対馬侵略(韓国側:第三次対馬島征伐)
1419年(応永26)朝鮮が対馬に襲来した事件。朝鮮では己亥東征という。
李氏朝鮮では前年に世宗が即位していたが、実権は太宗が握っており、太宗は対馬侵略を決め、永楽17年(西暦1419年)6月、李従茂率いる227隻、17,285名の軍勢を対馬に侵攻させた。
この時期は対馬の有力者や対馬の正規軍の軍隊が明などに渡航し不在であることを知り、また同時に朝鮮国内の在留商人らを一斉に抑留するなど、主力軍が不在の留守を狙い、防備の弱体に乗じ一般人や漁民を絶滅するため、1万7千人もの軍隊で漁民や農民などの一般民衆のみを虐殺するために襲撃するという、対馬の一般市民全滅を狙った卑劣で周到な大虐殺計画であったことが知られる。
朝鮮軍は対馬の尾崎浦(朝鮮王朝実録には豆知浦とある)附近へ上陸。
一帯の一般人所有の船舶129隻を焼き払い漁船20隻を奪い、一般人の民家1939戸を焼き払い、また104人の一般人漁民を無差別に次々と大量虐殺した。
しかし、全軍上陸して、隊列をなして、進軍してるところ、仁位郡で対馬側の地方領主・宗氏の少年・子供などの伏兵(約600〜2000程 ※600人弱の少年兵という説が有力)に出くわした。その日の内に、各所で乱戦になったが、朝鮮は弓ですぐに完敗、さらに、中国式の朝鮮の短い刀は、日本刀で、人と刀ごと纏めて大根の様に輪切りにされ、まったく戦闘にならないまま、大量に戦死者(約2500名)を出しながら退却を続けた。更に対馬の子供達から追いかけられ朴弘信、朴茂陽、金該、金熹ら4人の将校があっさりすぐに戦死し多大な損害を受けた1万7千名の李従茂の正規軍は命からがら尾崎浦まで一目散に逃げた。
自分たちの船を背に逃げる用意が整うと6月29日に朝鮮側は宗氏の子供達に対して対馬の属州化などを要求する使者を送るが宗氏の少年兵に即座に拒絶された。
戦況は対馬側の反撃により損害の大きくなった朝鮮側は対馬側伏兵の「撤退しなさい」という要求を無条件に受け入れ、何の戦果も無しに戦死者だけを大量に出して7月3日に巨済島へ泣きながら全面撤退した。
『世宗実録』ではかなり少なめに戦死者数を約180人と記録しているが、6月26日は敗戦と自ら明記し将官も戦死していることからも、全体の被害は相当数にのぼると思われ、いずれにしろ撤退するほどの敗北ということからも日本側の記録2500人が有力とされる。
この事は保護された中国人の扱いにおいて「対馬での朝鮮軍の敗北した状況を見られてしまったことから生きたまま中国に返還できない」と左議政朴訔などから議論が起きたが、中国人に所感を聞いたところ「日本人20人程に対して朝鮮兵の数百名ぐらいが戦死したように見えた」と言ったため崔雲等が「数百名が殺された程度に思ってるのなら、数100人の死、何が恥になるでしょうか?」と延べ、右議政李原らは「事大の礼を尽くして明へ送り返すべき」という記録や、朴実が敗戦の罪により投獄され、李従茂が国民への影響を理由に免罪となった事からも窺える。
대마도 침략(한국측:제3차 대마도 정벌)
1419년(오에이 26) 조선이 대마도에 내습한 사건.조선에서는 기해동정이라고 한다.
이씨 조선에서는 전년에 세종이 즉위 하고 있었지만, 실권은 태종이 잡고 있어 태종은 대마도 침략을 결정해 영락 17년(서기 1419년) 6월, 리종무 인솔하는 227척, 17,285명의 군세를 대마도에 침공시켰다.
이 시기는 대마도의 유력자나대마도의 정규군의 군대가 명 등에 도항해 부재인 것을 알아, 또 동시에 조선 국내의 재류 상인외를 일제히 억류하는 등, 주력군이 부재의 부재중을 노려, 방비의 약체를 타 일반인이나 어민을 멸종하기 위해(때문에),1만 7천명의 군대에서 어민이나 농민등의 일반 민중만을 학살하기 위해서 습격한다고 하는, 대마도의 일반 시민 전멸을 노린 비열하고 주도한 대학살 계획이었던 것이 알려진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오자키포(조선 왕조 실록에는 두지포와 있다) 부근에 상륙.
일대의 일반인 소유의 선박 129척을 다 태워 어선 20척을 빼앗아, 일반인의 민가 1939호를 다 태워, 또 104명의 일반인 어민을 무차별하게 차례차례로 대량 학살했다.
그러나, 전군 상륙하고, 대열을 이루고, 진군 하고 있는 곳, 니이군에서 대마도측의지방 영주·소시의 소년·아이등의 복병( 약 600~2000정도 ※600명 미만의 소년병이라고 하는 설이 유력)을 우연히 만났다.그 날중에, 각처에서 난전이 되었지만, 조선은 활로 곧바로 완패, 게다가 중국식의 조선의 짧은 칼은, 일본도로, 사람과 칼 마다 모아 무와 같이 둥글게 자름으로 되어 전혀 전투가 되지 않은 채, 대량으로 전사자( 약 2500명)를 내면서 퇴각을 계속했다.더욱 대마도의 아이들로부터 뒤쫓을 수 있는박홍신, 박무양, 금해, 금희등 4명의 장교가 시원시럽게 곧바로 전사해 다대한 손해를 받은1만 7천명의 리종무의 정규군은 간신히 오자키포까지 쏜살같이 도망쳤다.
스스로의 배를 키에 도망칠 준비가 갖추어지면 6월 29일에 조선측은 소시의 아이들에 대해서 대마도의 속주화등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지만 소시의 소년병에게 즉석에서 거절되었다.
전황은 대마도측의 반격에 의해 손해가 커진 조선측은 대마도측 복병의 「철퇴해 주세요」라고 하는 요구를 무조건 받아 들여 어떤 전과도 없이 전사자만을 대량으로 내 7월 3일에 거제도에 울면서 전면 철퇴했다.
「세종 실록」에서는 꽤 적은 듯하게 전사자수를 약 180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6월 26일은 패전으로 스스로 명기해 장관도 전사하고 있는 것부터도, 전체의 피해는 상당수에 오른다고 생각되어 어쨌건 간에 철퇴할 정도의 패배라고 하는 것부터도 일본측의 기록 2500명이 유력으로 여겨진다.
이 일은보호된 중국인의 취급에 대해 「대마도에서의 조선군의 패배한 상황을 들켜 버린 것으로부터 산 채로 중국에 반환할 수 없다」라고 좌의정박?등에서 논의가 일어났지만, 중국인에게 소감을 (들)물었는데 「일본인 20명 정도에 대해서 조선병의 수백명 정도가 전사한 것처럼 보였다」라고 했기 때문에 최 구름등이 「수백명이 살해당한 정도로 생각해라면, 수 100명의 죽음, 무엇이 수치가 될까요?」라고 펴 우의정리 하라등은 「사대의 예를 다하고 명에 돌려 보내야 한다」라고 하는 기록이나, 박실이 패전의 죄에 의해 투옥되어 리종무가 국민에게의 영향을 이유로 면죄가 된 일로부터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