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年 8月, 致命的な敗北を繰り返えしていた日本海軍はとても久しぶりに会心のほほ笑みをすることができた. “悪くなった戦況を一番(回)に覆すことができる秘密兵器”の投入が初めて可視化されたからだ.
8月 16日 “秘密兵器”に乗る初特攻隊員たちが卒業したのに相次ぎ, 28日には該当の兵器が “はいてください(震洋)”という名前を受けて公式的に制式採用された. はいてください. それは “太平洋を搖るがしなさい”と言う日本海軍上層部の念願が盛られた名前だった.
海軍上層部の期待をいっぱいクルオモアッドンこの “シンヨトックビョルゴングギョックデ”に倍速されたことは, ヘグンビヘングイェグァヨンスブセング(海軍飛行予科練習生, 略称 “ヨカレン”) 出身の 10台重厚組少年たちだった. 始めから戦闘機操縦士に養成された人々は戦況の悪化とともに日本軍の航空機保有量が急減するようになりながら立つ席を失って行っていた. “シンヨトックビョルゴングギョックデ”は “取り柄消えた” 彼らが “国家”のために献身することができる新しい機会のように見えた.
しかし特攻隊に支援して実際に新要を向い合ったヨカレン少年たちは驚愕を禁じえなかった. 彼らが乗るようになる新要は 250kgの爆薬が搭載された永遠に約 5メートルのモーターボートに通らなかった. すなわち秘密兵器として見るとボートに爆弾を積んで敵艦船に激突する, 古代の化工船と違うことがない兵器だった. このボートを操作するようにするために海軍が彼らに割いた教育期間はやっと2ヶ月余りだった.
▲ 日本海軍上層部の期待を集めた秘密兵器 “はいてください” 日本海軍側は “命中にさえ成功したらただ一度のはいてください攻撃で敵空母を撃沈させることも可能だ”と判断した. |
c。 wiki commons |
長くは 2年の時間の間高難度の飛行技術を研いて来たヨカレン少年たちは, 自分たちの終着地がモーターボートに過ぎないという事実に虚脱感を感じた.
虚脱感で終わったらかえって幸いだったろう. 虚脱感はすぐ絶望感に変わった. ボートの材料は荒波に易しく折れるベニヤ(薄ら木材合板)だったし, ボートを動かすようにするモーターというのは結局自動車エンジンだった.
が不始末なボートに頼って, 特攻隊員たちは敵艦船を捜して数 kmの航海を忍耐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だ. 航海の中で事故を経験しないで無事に敵艦船と向い合うようになったところで, ボートの薄ら木材合板が時の射撃を耐えることができるはずがなかった. 時の射撃を運が良く避けて突進するのに成功すると言っても, 搭乗員の脱出対策みたいなことはなかったので彼らにおいてたまらないことは避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 はいてください特攻隊員だったKuboモリトさんの証言(2009年) “びっくりしたの. こんなあっけないことに私たちを焼いて爆弾と一緒に飛ばしてしまうということか? こんなに無惨なことが. ベニヤと, あなたたち分かる? ベニヤ板. 私たち指一つ, 拳でも穴を作ることができると. そんな品物に他書, 爆弾を積んで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なんて. あなたたちはどう思う?” |
c。 NHK 戦争証言アーカイブ |
自爆ボートの導入を初めて主張したこれは軍令部第2部長クロシマカメト(?島?人) 所長だった. 彼は連合艦隊司令長官Yamamoto李小路区(山本五十六) 大将の参謀として真珠湾空襲を含めた太平洋各地の作戦に従軍した人物だ.
ミドウェイ海戦以後続いた敗戦を木刀したクロシマ所長は, 状況を反転させるためには “誰も思い出すことができない奇妙な方策”が必要だと主張した. その方策でクロシマ所長が提示したことは外でない “爆薬が搭載されたモーターボートを利用した特攻”だった. このような主張に対して, 海軍軍令部は “新兵器”の条件で “重さが軽いこと”と “低予算で生産可能なこと”を注文した.
