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人「韓国軍にも慰安婦が存在した‥」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国家は70年間そっぽを向いている‥ 韓国の反応
朝鮮戦争の時も「慰安婦」が存在したという事実が19年前に初めて世間に明らかになった。金貴玉(キム·グィオク、59)漢城(ハンソン)大学教授の02年の論文を通じてだった。しかし、朝鮮戦争71周年を迎えた今年までも韓国軍慰安婦はまともに照明されていない。
日本軍慰安婦とは、また別次元の抑圧と偏見に押されて避けて証言も全く出ずにいる実情だ。キム教授は24日、韓国日報とのインタビューで「韓国が未来を眺めるためては過去を確かめなければならない」、「国家レベルで韓国軍慰安婦被害者に対する明確な調査と謝罪が行わ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調した。
韓国軍資料にも記録された「慰安婦」
朝鮮戦争中に韓国軍慰安婦が動員された時点は正確に明らかになっていない。金教授は「1951年の秋ぐらいに戦争が小康状態を迎え、戦線が現在、休戦ライン付近に固着された時、軍人管理を名目に、慰安婦が導入された可能性が高い」という立場だ。
ただ、慰安婦の運営の事実は様々な史料として立証されると金教授は説明した。例えば1952年12月30日付の東亜日報には「韓国軍の為の慰安所が必要だ」という内容の読者投稿が掲載され、翌年の停戦協定締結後の11月16日付のジャギョン新聞には「陸軍会館の4カ所に韓国軍慰安所を増設する」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た。
韓国軍慰安婦の存在は、軍の公式資料でも確認される。金教授は1956年に陸軍本部が編纂した「後方戦史(人事編)」で、戦争中に後方支援業務の名目で「特殊慰安隊」を設置したという記録を確認した。この本には、慰安婦を’小隊’に編制して運営した記録の一部が残っているが、これらを総合すれば、ソウル3個小隊と江陵3個小隊だけに128人の慰安婦があったという試算が出ている。
金教授は「最近、江原道高城(カンウォンド・コソン)・襄陽などで慰安婦が動員された形跡が追加で発見された」、「公式的な運営だけでなく、各部隊が自主的に慰安所を運営した可能性も考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と話した。
参戦、将校や捕虜が韓国軍慰安婦の実体を証言した記録も少なくない。金教授が1996年11月、江原道の束草(ソクチョ)でインタビューしたウォルナムミンは韓国軍に民間人捕虜になった時は従軍慰安婦を見たと回顧した。
彼は「慰安婦がいた。北朝鮮からの言葉遣いを使わず、軍人を慰問する仕事をした」と述べた。蔡命新(チェ・ミョンシン)・チャギュホン・キムヒオ将軍の回顧録にも、国軍に向けた慰安婦が割り当てられたという内容を探すことができる。
売春に関する誤解·民族主義、性売買について、被害証言は難しい
女性を戦争に性奴隷として動員した反人倫行為という点で、韓国軍慰安婦は自ずと日本軍慰安婦を連想させる。 しかし、2人の間には決定的な違いがある。韓国軍慰安婦被害者の中には被害事実を公開的に明らかにした人がまだ一人もないということだ。金教授も長い間、うわさをたよりに2人の被害者に会ったが、彼女らは存在を明らかにするだけでなく、具体的な被害事実の供述も拒否したという。
金教授は「日本軍慰安婦被害者は当時、国権を侵奪した日本を加害者とあぶりだすことができるが、韓国軍慰安婦の場合、加害者と被害者が韓民族に指定されているため、被害を証言し難い」と指摘した。
金教授が会った女性は、韓国軍慰安婦に連れられ、避けて直前の軍人の好意で釈放された後、彼と結婚したと供述した。 実際の慰安婦に動員された女性の多くはこのような’強制結婚’を通じて被害事実がなかったこと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
民間で売春女性を募集して韓国軍慰安婦を運営したという主張も被害者を隠れてしまう。金教授は「こうした主張は事実ではない」と断言する。慰安婦が公開募集の形で運営されたという証拠がまったくなく、むしろ被害女性らが前方地域に’強制出張’に行ったという証言が出るなど、組織的統制情況がはっきりしているというのだ。
