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国人「なんで欧州は韓国を植民地化しなかったの?」(海外反応)
外国人「なんで欧州は韓国を植民地化しなかったの?」(海外反応)
投稿者
なぜ欧州勢は韓国を植民地にしなかったのか?
天然資源がたくさんあり日本と中国の間にある比較的小さな国である韓国は理想的な植民地だと思うのです しかしながら 日本と中国に支配された時代があった他はほかの東アジアの国ようにヨーロッパ勢が興味を示した事はなさそうです この理由に興味があります 何が私が知らない事があるのでしょうか
植民地を増やす第2波ではヨーロッパの国々は東アジアに影響力をふやそうとしたんだけど基本的には海を支配しようとしていたんだ たとえばドイツ 1871年に統合したばかりでのりおくれたかんがあったんだけど現在の青島のあたりの半島を借りていたんだ 実際に植民地にするよりも不凍港をもとめていたんだね 韓国ではなく中国を選んだのはその方が商売をするのに便利だったからだと思うよ
欧米の視点から 欧米諸国が韓国を植民地にしようとしなかった理由の1つは「中国とそっくり」だったからだとおもうよ 朝鮮半島にある資源はほとんど中国にもあってそれ以上必要としてなかったといえる 代わりに韓国はそのとうじ もっと大きな帝国主義のなかの政治的な駒としてつかわれた それがよくわかるのは 1905年の日露戦争でポーツマス条約で韓国は日本の保護領になった そのかわりに日本はフィリピンをアメリカにわたした フィリピンのほうが韓国よりも戦略的に重要だとアメリカが考えたからだね さらに 日本は半島を手に入れることでロシアの力をそぐ事ができたんだ
政治的に韓国は欧米に植民地にされていたわけではないけれどだからって影響を受けてなかったわけではなくて 日本の植民地だった時代から朝鮮半島で宣教師は積極的に活動していたんだ 宣教師は定義として政治的な物ではないんだけれど宣教師は文化的帝国主義の媒体となっていたんだ 宣教師は日本の韓国人への扱いを常に批判していてこれが1919年の3月の独立運動につながっていく
↑投稿者
コメントをありがとう 清ー中国の視点から韓国と日本との関係性に焦点をあてているのね
日本は世界のステージにおいて日清戦争のあとは植民地支配をするパワーとして認められていたのかしら? 帝国として韓国や台湾を支配するだけのステータスがあったのかし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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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うだね この時代にこの3国は無関係でいられなかった
「疑問なく」 植民地支配が出来たかってことに関してはさだかじゃないけど 韓国からは特別に反抗運動があったし 日本の首相 伊藤博文は韓国のナショナリストに 1909年に暗殺された 1919年3月の独立運動について書いてた人もいたね 1905年の日清戦争に勝った事で日本はこの地域の強国として認知されたのは確かだ 10年前にはロシアと戦争をするなんて考える事も出来なかったし この戦争に負けたことはロシアに取って国家の侮辱でありロシア革命につながった 皇帝にとっては2重の恥になっただろう
1945年から韓国は欧米に植民されていたという議論はなりたたないだろうか ソ連のパワーがその後中国に取って代わられるまで (1960年代くらい) で韓国が1980年くらいまでと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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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覚的にだけど 僕は1980年代初めに韓国に住んでた たくさんの人達が君の感覚に賛成してくれるとおもうし ソ連とアメリカは韓国政府に大きな影響があったっていうだろうしね
韓国は長い間 中国のつよい影響下にあり 清の力が弱まるのに従って日本が来て韓国を支配した 欧米が入ってくる前にってことですよ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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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とおりだね 韓国はいつも誰かに庇護されてる その結果限定的にしか広がれない 韓国の政府はそういう小さい事をするには反抗的だし 1895〜1904年の 「空位期間」を覗いては韓国の北部を支配してたといってもいい でもあっという間に日本にやられたよ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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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んで比較的小さい韓国がそんなに強かったんだろう? 清国のように大きな国がバックについてるっていう自信か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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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集権化だね 韓国は日本や中国よりもずっと中央集権してたんだ 日本が明治維新前にバルカニゼーションから封建国家になったのはよくしられているけど 同じような事が中国でもおこっていたのは知られていない 認定された人が地方にいって統治していたんだけど北京から指示が出ていたわけじゃなかったんだ
