埋もれた名前<6>朝_鮮半島出身者 多数犠牲、解明には壁
「どこかにもっと資料があれば…」。広島市東区にある在日本大韓民国民団(民団)広島県地方本部で、被爆2世の権俊五(クォン・ジュノ)さん(70)が深いため息をついた。韓国原爆被害者対策特別委員会の副委員長を務めている。
■徴用・徴兵 資料乏しく
1945年8月6日のあの日、日本統治下の朝_鮮半島から貧困の中で、あるいは徴用・徴兵されて広島に渡ってきていた多くの朝_鮮半島出身者と家族が被爆した。権さんたちは毎夏、平和記念公園(中区)の韓国人原爆犠牲者慰霊碑の前に集い同胞を追悼している。
ただ、韓国・朝_鮮人の原爆被害の実態は不明な点が多い。広島、長崎両市が76年に国連に提出した「核兵器廃絶」を求める要請書は、45年中の犠牲者を全体で「14万人±1万人」と推計したが、朝_鮮半島出身者について「きわめて明らかでない」と指摘した。
▽食い違う推計値
44年末の内務省警保局調査によると、広島県全域に8万1863人の朝_鮮人がいた。79年に広島、長崎両市が刊行した「広島・長崎の原爆災害」(岩波書店)は、広島市で2万5千~2万8千人が被爆し、5千~8千人の範囲で死亡したと推測。一方ソウルで結成された韓国原爆被害者協会は72年、広島で5万人が被爆してうち3万人が死亡したとの推定を発表している。
「犠牲者が多かったのは間違いないが、どれも確固とした根拠に基づく数字とまでは言えない」と原爆資料館。4月に館内展示の更新を完了したが、具体的な推計値は示していない。
日韓両政府が全容を調査したことはなく、特に徴用・徴兵に関する原爆被害の公的資料は乏しい。ならば市の情報を、と権さんは市原爆被害対策部に相談した。戦後、被爆した両親の苦労を見てきた自分は「限りなく在日韓国人被爆者の1世に近い立場」。2世として次世代に記憶をつなぐことへの思いは強い。
しかし市の原爆死没者名簿も、原爆被爆者動態調査も、国籍や出身地などの細かい分類はされていない。朝_鮮半島出身者の名前を抜き出そうとしても、古い関連資料には「創氏改名」で強いられた日本名が記されている場合がある。日本の植民地支配という歴史の重しが「空白」の解明に影を落とす。
▽市民が現地調査
そもそも、市がつかんでいない原爆犠牲者も相当いるはずだ。
被爆後も日本で生き続けた人がいた一方で、祖国に渡った被爆者も多い。50年に始まった朝_鮮戦争や、日本からの帰還者への差別に直面し、戦後に辛酸をなめた人もいる。さらに「被爆者健康手帳は海外で失効する」とした旧厚生省通達を日本政府が2003年に廃止するまで、在外被爆者は援護の枠外に置かれた。
被爆者が提出する手帳交付の申請書は市にとって、原爆の犠牲になった家族の名前を把握する「情報源」にもなるはずだった。しかし、手帳がないまま死去した人は数知れない。
「市が調べていないのなら、市民にできることはないかと」。「韓国の原爆被害者を救援する市民の会」広島支部の中谷悦子支部長(70)は今春、被爆者が多く暮らすことから「韓国のヒロシマ」といわれる慶尚南道陜川(ハプちヨン)郡を訪ねた。地元に住んでいた被爆者故鄭基璋(チャン・ギチャン)さんは78年、郡内を訪ね歩いて調査結果をまとめている。
被爆したのは5001人で、約96%が広島だった。153人が日本で45年8月末までに亡くなり、268人が1年以内に死亡していた。「当時の調査票などの一次資料も残っていないか」。確認のため再訪するつもりだ。
(水川恭輔) 中国新聞
ソウルで結成された韓国原爆被害者協会は72年、広島で5万人が被爆してうち3万人が死亡したとの推定を発表
あくまでも推定の数字に過ぎなかった筈なのだが
いつの間にやらファクトとしての数字にすり替わってしまっている♪
つまり数字が一人歩きしているというのはこういうことなのです♪
あひゃひゃひゃ!