金教授は「韓国軍慰安婦は当時、陸軍本部企画によって制度化されて国家体制の下でいたと見るのが穏当だ」と指摘した。
より根本的には男性中心的な性認識が慰安婦問題の照明を遮断すると金教授は指摘する。戦時中は軍人の性欲が抑えられた状態だったので、民間人対象の性的暴行を防ぐためにも慰安所が必要だという世論が支配的だったという。戦後も被害当事者たちが出られない環境であり、慰安婦の存在を証言した一部の男性たちも、被害者たちを残念に思う感情を現しただけで、これを深刻な人権じゅうりんと扱われてはいなかった。
政府は70年間口を閉ざす…「国家が責任を負わなければ」
金教授は研究を進める間、国家レベルで韓国軍慰安婦の歴史を隠そうと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何度も体感したという。02年の論文が発表された後、国防部は当時、金教授が所属していた学校側に連絡し、研究の自制を求めるなど、外圧を加えた。慰安婦の存在を立証する決定的記録物である’後方戦士’は軍事編纂研究所で姿を消したりもした。
政府は今まで韓国軍慰安婦問題を言及さえしたことがない。2005~2010年に活動した第1期真実和解に向けた過去史整理委員会は、民間人虐殺を含めて朝鮮戦争当時に行われた国家暴力事件をいくつも調査したが、いざ韓国軍慰安婦は取り上げなかった。金教授は「昨年、大統領府で韓国軍慰安婦の真相究明に関心を示し、連絡をしてきたが、彼だけ、実際の努力はなかった」と話した。
金教授は、韓国軍慰安婦が厳然とした国家的犯罪であり、国際的な責任も明確と強調した。金教授は「国連安全保障理事会が2000年満場一致で採択した’女性・平和・安保に関する決議案’によると、国際戦争であれ内戦であれ、性的暴力被害者に対して国家が真相究明・謝罪・解決することを勧告している」、「韓国も、同決議案に署名した国家であり、加害主体として韓国軍慰安婦の事態に責任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話した。
朝鮮戦争の時も「慰安婦」が存在したという事実が19年前に初めて世間に明らかになった。金貴玉(キム·グィオク、59)漢城(ハンソン)大学教授の02年の論文を通じてだった。しかし、朝鮮戦争71周年を迎えた今年までも韓国軍慰安婦はまともに照明されていない。
日本軍慰安婦とは、また別次元の抑圧と偏見に押されて避けて証言も全く出ずにいる実情だ。キム教授は24日、韓国日報とのインタビューで「韓国が未来を眺めるためては過去を確かめなければならない」、「国家レベルで韓国軍慰安婦被害者に対する明確な調査と謝罪が行わ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調した。
韓国軍資料にも記録された「慰安婦」
朝鮮戦争中に韓国軍慰安婦が動員された時点は正確に明らかになっていない。金教授は「1951年の秋ぐらいに戦争が小康状態を迎え、戦線が現在、休戦ライン付近に固着された時、軍人管理を名目に、慰安婦が導入された可能性が高い」という立場だ。
ただ、慰安婦の運営の事実は様々な史料として立証されると金教授は説明した。例えば1952年12月30日付の東亜日報には「韓国軍の為の慰安所が必要だ」という内容の読者投稿が掲載され、翌年の停戦協定締結後の11月16日付のジャギョン新聞には「陸軍会館の4カ所に韓国軍慰安所を増設する」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た。
韓国軍慰安婦の存在は、軍の公式資料でも確認される。金教授は1956年に陸軍本部が編纂した「後方戦史(人事編)」で、戦争中に後方支援業務の名目で「特殊慰安隊」を設置したという記録を確認した。この本には、慰安婦を’小隊’に編制して運営した記録の一部が残っているが、これらを総合すれば、ソウル3個小隊と江陵3個小隊だけに128人の慰安婦があったという試算が出ている。
金教授は「最近、江原道高城(カンウォンド・コソン)・襄陽などで慰安婦が動員された形跡が追加で発見された」、「公式的な運営だけでなく、各部隊が自主的に慰安所を運営した可能性も考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と話した。
参戦、将校や捕虜が韓国軍慰安婦の実体を証言した記録も少なくない。金教授が1996年11月、江原道の束草(ソクチョ)でインタビューしたウォルナムミンは韓国軍に民間人捕虜になった時は従軍慰安婦を見たと回顧した。