つまり中国と日本政府は支配層の支持を得る事が出来なければ地方から反乱が起きてくるわけだ
その点で韓国は政府が一晩でなくなるような心配はなかった 粛正はよくある事だったしそれで政府がなくなるような事はなかった 19世紀の中国と日本の支配は致死的な事はめったになかったし 韓国では政治的なライバルの死刑や暗殺は普通の事だった
そのような環境ではどんな種類のパルチザンも死ぬまで自分の地位を守るだろうし妥協する事は自分たちの地位を妥協する事になるわけで 革新主義の興宣大院君がアメリカ人を江華島でアメリカ人を殺したんだ
韓国にはユニークな政治システムのおかげで1880年までほんとうの意味での 「欧米への開国」はなかったといえる 韓国に取っては 「開国」の利益は全く釣り合わなかったんだ 弱さをさらけ出すことになるよりも
西太后は改革者だったのかな 結局 戊戌の変法をとめたんだよ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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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んで韓国は中央集権でいられたんだろうな? 日本と中国が非中央集権化していたの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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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れちゃいけないのが ロシア 中国 日本の間で誰が満州と韓国を取るかで摩擦があったこと
「日本が韓国に興味を持っていた 弱みがわかっていたから」ってことだよね もうちょっと質問の範囲を狭くして ヨーロッパの国々から韓国に影響しようとする 真面目な試みが南アジアをとったヨーロッパからあったんだろうか?
韓国に関していえば 南アジアよりもずっと遠く 現地に行くには資源がもっと必要で ヨーロッパと同じくらいの緯度にあるため固有のスパイスは見つからないのは明らかだ 投稿者が指している天然資源は17世紀には存在しなかったんだ 韓国には貴重なミネラルはあるけどその当時には発見されていなかったし 20世紀になるまではそもそも蚊hc衣もなかった オランダ人が最初に南アフリカ 西部オーストラリア タスマニアとニュージーランドをみつけた すべてのケースでオランダ人は植民地にする事に反対したんだ この土地が不要だとおもったんだね そこまでの価値はないってこと 1800年代終わりになるまでベトナムでさえ植民地じゃなかった お茶や ナツメグ ショウガなどをインドやインドネシアと同じように生産できたけれども遠く 売れるお茶にも限りがあったしね 鉄道が出来るまで当時のアジアの植民地は海岸のエリアだけだったんだ
↑投稿者
私が興味を持っているのは第2波の部分みたい でも 「植民地」に対する質問は最後の文章でよくわかったわ 韓国はずっとどこかに従っていたので直接取引をする意味はないし 資源として必要かどうかっていうのが貿易拠点にするよりも大事だってってことね
この話題について話そうとおもったら 日本/中国/韓国の歴史をバラバラにする事はできないよ
日本が明治維新以降 帝国主義に走ったのは欧米に習ったからだ 日本は国の官僚政府を作り明治維新以降の初期の段階で「韓国問題」は日本人の官僚達の頭にあったはず 日本が受けた侵略は朝鮮半島からきたモンゴル人の襲来だけだというのを念頭においておきたい 日本人はこれをよくわかっていて韓国の戦略的重要さを理解していた
木戸孝允は韓国にたいする政策が 「日本の時代遅れの習慣をかえるであろう 目標を海外にむけ 産業と技術を促進する 嫉妬や差別を取り除く」 と1869年に書いている
明治政府ができてから15年しかたっておらず外交的に信頼を得るのは重要だった その当時から 征韓論 は盛んに議論んされたが1870年には止められた 1880年代 1890年代は欧米の帝国主義が急速に広がった時期であり アジアで植民地支配されていないのは 韓国 中国 日本だけという有様だった
この頃になると日本は植民地支配を使用としていて1890年当時と違っていたのは日本に中央集権の強い政府が出来ていたということだ 日本は韓国の輸出品の90%を買い上げていて欧米の物を大量に韓国に売っていた この頃になると日本政府も民衆も韓国が日本の経済圏にはいっていると考えていたのがわかる
1894/95年に日清戦争に勝利し台湾を取得した時点で日本は帝国の権力を得た 軍事強化や拡張主義を正当かしてしまう事になる この時期の韓国の 独立 は日本にとって半島に手がかりをつくるおおきなチャンスになった 当時の韓国 中国 ミクロネシアには日本の侵攻にたいして効果的に反抗する力がなかった
1910年に韓国を併合して日本の食糧のために搾取されたかとか韓国の反抗があるような関係がどうだったかとかあるけど 結局 ヨーロッパが韓国を植民地にしなかったのは 日本が諦めなかったからだ ロシアは韓国を取りたかったとおもうけど それは日清戦争でついえたしね
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k39c6x/why_did_no_european_power_colonize_korea/
외국인 「 어째서 유럽은 한국을 식민지화하지 않았어?」(해외 반응)
투고자
왜 유럽세는 한국을 식민지로 하지 않았던 것일까?