▲ はいてくださいボートの生産 海軍軍令部は “軽くて低予算で作ることができる特攻兵器”を要求した. この指針に従い, はいてくださいボートはベニヤ(薄ら木材合板)で作られた. ベニヤで作られたはいてくださいボートは, 時の銃撃はどころか荒波までも耐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
c。 NHK 戦争証言アーカイブ |
搭乗員の安全を保障することができないボートで敵に自爆して打撃を加えるという発想が実際政策と作戦に具現されたことは, 当時の帝国日本に横行した人名軽視風潮を極端的に現わす事例と評することができる. もちろん海軍内にも新要の運用に対して憂慮を示した一部常識的な人々がいた. 特にこれらは搭乗員の死が無条件的に前提される自爆戦術に疑問を抱いて “搭乗員が脱出して生還するようにできる方法”を講じなければならないと指摘した.
▲ 済州島松岳山に構築された日本軍海岸特攻陣地 日本軍は海岸に洞窟をほってはいてくださいボートを隠しておいた. 敵艦隊が近海に出現する時自爆攻撃をして時の上陸を源泉沮止するという発想だった. 日本軍は済州島にも米軍が上陸するはずと判断してはいてください部隊を配置した. |
c。 wiki commons |
新要に対する執着折らない日本海軍
1944年 10月レイテではない海戦で日本連合艦隊が潰滅されながら “特攻”に対する海軍上層部の執着はもっと深くなった. 特に新要はこれからもっと頻発するようになる米軍の上陸作戦を沮止する対策でもっと嘱望されるようになった.
これによってフィリピン, 沖繩, はなはだしくは済州島に至るまで, 将来連合軍との決戦が予想される主要地域ではいてください部隊たちが急派された. しかしもう連合軍が制海権と制空権をはっきりと掌握していた状況ではいてください部隊を積んだ日本軍輸送船は手軽いモックイッガムに過ぎなかった. 運が良くやっと目標地域まで到着してもそれで終りではなかった. 連合軍の空襲やボートの自主的な爆発事故によって出撃さえして見られなくて命を失う隊員たちが増えて行った.
出撃の機会を得てと言っても攻撃を成功させるこれといったaことがあるのではなかった. ただボートたちを一列横隊路展開して時の射撃を分散させるのが攻撃の成功可能性を高める唯一の方法だった. 自爆ボートを利用して時の上陸作戦を沮止するということははじめから虚荒された発想だったというのが戦争が持続すれば持続するほど明らかになった.
それでも海軍ははいてください運用に対する執着を折らなかった. 航空全力はもちろん受賞艦隊まで完破された戦争末期の海軍にあって, 新要を含めた “特攻兵器”たちは日本本土で殺到して来る連合軍に対立するほとんど唯一の希望だった.
もう帝国日本の負け色が確実に濃くなった 1945年 6月, 軍令副総長豊田ソエム(豊田副武) 大将は御前会議で “海軍は全軍(全軍) 特攻精神を徹底的にする”と発言した. すなわち本土決戦が起るようになればすべての海軍将兵を新要のような特攻作戦に投入するという意志を現わしたのだ.
ここに足でも合わせたようにその頃の言論には途方もなく誇張された新要の前科が重ねて報道された. 朝日新聞の地面には “時の侵攻が近くなれば近くなるほど (新要の) 威力がより一層大きくなるのが魅力”という内容の社説まで載せられた. 国民のおびただしい犠牲にもかかわらず戦争を続こうとした帝国指導部の狂気が, とうとうベニヤボートに通らない新要に対する話にならない礼賛にまでつながった.
▲ 自爆ボート新要のお父さんクロシマカメト所長 クロシマ所長ははいてください外にも人間魚雷カイテン, 人間ミサであるオカ, 人間機雷フクリュのような自爆兵器たちを立案するとか承認こんにちはだった. 敗戦後, クロシマ所長は処罰されるとか戦歿将兵たちに対する罪責感を現わす事なしに安楽な余生を送った. |
c。 wiki commons |
が質問に答えなければならない最大の責任を持っている人物は新要の立案者クロシマカメト所長を指折ることができる.
クロシマ所長は, 前後自分に不利な内容が敍述された海軍の主要文書たちを故意的に廃棄したという疑いを受けている. 結果的にクロシマ所長は戦争責任追及を兔れたし, 公職で追放される位にムタルするように一身の安危を保全した. 以後彼は燎微鏡会社の役員を勤めたし, 末年には宗教と哲学に凝って自ら “宇宙, 人間, 生命を研究”とあることを誇った.
