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梧洞戦闘
鳳梧洞戦闘時代 | 近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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発生 | 1920年 6月 7日 |
性格 | 戦闘 |
類型 | 事件 |
分野 | 歴史/近代史 |
関連人物/団体 | 洪範図, 催震動 |
関連場所 | 満洲鳳梧洞 |
要約 1920年満洲鳳梧洞から独立軍部隊が日本正規軍をかんなさせた戦闘.
歴史的背景
1920年 6月 4日独立軍洪範図(洪範図)・催震動(崔振東, 一名 明録) 部隊の 1個小隊が北間島画竜県(和竜県) ワルシンガング(月新江) サムドンザ(三屯子)を出発して豆満江を渡って咸境道宗姓君姜楊東に駐屯していた 1個小隊規模の日本軍憲兵国境警戒所を襲撃・撃破した.
当時日本軍は独立軍の国内進入前と代案(対岸)の独立軍の活発な活動に部屋秘策を講じていたから, 姜楊東の戦闘は大戦闘の口火になった. 急報を受けた日本軍南洋守備隊(南陽守備隊)は 1個中隊を出動させて反撃前を展開した.
独立軍司令部は 1個小隊をサムドンザ西南の方烽火里(烽火里)に待ち伏せさせた. そして少しの兵力で銃撃戦をしながら日本軍を誘導した. 日本軍が張りこみしている独立軍部隊の前まで追撃して来た時が 6月 6日午前 10時だった.
独立軍は 100m 高地で一斉に射撃を浴びせて 60人を射殺こんにちはだった. この時独立軍 2人が戦死して在留同胞 9人が流れ弾に当たって死亡した. この戦闘で抜群の専攻を立てた梨花である(李化日) 小将の巧みな柔道作戦は高く評価される.
このようになると, 日本軍第19師団長は歩兵少佐ヤスカと(安川二?)が指揮する歩兵及び機関銃隊 1個大隊を出動させた. 洪範図・催震動など独立軍首脳部では劣勢な兵力で優勢な敵と対決しようとすれば作戦上要旨を占領することが催上策と判断した.
そして北の方に退却して安山(安山) 里後方高地で水勢を取った. 6月 7日セビョックヤスカと部隊が前方 300mのがらんとした住まなかった里に突入すると張りこみの中だった独立軍が一斉に銃撃を加えた. ヤスカワブデはニヒミ(新美) 重大と力を合わせて応戦したが地理的悪條件と不意の不意打ちで相当な打撃を受けた.
また隊伍を整備したヤスカと部隊はYamazaki(山崎) 重大を主力で独立軍を追撃した. ヤスカと部隊が高麗領(高麗嶺) 西側に到着した時, 北方及び東北部屋高地で待ち伏せていた少数独立軍の熾烈な射撃を受けて惨敗に喫した.
日本軍は安山と高麗領二つの戦闘で 120人の戦死者を出した後にも重ねて独立軍の柔道作戦に巻きこまれて鳳梧洞に誘引された. 鳳梧洞戦闘はサムドンザ近所戦闘に引き続き展開された.
経過と結果
鳳梧洞は豆満江で 40里距離に位しているし高麗領の険峻した山なみが四方を屏風のように振り回されたえんえん数十里を伸びた谷地帯だ. 鳳梧洞には 100余好意民家が散らばっていたが独立軍足だまりの一つとして催震動の家族たちが住んでいた.
これら民家はサングチォン(北村)・中村(南村)・ハチォンなど 3個部落に散らばっていたし, サングチォンは鳳梧洞を代表する所で独立軍の訓練場があった.
独立軍は 6月 7日朝から日本軍の侵入に備えて洪範図と催震動の連合部隊を再編盛夏だった.
1・2・3・4中隊の各責任者でイチォンオ(李千五)・姜相貌(姜相模)・彊屍犯(姜時範)・ゾグォンシック(〓権植)を決めた. そして別に 2個中隊を置いた. 振付(安武)は司令部副官で, 二元(李園)は連帯部将校で, 催震動を司令官で, 洪範図を連隊長で決めた.
しかしこれは形式に過ぎなくて実際に鳳梧洞戦闘を勝利に導いた人は洪範図将軍だった. 作戦進行は次のようだ. 第1中隊はサングチォン西北団に, 第2中隊は東高地に, 第3中隊は北高地に, 第4中隊は瑞山南端密林の中に待ち伏せるようにした.
連隊長洪範図は直接 2個中隊を率いて西南山中腹に位して日本軍の先鋒が鳳梧洞語句をパスするように誘導するようにした. 日本軍主力部隊が独立軍が張りこみした包囲網に立ち入る頃に一斉に射撃を断行するようにした.
日本軍は独立軍の作戦計画どおり鳳梧洞サングチォン独立軍 700人が張りこみしている包囲網の中に入って来た. 洪範図将軍の命令に従って東・西・太鼓 3面で挟攻したら日本軍はどぎまぎしながら倒れた.
午後 3時少佐ヤスカとは加味なの(神谷) 重大と中西(中西) 小隊を指揮して東高地に待ち伏せた姜相貌重大に向けて反撃を試みた.
しかし姜相貌重大はこれを撃退して 100余人を射殺こんにちはだった. ここで日本軍は穏城遊園陣(柔遠鎭)で敗走こんにちはだった. この戦闘で日本軍は 157人の戦死者と 200余名の負傷者を出した.
一方我軍は将校 1人, 兵卒 3人が戦死して少しの負傷者を出しただけだ. この圧倒的な戦勝の原因は独立軍の高揚された詐欺と指揮官の予知, 地理的要旨を善用したすぐれた作戦計画に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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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鳳梧洞戰鬪시대 |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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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 1920년 6월 7일 |
성격 | 전투 |
유형 | 사건 |
분야 | 역사/근대사 |
관련 인물/단체 | 홍범도, 최진동 |
관련 장소 | 만주 봉오동 |
요약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 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독립군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최상책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安山) 촌락 후방 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新美)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했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야마자키(山崎)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방에 도착했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고 참패를 당하였다.
일본군은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경과와 결과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1·2·3·4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李千五)·강상모(姜相模)·강시범(姜時範)·조권식(曺權植)을 정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安武)는 사령부 부관으로, 이원(李園)은 연대부 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작전 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 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 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 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 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서·북 3면에서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神谷) 중대와 나카니시(中西) 소대를 지휘하여 동쪽 고지에 매복한 강상모 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상모 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柔遠鎭)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반면 아군은 장교 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따름이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