彼は「慰安婦がいた。北朝鮮からの言葉遣いを使わず、軍人を慰問する仕事をした」と述べた。蔡命新(チェ・ミョンシン)・チャギュホン・キムヒオ将軍の回顧録にも、国軍に向けた慰安婦が割り当てられたという内容を探すことができる。
売春に関する誤解·民族主義、性売買について、被害証言は難しい
女性を戦争に性奴隷として動員した反人倫行為という点で、韓国軍慰安婦は自ずと日本軍慰安婦を連想させる。 しかし、2人の間には決定的な違いがある。韓国軍慰安婦被害者の中には被害事実を公開的に明らかにした人がまだ一人もないということだ。金教授も長い間、うわさをたよりに2人の被害者に会ったが、彼女らは存在を明らかにするだけでなく、具体的な被害事実の供述も拒否したという。
金教授は「日本軍慰安婦被害者は当時、国権を侵奪した日本を加害者とあぶりだすことができるが、韓国軍慰安婦の場合、加害者と被害者が韓民族に指定されているため、被害を証言し難い」と指摘した。
金教授が会った女性は、韓国軍慰安婦に連れられ、避けて直前の軍人の好意で釈放された後、彼と結婚したと供述した。 実際の慰安婦に動員された女性の多くはこのような’強制結婚’を通じて被害事実がなかったこと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
民間で売春女性を募集して韓国軍慰安婦を運営したという主張も被害者を隠れてしまう。金教授は「こうした主張は事実ではない」と断言する。慰安婦が公開募集の形で運営されたという証拠がまったくなく、むしろ被害女性らが前方地域に’強制出張’に行ったという証言が出るなど、組織的統制情況がはっきりしているというのだ。
金教授は「韓国軍慰安婦は当時、陸軍本部企画によって制度化されて国家体制の下でいたと見るのが穏当だ」と指摘した。
より根本的には男性中心的な性認識が慰安婦問題の照明を遮断すると金教授は指摘する。戦時中は軍人の性欲が抑えられた状態だったので、民間人対象の性的暴行を防ぐためにも慰安所が必要だという世論が支配的だったという。戦後も被害当事者たちが出られない環境であり、慰安婦の存在を証言した一部の男性たちも、被害者たちを残念に思う感情を現しただけで、これを深刻な人権じゅうりんと扱われてはいなかった。
政府は70年間口を閉ざす…「国家が責任を負わなければ」
金教授は研究を進める間、国家レベルで韓国軍慰安婦の歴史を隠そうと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何度も体感したという。02年の論文が発表された後、国防部は当時、金教授が所属していた学校側に連絡し、研究の自制を求めるなど、外圧を加えた。慰安婦の存在を立証する決定的記録物である’後方戦士’は軍事編纂研究所で姿を消したりもした。
政府は今まで韓国軍慰安婦問題を言及さえしたことがない。2005~2010年に活動した第1期真実和解に向けた過去史整理委員会は、民間人虐殺を含めて朝鮮戦争当時に行われた国家暴力事件をいくつも調査したが、いざ韓国軍慰安婦は取り上げなかった。金教授は「昨年、大統領府で韓国軍慰安婦の真相究明に関心を示し、連絡をしてきたが、彼だけ、実際の努力はなかった」と話した。
金教授は、韓国軍慰安婦が厳然とした国家的犯罪であり、国際的な責任も明確と強調した。金教授は「国連安全保障理事会が2000年満場一致で採択した’女性・平和・安保に関する決議案’によると、国際戦争であれ内戦であれ、性的暴力被害者に対して国家が真相究明・謝罪・解決することを勧告している」、「韓国も、同決議案に署名した国家であり、加害主体として韓国軍慰安婦の事態に責任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話した。
한국군 위안부, 한국군에게도 위안부가 존재한,
한국인 「한국군에게도 위안부가 존재했다‥」한국 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국가는 70년간 외면하고 있다‥ 한국의 반응
한국 전쟁때도 「위안부」가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이 19년전에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금귀옥(김·그오크, 59) 한성(한 손) 대학교수의 02년의 논문을 통해서였다.그러나, 한국 전쟁 71주년을 맞이한 금년까지도 한국군 위안부는 온전히 조명 되어 있지 않다.
