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側の批判は筋違い」、ハーバード大教授「慰安婦論文」批判の悪質な点を指摘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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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ラムザイヤー教授が指摘しているのは、韓国のいわゆる「従軍慰安婦」は、日本人の慰安婦と同様に、当時の制度に基づいた公認の売春婦であり、韓国側が主張するような軍が拉致して「性奴隷」とされたというような事実は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この見解は、決して新奇なものではなく、公平に客観的事実を見ればこの結論に至るものである。
しかし、当然、こうした見方を韓国側は許容しない。彼らはいまでも朝_鮮人慰安婦は日本軍によって罪のない女性が拉致されて、性奴隷とされたものだ、という「ストーリー」を主張しているからだ。
そのため韓国ではさまざまな形でのラムザイヤー教授への批判、非難が沸き起こっている。政治家、市民団体、メディアが一斉攻撃を加えている状態だ。
そこで韓国メディアが現在展開しているのは、ストローマン論法や印象操作でラムザイヤー氏、論文の信用を失墜させるという戦略だ(※ストローマン論法とは、相手の主張を切り取りなどでゆがめた上で批判する論法のこと)。
悪質な誹謗中傷
なかでも私が悪質だと思うのは、「ラムザイヤー論文は韓国人女性の契約書を提示していない」とする次の記事だ。目には目を、ハーバード大教授にはハーバード大教授を、ということで、韓国系のハーバード大学教授を味方につけて批判を展開している。
《(前略)しかし学界では、韓国の慰安婦被害者が作成した契約書を提示できなかったという指摘が提起されてきた。ソク(・ジヨン)教授は「ラムザイヤー教授の論文の脚注を調べた結果、戦時慰安所の韓国女性に関する契約内容がなかったうえ、該当契約を記述した2次出処もなかった」と指摘した。これに対しラムザイヤー教授は「韓国人女性の契約書を確保すればよいと考えたが探せなかった」と認めた後、「あなたも探せないのは確実だ」とソク教授に話したという。また、ラムザイヤー教授は論文に10歳の日本の少女の事例を挙げながら、契約が自発的であり合法的に行われたと主張したが、ソク教授にメールを送って引用の誤りがあったことを認めたりもした》(韓国系ハーバード大教授「ラムザイヤー氏、慰安婦主張のミス認めた」中央日報2月27日付)
この記事だけを読むと、ラムザイヤー教授が、重要な証拠(契約書)を見つけ出せなかったうえに、出処不明のものを根拠としていて、引用に「誤りがあったこと」を認めた、と取れる。
結果として、ラムザイヤー論文は信用できないものだ、という印象を与えることになる記事だと言っていいだろう。
しかし、これはラムザイヤー教授、および論文に対する悪質な誹謗中傷である。
そのことをこれから明らかにしていこう(以下、上の引用記事は「記事」とする)。
誤表記、公・私文書の混同、嘘
(1)「記事」の根本的な誤表記 まず、誤表記がある。そもそも「韓国人女性の契約書」は存在しない。
なぜなら、韓国は1948年に建国しているので、慰安婦がいた戦前・戦中期に「韓国人」はいなかった。いたのは、日本国籍の朝_鮮人だ。「朝_鮮人女性の契約書」ないしは「朝_鮮系日本人の契約書」なら存在する。
(2)公文書と私文書の区別もついていない 次に「朝_鮮人女性の契約書」を探せということだが、ソク教授はこのような契約書は公文書ではなく私文書だということを知らないのだろうか。
公文書なら公文書館へいけば、見つかるだろうが、私文書はみつからない。だいたいこのような高度のプライバシーを含む文書が公文書館で公開されるはずもない。
日本、韓国、北朝_鮮、および慰安婦のいたアジアの国々の個人宅を一軒一軒回って家探しして見つけろとでもいうのだろうか。ラムザイヤー教授が「あなたも探せないのは確実だ」といった意味がソク教授にはわかっただろうか。できないと知っていてこんなことを言っているのだとすると、これはアカハラ(アカデミック・ハラスメント)に等しい。
もちろんそうした契約書があるに越したことはないのだが、ないことはまったく論文の主張とは関係ない。なぜなら、別の公文書が重要なことを示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関連するのが(3)である。
(3)「2次出処もなかった」というのは嘘 最大の問題は、「該当契約を記述した2次出処もなかった」がまったくの嘘だということだ。 ラムザイヤー論文の注釈には「U.S. Office of War Information, 1944. Interrogation Report No. 49, Oct. 1, 1944, in Josei (1997: 5-203)」という文書が載っている。長くなるが、重要な点なので、引用しよう。この資料にはこうある。
日本と戦争していた米軍作成の資料
「米国戦争情報局(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心理戦作戦班日本人捕虜尋問報告書(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四九号、一九四四年一〇月一日
【序文】慰安婦(comfort girls)とは日本軍に特有の語で、軍人のために軍に所属させられた売春婦のことをいう。ここでの記述はビルマの朝_鮮人従軍慰安婦に関するものである。日本軍は一九四二年にこのような朝_鮮人慰安婦を七〇三人ほどビルマに向けて出航させたといわれている。
