시점에서 보면, 세계에서 첫 TV 중계를 하거나 대회 운영에 관해서도 조직이었던 운영이 처음으로 행해진 대회라고 할 수 있다.그 일환으로서 픽토그램의 용무가 올림픽에 대하고 처음으로 행해졌다.사용된 픽토그램(그림 2, 3)은,각 경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상화 하는 것으로 시각적으로 불필요한 것이 배제해져 체계화되고 있어 매우 완성도는 높다.픽토그램은,경기 자체는 아니고 경기에 사용되는 용구를 모티프로 작성되어 통일적인 화상 언어가 되었다.
2도쿄 대회와 픽토그램
1964 년에 개최된 도쿄 대회는, 픽토그램에 관해서 주목해야 할 대회가 되었다.도쿄 대회는, 아시아 첫 올림픽이다.지금까지는, 서구 선진국 중심의 올림픽 대회였지만, 비유럽 언어권으로의 첫 개최라고 하는 점으로, 완전히 다른 문자 시스템을 가지는 문화권의 관객이 모이는 것이 상정되었기 때문에, 비언어 정보 전달 수단으로서의 픽토그램은 많이 효과가 기대되었다.
작성된 픽토그램은, 가쓰미 마사루에 의해 고안 되고 처음으로 픽토그램이 채용된 베를린 대회의 것과 비교해서경기 자체의
도쿄 대회 이후, 올림픽은 규모, 동원 관객수 모두 확대해 간다.또,도쿄 대회로의 픽토그램의 성공을 근거로 하고, 그 후의 대회에서도 픽토그램의 채용이 계속 되고 있다.픽토그램의 구조에 대해서는, 1972 년 개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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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일본에서는 외국인 전용의 안내 표지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로부터의 내방자에게 향한 대접의 일환으로서 고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픽토그램은, 발기인이기도 한 디자이너의 가쓰미 마사루씨의「사회에 환원해야 할 」이라고 하는 생각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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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올림픽으로의 아이덴티티·디자인 중(안)에서,오톨·아이햐의 공적으로서 특히 넓게 인정되고 있는 것이 픽토그램입니다.경기 종목으로부터 시설까지의 직감적으로 명료한 픽토그램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이것은 높게 평가되어그 이후의 올림픽의 픽토그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픽토그램으로 사용된 인간의 실루엣으로부터, 아이햐는 「기하학 인간의 아버지(father of the geometricman)」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말이 없어도 정보를 전할 수 있는픽토그램의 가치와 유용성을 세계에 알리게 했다것이1964년에 개최된 도쿄 올림픽인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올림픽 디자인 팀의 리더를 맡게 된 아이햐는,도쿄 올림픽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인솔한 가쓰미 마사루(한편 봐 뛰어나다)의 의견을 듣습니다.그리고,도쿄 올림픽의 픽토그램을 베이스로 하면서, 한층 더 치밀한 구라두와 칼라 팔레트를 엄격하게 이용하고,오늘의 픽토그램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에 높였다것이오톨·아이햐입니다.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