일본군위안부란, 또 별차원의 억압과 편견에 밀려 피해 증언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김 교수는 24일, 한국 일보와의 인터뷰로 「한국이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라고는 과거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 레벨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조사와 사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한국군 자료에도 기록된 「위안부」
한국 전쟁중에 한국군 위안부가 동원된 시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김 교수는 「1951년의 가을 정도로 전쟁이 소강 상태를 맞이해 전선이 현재, 휴전 라인 부근에 고착되었을 때, 군인 관리를 명목에, 위안부가 도입된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는 입장이다.
단지, 위안부의 운영의 사실은 님 들인 사료로서 입증되면 김 교수는 설명했다.예를 들면 1952년 12월 30 일자의 동아일보에는 「한국군을 위한 위안소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내용의 독자 투고가 게재되어 다음 해의 정전협정 체결 후의 11월 16 일자의 쟈골 신문에는 「육군 회관의 4개소에 한국군 위안소를 증설한다」라고 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는, 군의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된다.김 교수는 1956년에 육군 본부가 편찬 한 「후방 전사(인사편)」로, 전쟁중에 후방 지원 업무의 명목으로 「특수 위안대」를 설치했다고 하는 기록을 확인했다.이 책에는, 위안부를소대에 편제 해 운영한 기록의 일부가 남아 있지만, 이것들을 종합 하면,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인 만큼 128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하는 시산이 나와 있다.
김 교수는 「최근, 강원도 타카기(칸워드·코손)·노보루 햇빛등에서 위안부가 동원된 형적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운영 뿐만이 아니라, 각부대가 자주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한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참전, 장교나 포로가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를 증언한 기록도 적지 않다.김 교수가 1996년 11월, 강원도의 속초(속초)에서 인터뷰 한 워르남민은 한국군에게 민간인 포로가 되었을 때는 종군위안부를 보았다고 회고 했다.
그는 「위안부가 있었다.북한으로부터의 말씨를 사용하지 않고, 군인을 위문 하는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채명신(최·몰신)·체규혼·킴히오 장군의 회고록에도, 국군을 향한 위안부가 할당할 수 있었다고 하는 내용 (을)를 찾을 수 있다.
매춘에 관한 오해·민족주의, 성 매매에 대해서, 피해 증언은 어렵다
여성을 전쟁에 성 노예로서 동원한 반인륜 행위라고 하는 점으로, 한국군 위안부는 스스로 일본군위안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2명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중에는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한 사람이 아직 한 명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김 교수도 오랫동안, 소문을 의지하여 2명의 피해자를 만났지만, 그녀들은 존재를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피해 사실의 진술도 거부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당시 , 국권을 침탈 한 일본을 가해자와 상 낼 수 있지만, 한국군 위안부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민족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피해를 증언 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만난 여성은, 한국군 위안부 에 이끌려 피해 직전의 군인의 호의로 석방된 후, 그와 결혼했다고 진술했다.실제의 위안부에게 동원된 여성의 상당수는 이러한강제 결혼을 통해서 피해 사실이 없었던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민간으로 매춘 여성을 모집해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했다고 하는 주장도 피해자를 숨어 버린다.김 교수는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위안부가 공개 모집의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하는 증거가 전혀 없고, 오히려 피해 여성등이 전방 지역에강제 출장하러 갔다고 하는 증언이 나오는 등, 조직적 통제 정황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는 당시 , 육군 본부 기획에 의해서 제도화되어 국가 체제아래에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라고 지적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성 중심적인 성 인식이 위안부 문제의 조명을 차단하면 김 교수는 지적한다.전시중은 군인의 성욕이 억제된 상태였으므로, 민간인 대상의 성적 폭행을 막기 위해서도 위안소가 필요하다고 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전후도 피해 당사자들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이며,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한 일부의 남성들도, 피해자들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감정을 나타낸 것만으로, 이것을 심각한 인권 유린과 다루어지지 않았었다.