【募集】一九四二年五月、日本の業者が朝_鮮半島に赴き、東南アジアにおける「軍慰安業務」のためとして女性を募集した。高収入、家族の借金返済のための好機、軽労働等の宣伝に応じて多くの女子が勤務に応募し、二~三〇〇円の前払報酬を受領した。彼女たちの大半は無知、無学の者であった。自ら署名した契約により、前借り金の額に応じ半年から一年の仕事に従事させられた。このような方法で約八〇〇名の女子が募集された。(後略)
【慰安婦の特性】慰安婦の平均年齢は二五歳ほどであり、無学で子供っぽく、気まぐれでわがままであった。彼女らは自分の職業は嫌いだと主張し、その職業や家族について語ることを好まなかった。(後略)
【生活及び労働条件】ミッチーナー(日本軍の占領地)においては、通常二階建ての大きな建物に住んでおり、一人一部屋を与えられていた。そこで彼女らは生活し、眠り、仕事をしていた。食事は経営者が用意したものであった。食事や生活用品はそれほど切り詰められていたわけではなく、彼女らは金を多く持っていたので、欲しいものを買うことが出来た。兵士からの贈り物に加えて、衣服、靴、煙草、化粧品を買うことが出来た。
ビルマにいる間、彼女らは将兵とともにスポーツをして楽しんだりピクニックや演芸会、夕食会に参加したりした。彼女らは蓄音機を持っており、町に買い物にでることを許されていた。
【料金】彼女らが業務を行う条件は陸軍によって規制されていた。軍は、その場所に展開している様々な部隊のために、料金、優先順位、日割りを設定することが必要であると考えていた。(階級別に利用時間、料金を表示)将校は二〇円で宿泊が許されていた。
【収入及び生活条件】慰安所経営者は、契約時の負債額に応じて、慰安婦の売り上げの五〇乃至六〇パーセントを受け取っていた。多くの経営者は、食糧その他の品物に高価格を課すことによって、慰安婦の生活を困窮させていた。一九四三年後半、陸軍は、負債の弁済を終えた慰安婦は帰国して良い旨の命令を出した。これにより帰国を許された慰安婦が数人いた。
慰安婦の健康状態は良好であった。彼女らは避妊具が充分に与えられており、兵隊たちもしばしば軍支給の避妊具を自ら持参した。日本人の軍医が週に一度慰安所を訪れ、罹病した慰安婦は治療、隔離し、入院させることもあった。(P.113-116) (なおこの文書は以下のサイトで読むことができる。https://www.awf.or.jp/pdf/0051_5.pdf また、吉見義明元中央大学教授編纂の『従軍慰安婦資料集』(大月書店、1992年)にも440~450頁にかけて収録されている)」
「한국측의 비판은 착각」, 하버드대교수 「위안부 논문」비판의 악질적인 점을 지적하는
악질적인 비방 중상
그 중에서도내가 악질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램더 이어 논문은 한국인 여성의 계약서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다음의 기사다.눈에는 눈을, 하버드대교수에게는 하버드대교수를, 이라고 하는 것으로, 한국계의 하버드 대학교수를 아군에게 붙여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전략) 그러나 학계에서는,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가 작성한 계약서를 제시할 수 없었다고 하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소크(·지욘) 교수는 「램더 이어 교수의 논문의 각주를 조사한 결과, 전시 위안소의 한국 여성에 관한 계약 내용이 없는데다가, 해당 계약을 기술한 2차 출처도 없었다」라고 지적했다.이것에 대해 램더 이어 교수는 「한국인 여성의 계약서를 확보하면 좋다고 생각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라고 인정한 후, 「당신도 찾을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소크 교수에 이야기했다고 한다.또, 램더 이어 교수는 논문에 10세의 일본의 소녀의 사례를 들면서, 계약이 자발적이며 합법적으로 행해졌다고 주장했지만, 소크 교수에 메일을 보내 인용의 잘못이 있던 것을 인정하기도 했다》(한국계 하버드대교수 「램더 이어씨, 위안부 주장의 미스 인정했다」중앙 일보 2월 27 일자)
이 기사만을 읽으면, 램더 이어 교수가, 중요한 증거(계약서)를 찾아낼 수 없는데다가에, 출처 불명의 것을 근거로 하고 있고, 인용에 「잘못이 있던 것」을 인정했다, 라고 잡힌다.
결과적으로, 램더 이어 논문은 신용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인상을 주게 되는 기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램더 이어 교수, 및 논문에 대한 악질적인 비방 중상이다.
그것을 지금부터 밝혀 가자(이하, 위의 인용 기사는 「기사」라고 한다).
오표기, 공·사문서의 혼동, 거짓말
(1)「기사」의 근본적인 오표기 우선, 오표기가 있다.원래 「한국인 여성의 계약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은 1948년에 건국하고 있으므로, 위안부가 있던 전쟁 전·전시중기에 「한국인」네 없었다.있던 것은, 일본국적의 조_선인이다.「조_선인 여성의 계약서」없고는 「조_선계 일본인의 계약서」라면 존재한다.