宇宙と人間, 生命を研究しながらも, 自分が主導的に推進した自爆攻撃に動員されてから犠牲された将兵たちに対しては一抹の罪責感も感じ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だろう. 1965年, 肺癌によって 72歳を日記で死亡するまで, クロシマ所長が “シンヨトックビョルゴングギョックデ”を口に出す事は一番(回)もなかったと言う.
1944년 8월, 치명적인 패배를 거듭하고 있던 일본 해군은 아주 오랜만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악화된 전황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비밀병기"의 투입이 비로소 가시화됐기 때문이다.
8월 16일 "비밀병기"에 탑승할 첫 특공대원들이 졸업한 데 이어, 28일에는 해당 병기가 "신요(震洋)"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공식적으로 제식 채용됐다. 신요. 그것은 "태평양을 뒤흔들라"는 일본 해군 상층부의 염원이 담긴 이름이었다.
해군 상층부의 기대를 잔뜩 끌어모았던 이 "신요특별공격대"에 배속된 것은, 해군비행예과연습생(海軍飛行予科練習生, 약칭 "요카렌") 출신의 10대 중후반 소년들이었다. 애당초 전투기 조종사로 양성됐던 이들은 전황의 악화와 함께 일본군의 항공기 보유량이 급감하게 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신요특별공격대"는 "쓸모 없어진" 그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처럼 보였다.
그러나 특공대에 지원해 실제로 신요를 마주한 요카렌 소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타게 될 신요는 250kg의 폭약이 탑재된 길이 약 5미터의 모터 보트에 지나지 않았다. 즉 비밀병기라고 해봐야 보트에 폭탄을 싣고서 적 함선에 격돌하는, 고대의 화공선과 다를 것이 없는 병기였다. 이 보트를 조작하게 하기 위해 해군이 그들에게 할애한 교육기간은 겨우 두 달 남짓이었다.
▲ 일본 해군 상층부의 기대를 모았던 비밀병기 "신요" 일본 해군 측은 "명중에만 성공한다면 단 한번의 신요 공격으로 적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
ⓒ wiki commons |
길게는 2년의 시간동안 고난도의 비행기술을 연마해왔던 요카렌 소년들은, 자신들의 종착지가 모터 보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느꼈다.
허탈감으로 끝났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으리라. 허탈감은 곧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보트의 재료는 거친 파도에 쉽게 부러지는 베니어(얇은 목재 합판)였고, 보트를 움직이게 하는 모터라는 것은 결국 자동차 엔진이었다.
이 허술한 보트에 의지해, 특공대원들은 적 함선을 찾아 수 km의 항해를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항해 중 사고를 겪지 않고 무사히 적 함선과 마주하게 된들, 보트의 얇은 목재 합판이 적의 사격을 견뎌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적의 사격을 운 좋게 피하여 돌진하는 데 성공한다 하여도, 탑승원의 탈출 대책 같은 것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있어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 신요 특공대원이었던 쿠보 모리토 씨의 증언(2009년) "깜짝 놀랐어. 이런 어이없는 것에 우리를 태워서 폭탄이랑 같이 날려버린다는 건가? 이렇게 끔찍할 수가. 베니어라고, 당신들 알아? 베니어 판자. 우리 손가락 하나, 주먹으로도 구멍을 낼 수 있다고. 그따위 물건에 타서, 폭탄을 싣고 가야하다니.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해?" |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
자폭보트의 도입을 처음 주장한 이는 군령부 제2부장 쿠로시마 카메토(黒島亀人) 소장이었다. 그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대장의 참모로서 진주만 공습을 비롯한 태평양 각지의 작전에 종군했던 인물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계속되던 패전을 목도하던 쿠로시마 소장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할 기묘한 방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방책으로 쿠로시마 소장이 제시한 것은 다름아닌 "폭약이 탑재된 모터보트를 이용한 특공"이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해군 군령부는 "신병기"의 조건으로 "무게가 가벼울 것"과 "저예산으로 생산 가능할 것"을 주문했다.