천연자원이 많이 있어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있는 비교적 작은 나라인 한국은 이상적인 식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일본과 중국에 지배되었던 시대가 있던 외는 다른 동아시아의 나라나름에 유럽세가 흥미를 나타낸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이유에 흥미가 있어요 무엇이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의입니까
구미의 시점으로부터 구미제국이 한국을 식민지로 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는 「중국과 전부」였기 때문에라고 생각해 한반도에 있는 자원은 거의 중국에도 있어 그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대신에 한국은 그 던져 더 큰 제국주의 속의 정치적인 말로서 사용해진 그것을 잘 아는 것은 1905년의 러일 전쟁으로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보호령이 된 그 대신에 일본은 필리핀을 미국에 건넨 필리핀 쪽이 한국보다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미국이 생각했기 때문이구나 한층 더 일본은 반도를 손에 넣는 것으로 러시아의 힘을 깎을 수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구미에 식민지로 되고 있던 것으로?`헤 없지만이니까는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선교사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선교사는 정의로서 정치적인 물건은 아니지만 선교사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매체가 되고 있었다 선교사는 일본의 한국인에게의 취급을 항상 비판하고 있어 이것이 1919년의 3월의 독립 운동으로 연결되어 간다
↑투고자
코멘트 고마워요 청-중국의 시점에서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군요
일본은 세계의 스테이지에 있어 청일 전쟁의 뒤는 식민지 지배를 하는 파워로서 인정되고 있었을까? 제국으로서 한국이나 대만을 지배할 만한 스테이터스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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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시대에 이 3국은 무관계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의문 없고」식민지 지배를 할 수 있어 모여들어 일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특별히 반항 운동이 있었고 일본의 수상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의 내셔널리스트에게 1909년에 암살되었다 1919년 3월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 쓰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군요 1905년의 청일 전쟁에 이긴 일로 일본은 이 지역의 강국으로서 인지된 것은 확실하다 10년전에는 러시아와 싸움 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일도 할 수 없었고 이 전쟁에 진 것은 러시아에 잡아 국가의 모욕이며 러시아 혁명으로 연결된 황제에 있어서는 2중의 수치가 되었을 것이다
1945년부터 한국은 구미에 식민 되고 있었다고 하는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소련의 파워가 그 후 중국에 교체될 때까지 (1960년대 정도)(으)로 한국이 1980년 정도까지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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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으로이지만 나는 1980년대 초에 한국에 살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너의 감각에 찬성해 준다고 생각하고 소련과 미국은 한국 정부에 큰 영향이 있었다고 할 것이고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강한 영향하에 있어 청의 힘이 약해지는데 따라서 일본이 와 한국을 지배한 구미가 들어 오기 전에는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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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구나 한국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비호 되고 있는 그 결과 한정적 밖에 퍼질 수 없는 한국의 정부는 그러한 작은 일을 하려면 반항적이고 1895~1904년의 「공석 기간」을 들여다 보고는 한국의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던이라고 해도 괜찮지는 눈 깜짝할 순간에 일본에 당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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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비교적 작은 한국이 그렇게 강했을 것이지? 청나라와 같이 큰 나라가 가방에 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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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화구나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쭉 중앙집권 하고 있었어 일본이 메이지 유신전에 바르카니제이션으로부터 봉건국가가 된 것은 잘 알아지고 있지만 같은 일이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던 것은 알려지지 않은 인정된 사람이 지방에 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북경으로부터 지시가 나와 있던 것이 아니었다
즉 중국과 일본 정부는 지배층의 지지를 얻을 수가 없으면 지방으로부터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점에서 한국은 정부가 하룻밤에 없어지는 걱정은 없었던 숙정은 자주(잘) 있다 일이었고 그래서 정부가 없어지는 일은 없었다 19 세기의 중국과 일본의 지배는 치사적인 일은 좀처럼 없었고 한국에서는 정치적인 라이벌의 사형이나 암살은 보통 일이었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어떤 종류의 유격대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지위를 지킬 것이고 타협하는 일은 스스로의 지위를 타협하는 일이 되는 것으로 혁신 주의의 흥선대원군이 미국인을 강화도에서 미국인을 죽였다
한국에는 독특한 정치 시스템 덕분에 1880년까지 진정한 의미로의 「구미에의 개국」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에 잡아 「개국」의 이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약함을 드러내게 되는 것보다도
서태후는 개혁자였는가결국 백일유신을 세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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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한국은 중앙집권으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과 중국이 비중앙집권화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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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면 안 된다의가 러시아 중국 일본의 사이에 누가 만주와 한국을 잡을까로 마찰이 있던 것
「일본이 한국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약점을 알 수 있고 있었기 때문에」라는 일이지요 좀 더 질문의 범위를 좁게 해 유럽의 나라들에서 한국으로 영향을 주려고 하는 성실한 시도가 남부아시아를 잡은 유럽에서 있었을 것이다인가?