정부는 70년간구를 닫는 「국가가 책임을 부?`□네 차면」
김 교수는 연구를 진행시키는 동안, 국가 레벨로 한국군 위안부의 역사를 숨기려 하고 있는 것을 몇번이나 체감 했다고 한다.02년의 논문이 발표된 후, 국방부는 당시 , 김 교수가 소속해 있던 학교 측에 연락해, 연구의 자제를 요구하는 등, 외압을 더했다.위안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결정적 기록물인후방 전사는 군사 편찬 연구소에서 자취을 감추기도 했다.
정부는 지금까지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마저 했던 적이 없다.2005~2010해에 활동한 제1기 진실 화해를 향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민간인 학살을 포함해 한국 전쟁 당시에 행해진 국가 폭력 사건을 얼마든지 조사했지만, 막상 한국군 위안부는 다루지 않았다.김 교수는 「작년, 대통령부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진상 구명에 관심을 나타내, 연락을 해 왔지만, 그만, 실제의 노력은 없었다」라고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가 엄연히 한 국가적 범죄이며, 국제적인 책임도 명확이라고 강조했다.김 교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2000년 만장 일치로 채택한여성·평화·안보에 관한 결의안에 의하면, 국제 전쟁이든 내전이든, 성적 폭력 피해자에 대해서 국가가 진상 구명·사죄·해결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국도, 동결의·`트에 서명한 국가이며, 가해 주체로서 한국군 위안부의 사태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했다.
한국 전쟁때도 「위안부」가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이 19년전에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금귀옥(김·그오크, 59) 한성(한 손) 대학교수의 02년의 논문을 통해서였다.그러나, 한국 전쟁 71주년을 맞이한 금년까지도 한국군 위안부는 온전히 조명 되어 있지 않다.
일본군위안부란, 또 별차원의 억압과 편견에 밀려 피해 증언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김 교수는 24일, 한국 일보와의 인터뷰로 「한국이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라고는 과거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 레벨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조사와 사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한국군 자료에도 기록된 「위안부」
한국 전쟁중에 한국군 위안부가 동원된 시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김 교수는 「1951년의 가을 정도로 전쟁이 소강 상태를 맞이해 전선이 현재, 휴전 라인 부근에 고착되었을 때, 군인 관리를 명목에, 위안부가 도입된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는 입장이다.
단지, 위안부의 운영의 사실은 님 들인 사료로서 입증되면 김 교수는 설명했다.예를 들면 1952년 12월 30 일자의 동아일보에는 「한국군을 위한 위안소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내용의 독자 투고가 게재되어 다음 해의 정전협정 체결 후의 11월 16 일자의 쟈골 신문에는 「육군 회관의 4개소에 한국군 위안소를 증설한다」라고 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는, 군의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된다.김 교수는 1956년에 육군 본부가 편찬 한 「후방 전사(인사편)」로, 전쟁중에 후방 지원 업무의 명목으로 「특수 위안대」를 설치했다고 하는 기록을 확인했다.이 책에는, 위안부를소대에 편제 해 운영한 기록의 일부가 남아 있지만, 이것들을 종합 하면,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인 만큼 128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하는 시산이 나와 있다.