▲ 신요 보트의 생산 해군 군령부는 "가볍고도 저예산으로 만들 수 있는 특공병기"를 요구했다. 이 지침에 따라, 신요 보트는 베니어(얇은 목재 합판)로 만들어졌다. 베니어로 만들어진 신요 보트는, 적의 총격은 커녕 거친 파도조차도 견디지 못했다. |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
탑승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보트로 적에게 자폭해 타격을 입힌다는 발상이 실제 정책과 작전으로 구현된 것은, 당시의 제국 일본에 횡행했던 인명경시 풍조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 평할 수 있다. 물론 해군 내에도 신요의 운용에 대해 우려를 표하던 일부 상식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은 탑승원의 죽음이 무조건적으로 전제되는 자폭 전술에 의문을 품고서 "탑승원이 탈출하여 생환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제주도 송악산에 구축된 일본군 해안특공진지 일본군은 해안에 동굴을 파고서 신요 보트를 숨겨두었다. 적 함대가 근해에 출현할 때 자폭공격을 벌여 적의 상륙을 원천 저지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일본군은 제주도에도 미군이 상륙할 것이라 판단하고 신요 부대를 배치하였다. |
ⓒ wiki commons |
신요에 대한 집착 꺾지 않은 일본 해군
1944년 10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궤멸되면서 "특공"에 대한 해군 상층부의 집착은 더욱 심화됐다. 특히 신요는 앞으로 더욱 빈발하게 될 미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할 대책으로 더욱 촉망받게 됐다.
이에 따라 필리핀, 오키나와, 심지어는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장차 연합군과의 결전이 예상되는 주요 지역으로 신요 부대들이 급파됐다. 그러나 이미 연합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신요 부대를 실은 일본군 수송선은 손쉬운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운 좋게 겨우 목표 지역까지 도착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연합군의 공습이나 보트의 자체적인 폭발 사고로 인해 출격조차 못해보고 목숨을 잃는 대원들이 늘어만 갔다.
출격의 기회를 얻는다 하여도 공격을 성공시킬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보트들을 일렬횡대로 전개해 적의 사격을 분산시키는 것이 공격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폭보트를 이용해 적의 상륙작전을 저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허황된 발상이었다는 게 전쟁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해군은 신요 운용에 대한 집착을 꺾지 않았다. 항공전력은 물론 수상함대까지 완파된 전쟁 말기의 해군에게 있어, 신요를 비롯한 "특공병기"들은 일본 본토로 쇄도해올 연합군에 맞설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미 제국 일본의 패색이 확연하게 짙어진 1945년 6월, 군령부총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 대장은 어전회의에서 "해군은 전군(全軍) 특공정신을 철저히 한다"고 발언했다. 즉 본토결전이 벌어지게 되면 모든 해군 장병을 신요와 같은 특공작전에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에 발이라도 맞춘 듯 그 즈음의 언론에는 터무니없이 과장된 신요의 전과가 거듭 보도됐다. 아사히 신문의 지면에는 "적의 침공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신요의) 위력이 더욱 더 커지는 것이 매력"이라는 내용의 사설까지 실렸다.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던 제국 지도부의 광기가, 급기야는 베니어 보트에 지나지 않는 신요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예찬으로까지 이어졌다.
▲ 자폭보트 신요의 아버지 쿠로시마 카메토 소장 쿠로시마 소장은 신요 외에도 인간어뢰 카이텐, 인간미사일 오카, 인간기뢰 후쿠류와 같은 자폭병기들을 입안하거나 승인하였다. 패전 후, 쿠로시마 소장은 처벌받거나 전몰 장병들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는 일 없이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
ⓒ wiki commons |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는 인물은 신요의 입안자 쿠로시마 카메토 소장을 꼽을 수 있다.
쿠로시마 소장은, 전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서술된 해군의 주요 문서들을 고의적으로 폐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쿠로시마 소장은 전쟁 책임 추궁을 면했고, 공직에서 추방되는 정도로 무탈하게 일신의 안위를 보전했다. 이후 그는 현미경 회사의 임원을 지냈고, 말년에는 종교와 철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우주, 인간, 생명을 연구"하고 있음을 자랑했다.
우주와 인간, 생명을 연구하면서도, 자신이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자폭 공격에 동원됐다가 희생된 장병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1965년, 폐암으로 인해 72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쿠로시마 소장이 "신요특별공격대"를 입에 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