한국에 관해서 말하면 남부아시아보다 훨씬 멀게 현지에 가려면 자원이 더 필요하고 유럽과 같은 정도의 위도에 있기 위해 고유의 스파이스는 발견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투고자가 가리키고 있는 천연자원은 17 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귀중한 미네랄은 있다지만 그 당시에는 발견되어 있지 않았고 20 세기가 될 때까지는 원래모기 hc옷도산 네델란드인이 최초로 남아프리카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타스 매니아와 뉴질랜드를 찾아낸 모든 케이스로 네델란드인은 식민지로 하는 일에 반대했다 이 토지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군요 거기까지의 가치는 없다는 것 1800년대 끝나게 될 때까지 베트남조차 식민지가 아니었던 차나 nutmeg 생강등을 인도나 인도네시아와 같이 생산할 수 있었지만 멀게 팔리는 차에도 한계가 있었고철도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당시의 아시아의 식민지는 해안의 에리어 뿐이었다
↑투고자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제2파의 부분같아도 「식민지」에 대한 질문은 마지막 문장으로 자주(잘) 알았다 원한국은 쭉 어디엔가 따라서 있었으므로 직접거래를 하는 의미는 없고 자원으로서 필요할지라고 하는 것이 무역 거점으로 하는 것보다도 소중하다고는 일이군요
이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생각하면 일본/중국/한국의 역사를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어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에 달린 것은 구미에 배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나라의 관료 정부를 만들어 메이지 유신 이후의 초기의 단계에서 「한국 문제」는 일본인의 관료들의 머리에 있었을 것 일본이 받은 침략은 한반도로부터 온 몽골인의 내습만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싶은 일본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어 한국의 전략적 중요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한국에 대한 정책이 「일본의 시대에 뒤떨어진 습관을 바꿀 목표를 해외로 향해 산업과 기술을 촉진하는 질투나 차별을 없앤다」라고 1869년에 쓰고 있다
메이지 정부가 생기고 나서 15년 밖에 경과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신뢰를 얻는 것은 중요했던 그 당시부터 정한론은 활발히 논의응 되었지만 1870년에는 제지당했다 1880년대 1890년대는 구미의 제국주의가 급속히 퍼졌던 시기여 아시아에서 식민지 지배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한국 중국 일본만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요즘이 되면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사용으로 하고 있어 1890년 당시와 달리 있던 것은 일본에 중앙집권의 강한 정부가 되어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수출품의 90%를 매입하고 있어 구미의 물건을 대량으로 한국에 팔고 있던 요즘이 되면 일본 정부도 민중도 한국이 일본의 경제권에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894/95년에 청일 전쟁에 승리해 대만을 취득한 시점에서 일본은 제국의 권력을 얻은 군사 강화나 확장 주의를 정당한가 해 버리는 일이 되는 이 시기의 한국의 독립은 일본에 있어서 반도에 단서를 만드는 큰 찬스가 된 당시의 한국 중국 미크로네시아에는 일본의 침공에 대해 효과적으로 반항하는 힘이 없었다
1910년에 한국을 병합 해 일본의 식량을 위해서 착취되었는지라든가 한국의 반항이 있다 같은 관계가 어떠했는지라든지 있다지만 결국 유럽이 한국을 식민지로 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한국을 잡고 싶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청일 전쟁으로 무심코 천민 죽어라
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k39c6x/why_did_no_european_power_colonize_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