김 교수는 「최근, 강원도 타카기(칸워드·코손)·노보루 햇빛등에서 위안부가 동원된 형적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운영 뿐만이 아니라, 각부대가 자주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한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참전, 장교나 포로가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를 증언한 기록도 적지 않다.김 교수가 1996년 11월, 강원도의 속초(속초)에서 인터뷰 한 워르남민은 한국군에게 민간인 포로가 되었을 때는 종군위안부를 보았다고 회고 했다.
그는 「위안부가 있었다.북한으로부터의 말씨를 사용하지 않고, 군인을 위문 하는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채명신(최·몰신)·체규혼·킴히오 장군의 회고록에도, 국군을 향한 위안부가 할당할 수 있었다고 하는 내용 (을)를 찾을 수 있다.
매춘에 관한 오해·민족주의, 성 매매에 대해서, 피해 증언은 어렵다
여성을 전쟁에 성 노예로서 동원한 반인륜 행위라고 하는 점으로, 한국군 위안부는 스스로 일본군위안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2명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중에는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한 사람이 아직 한 명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김 교수도 오랫동안, 소문을 의지하여 2명의 피해자를 만났지만, 그녀들은 존재를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피해 사실의 진술도 거부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당시 , 국권을 침탈 한 일본을 가해자와 상 낼 수 있지만, 한국군 위안부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민족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피해를 증언 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만난 여성은, 한국군 위안부 에 이끌려 피해 직전의 군인의 호의로 석방된 후, 그와 결혼했다고 진술했다.실제의 위안부에게 동원된 여성의 상당수는 이러한강제 결혼을 통해서 피해 사실이 없었던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민간으로 매춘 여성을 모집해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했다고 하는 주장도 피해자를 숨어 버린다.김 교수는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위안부가 공개 모집의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하는 증거가 전혀 없고, 오히려 피해 여성등이 전방 지역에강제 출장하러 갔다고 하는 증언이 나오는 등, 조직적 통제 정황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는 당시 , 육군 본부 기획에 의해서 제도화되어 국가 체제아래에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라고 지적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성 중심적인 성 인식이 위안부 문제의 조명을 차단하면 김 교수는 지적한다.전시중은 군인의 성욕이 억제된 상태였으므로, 민간인 대상의 성적 폭행을 막기 위해서도 위안소가 필요하다고 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전후도 피해 당사자들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이며,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한 일부의 남성들도, 피해자들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감정을 나타낸 것만으로, 이것을 심각한 인권 유린과 다루어지지 않았었다.
정부는 70년간구를 닫는 「국가가 책임을 부?`□네 차면」
김 교수는 연구를 진행시키는 동안, 국가 레벨로 한국군 위안부의 역사를 숨기려 하고 있는 것을 몇번이나 체감 했다고 한다.02년의 논문이 발표된 후, 국방부는 당시 , 김 교수가 소속해 있던 학교 측에 연락해, 연구의 자제를 요구하는 등, 외압을 더했다.위안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결정적 기록물인후방 전사는 군사 편찬 연구소에서 자취을 감추기도 했다.
정부는 지금까지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마저 했던 적이 없다.2005~2010해에 활동한 제1기 진실 화해를 향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민간인 학살을 포함해 한국 전쟁 당시에 행해진 국가 폭력 사건을 얼마든지 조사했지만, 막상 한국군 위안부는 다루지 않았다.김 교수는 「작년, 대통령부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진상 구명에 관심을 나타내, 연락을 해 왔지만, 그만, 실제의 노력은 없었다」라고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가 엄연히 한 국가적 범죄이며, 국제적인 책임도 명확이라고 강조했다.김 교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2000년 만장 일치로 채택한여성·평화·안보에 관한 결의안에 의하면, 국제 전쟁이든 내전이든, 성적 폭력 피해자에 대해서 국가가 진상 구명·사죄·해결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국도, 동결의·`트에 서명한 국가이며, 가해 주체로서 한국군 위안부의 사태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