(2) 공문서와 사문서의 구별도 붙어 있지 않다 다음에 「조_선인 여성의 계약서」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소크 교수는 이러한 계약서는 공문서는 아니고 사문서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공문서라면 공문서관에 가면, 발견되겠지만, 사문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대체로 이러한 고도의 프라이버시를 포함한 문서가 공문서관에서 공개될 리도 없다.
일본, 한국, 북조_선, 및 위안부가 있던 아시아의 나라들의 개인택을 한 채 한 채 돌아 집 찾아 찾아내라고에서도 말하는 것일까.램더 이어 교수가 「당신도 찾을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라는 의미가 소크 교수에게는 알았다일까.할 수 없으면 알고 있어 이런 일을 말하는 것 로 하면, 이것은 아카하라(아카데믹·해러스먼트(harassment))에 동일하다.
물론 그러한 계약서가 있다에 넘었던 적은 없지만, 없는 것은 완전히 논문의 주장과는 관계없다.왜냐하면, 다른 공문서가 중요한 일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거기에 관련하는 것이(3)이다.
(3) 「2차 출처도 없었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 최대의 문제는, 「해당 계약을 기술한 2차 출처도 없었다」가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램더 이어 논문의 주석에는 「U.S. Office of War Information, 1944. Interrogation Report No. 49, Oct. 1, 1944, in Josei (1997: 5-203)」라고 하는 문서가 실려 있다.길어지지만, 중요한 점이므로, 인용하자.이 자료에는 이렇게 있다.
일본과 전쟁하고 있던 미군 작성의 자료
「미국 전쟁 정보국(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심리전 작전반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서(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49호, 1944년 10월 1일
【서문】위안부(comfort girls)와는 일본군에 특유의 말로, 군인을 위해서 군에 소속 당한 매춘부를 말한다.여기서의 기술은 버마의 조_선인 종군위안부에 관한 것이다.일본군은 1942년에 이러한 조_선인 위안부를 70세 명 정도 버마로 향해서 출항시켰다고 한다.
【모집】1942년 5월, 일본의 업자가 조_선반도로 향해 가, 동남아시아에 있어서의 「군위안 업무」이기 때문에로서 여성을 모집했다.고수입, 가족의 빚반제를 위한 호기, 경노동등의 선전으로 따라 많은 여자가 근무에 응모해, 2~300엔의 선불 보수를 수령했다.그녀들의 대부분은 무지, 무학의 사람이었다.스스로 서명한 계약에 의해, 가불금의 액수에 응해 반년부터 일년의 일에 종사 당했다.이러한 방법으로 약800명의 여자가 모집되었다.(후략)
【위안부의 특성】위안부의 평균 연령은 25세 정도여, 무학으로 아이 같고, 변덕으로 멋대로였다.그녀들은 자신의 직업은 싫다고 주장해, 그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후략)
【생활 및 노동 조건】밋치나(일본군의 점령지)에 대해서는, 통상 이층건물의 큰 건물에 살고 있어 한 명 일부가게가 주어지고 있었다.거기서 그녀들은 생활해, 자, 일을 하고 있었다.식사는 경영자가 준비한 것이었다.식사나 생활 용품은 그만큼 절약할 수 있고 있던 것이 아니고,그녀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었다.병사로부터의 선물에 가세하고, 의복, 구두,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다.
버마에 있는 동안, 그녀들은 장병과 함께 스포츠를 하고 즐기거나 피크닉이나 연예회, 저녁 식사회에 참가하거나 했다.그녀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어 마을에 쇼핑하러 나오는 것이 용서되고 있었다.
【요금】그녀들이 업무를 실시하는 조건은 육군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었다.군은, 그 자리소에 전개하고 있는 님 들인 부대를 위해서, 요금, 우선 순위, 일당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계급별로 이용 시간, 요금을 표시) 장교는 20엔으로 숙박이 용서되고 있었다.
【수입 및 생활 조건】위안소 경영자는, 계약시의 부채액에 따르고, 위안부의 매상의 50 내지60퍼센트를 받고 있었다.많은 경영자는, 식량 그 외의 물건에 고가격을 부과하는 것에 의해서, 위안부의 생활을 곤궁시키고 있었다.194삼년 후반, 육군은, 부채의 변제를 끝낸 위안부는 귀국해 좋은 취지가 명령을 내렸다.이것에 의해 귀국이 용서된 위안부가 몇사람 있었다.
위안부의 건강 상태는 양호했다.그녀들은 피임 도구가 충분히 주어지고 있어 군인들도 자주 군지급의 피임 도구를 스스로 지참했다.일본인의 군의관이 주에 한 번 위안소를 방문해 이병한 위안부는 치료, 격리해, 입원시키기도 했다.(P.113-116) (더 이 문서는 이하의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다.https://www.awf.or.jp/pdf/0051_5.pdf 또,요시미 요시아키원중앙 대학교수 편찬의 「종군위안부 자료집」(오츠키 서점,1992년)에도440~450페이지에 걸쳐 수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