「어디엔가 더 자료가 있으면 」.히로시마시 히가시구에 있는 재일본대한민국 민단(민단) 히로시마현 지방 본부에서, 피폭 2세의 권 5(쿠·주노)씨(70)가 깊기 때문에 한숨 돌렸다.한국 원폭 피해자 대책 특별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징용·징병 자료 부족하고
1945년 8월 6일의 그 일본, 일본 통치하의 조_선반도로부터 빈곤 중(안)에서, 있다 있어는 징용·징병되고 히로시마에 건너 오고 있던 많은 조_선반도 출신자와 가족이 피폭했다.켄씨들은 매년 여름, 평화 기념 공원(나카구)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의 전에 모여 동포를 추도 하고 있다.
단지, 한국·조_선인의 원폭 피해의 실태는 불명한 점이 많다.히로시마, 나가사키 양시가 76년에 유엔에 제출한 「핵병기 폐절」을 요구하는 요청서는, 45년중의 희생자를 전체로 「14만명۫만명」이라고 추계했지만, 조_선반도 출신자에 대해 「극히 분명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어긋나는 추계치
「희생자가 많았던 것은 틀림없지만, 모두 확고한 근거로 기초를 두는 숫자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다」라고 원폭 자료관.4월에 관내 전시의 갱신을 완료했지만, 구체적인 추계치는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일한 양정부가 전모를 조사했던 적은 없고, 특히 징용·징병에 관한 원폭 피해의 공적 자료는 부족하다.(이)라면 시의 정보를, 이라고 켄씨는 이치하라폭피해 대책부에 상담했다.전후, 피폭한 부모님의 고생을 봐 온 자신은 「한없이 재일 한국인 피폭자의 1세에 가까운 입장」.2세로서 차세대에게 기억을 잇는 것에의 생각은 강하다.
그러나 시의 원폭 사망자 명부도, 원폭 피폭자 동태 조사도, 국적이나 출신지등이 세세한 분류는 되어 있지 않다.조_선반도 출신자의 이름을 뽑아내려고 해도, 낡은 관련 자료에는 「창씨개명」으로 강요당한 일본명이 기록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일본의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역사의 누름돌이 「공백」의 해명에 그림자를 떨어뜨린다.
▽시민이 현지조사
원래, 시가 잡지 않은 원폭 희생자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피폭 후도 일본에서 살아 나간 사람이 있던 한편, 조국에 건넌 피폭자도 많다.50년에 시작한 조_선전쟁이나, 일본으로부터의 귀환자에게의 차별로 직면해, 전후에 신산을 핥은 사람도 있다.한층 더 「피폭자 건강 수첩은 해외에서 실효한다」라고 한 구후생성 통지를 일본 정부가 2003년에 폐지할 때까지/`A재외 피폭자는 원호의 범위 밖에 놓여졌다.
피폭자가 제출하는 수첩 교부의 신청서는 시에 있어서, 원폭의 희생이 된 가족의 이름을 파악하는 「정보원」으로도 될 것이었다.그러나, 수첩이 없는 채 사망한 사람은 수 모르다.
「시가 조사하지 않다면, 시민으로 할 수 것은 없을까」.「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의 회」히로시마 지부의 나카타니 에츠코 지부장(70)은 이번 봄, 피폭자가 대부분 사는 것부터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말해지는 경상남도합천(하프욘) 군을 방문했다.현지에 살고 있던 피폭자 고 정기장(장·기체)씨는 78년, 군나이를 찾아 다니며 조사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피폭한 것은 5001명으로, 약 96%가 히로시마였다.153명이 일본에서 45년 8월말까지 죽어, 268명이 1년 이내에 사망해 있었다.「당시의 조사표등의 일차 자료도 남지 않은가」.확인을 위해 재방할 생각이다.
(미즈카와 야스시보) 중국 신문
https://www.chugoku-np.co.jp/column/article/article.php?comment_id=593904&comment_sub_id=0&category_id=1183
서울에서 결성된 한국 원폭 피해자 협회는 72년, 히로시마에서 5만명이 피폭해 중 3만명이 사망했다는 추정을 발표
어디까지나 추정의 숫자에 지나지 않았던 괄이지만
어느새든지 팩트로서의 숫자에 소매치기 바뀌어 버리고 있다♪
즉 숫자가 한 명 걸어 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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