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江戸時代の初期の亮明学者だ. 本来名前は中江しなさい[中江原, なかえ はら]であり, 逃走[藤樹, とうじゅ]は号(号)だ. 日本陽明学の詩調に思われる.
中江逃走は 1608年五味[近江, おうみ, 今の日本滋賀県一帯]で農民だった中江ヨシツで[中江吉次, なかえ よしつぐ]の長男で生まれた. 9歳にはヨナで[米子, よなご, 今の日本ドッドリヒョン一帯]の無事であるお爺さんの地位を世襲するためにお爺さんの養子になった. 15歳にはお爺さんの後を引き継いで無事になって官職に進んだ. 当時は無事が留学を勉強すればあざ笑うことを買った時期だった. それでも中江逃走は幼いごろから倦まず弛まず留学を勉強した. しかし 27歳になってお母さんの奉養のために無事の身分を捨てて故郷に降りてお酒と米を売って生計を引き続いた. 以後商店を処分して私塾(私塾)を開いた. 当時中江逃走は私塾にある大きい藤[藤樹] 下で文を教えたが, これにより彼は逃走先生[藤樹先生], 私塾は逃走書院[藤樹書院]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中江逃走は幼いごろから留学を勉強したが, 彼に留学を体系的に教えた師匠はなかった. 文字を学んで文を読み方を教える位の師匠があっただけだ. 中江逃走は大部分独学で留学を勉強したし, 周り人々と儒教経典を勉強する集まりを作ったりした. しかし徐徐に朱子学(朱子学, 性理学)を勉強して実践する中に法式にかまける事がだんだん多くなったし, 朱子学が人を決まったフレームに縛って融通性をないようにして人間本然の活発な姿を失うようにするという考えをするのに至った. ひいては朱子学が身分を政党化させる道具で使われる現実に疑問を持ち始めた. そしてこの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悩みを繰り返えしたし, 33歳にワングヨングギェ(王竜渓)の 《ワングヨングギェオロック(王竜渓語録)》を, 37歳に陽明学(陽明学)を主唱した王水である(王守仁, 王陽明)の全集(全集)を読みながら陽明学の道に進み始めた.
中江逃走が陽明学を収容したとは言うが, 陽明学にそれなりの再解釈を加えた. 彼は親に対する孝(孝)を重視した. 自分の身は親から, 親の身は天地から, 天地は太虚(太虚, 宇宙)から祈ったので親に対する孝は太虚に到逹する方法だと主張した. 太虚に到逹すれば自ずから善し悪しを判別するようになって[致良知], この境地に至るためには毎日線を実践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強調した. このように先祖崇拜と自分の内面の探求を通じる境地への到達は社会的身分という生まれ的条件を強調しなかったから庶民たちにも収容されたし, 中江逃走は “五味の大人[近江聖人]”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この以外に心が清くてきれいで義理に適当ならばどんな行為の表現方式も正しい道なのを話した. これは外来の思想や技術が完全に日本に収容されないで, 時・場所・地位によって違うように収容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シチォウィでは(時処位論), 儒教と仏教と道教は窮極的に一致するという三校一致では(三教一致論) などにつながった.
中江逃走は 1648年 41歳の年で世を去った. 門下には駆魔者と半巣[熊?蕃山, くまざわ ばんざん], フイコウザン[淵岡山, ふち こうざん] などがあり, 著書では 《オングムンダブ(翁問答)》, 《甘草(鑑草)》, 《孝敬啓蒙(孝経啓蒙)》 などが伝える.
일본 에도시대의 초기의 양명학자이다. 본래 이름은 나카에 하라[中江原, なかえ はら]이며, 도주[藤樹, とうじゅ]는 호(號)이다. 일본 양명학의 시조로 여겨진다.
나카에 도주는 1608년 오미[近江, おうみ, 지금의 일본 시가현 일대]에서 농민이었던 나카에 요시츠구[中江吉次, なかえ よしつ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9살에는 요나고[米子, よなご, 지금의 일본 돗도리현 일대]의 무사인 할아버지의 지위를 세습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15세에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사가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당시는 무사가 유학을 공부하면 비웃음을 사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나카에 도주는 어려서부터 꾸준히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27세가 되어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술과 쌀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상점을 처분하고 사숙(私塾)을 열었다. 당시 나카에 도주는 사숙에 있는 큰 등나무[藤樹] 아래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이로 인해 그는 도주 선생[藤樹先生], 사숙은 도주 서원[藤樹書院]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카에 도주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하였지만, 그에게 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스승은 없었다. 문자를 배우고 글을 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정도의 스승이 있었을 뿐이다. 나카에 도주는 대부분 독학으로 유학을 공부하였고, 주위 사람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주자학(朱子學, 성리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중에 법식에 얽매이는 일이 잦아졌고, 주자학이 사람을 일정한 틀에 묶어 융통성을 없게 하여 인간 본연의 활발한 모습을 잃게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주자학이 신분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였고, 33세에 왕용계(王龍溪)의 《왕용계어록(王龍溪語錄)》을, 37세에 양명학(陽明學)을 주창한 왕수인(王守仁, 왕양명)의 전집(全集)을 읽으면서 양명학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나카에 도주가 양명학을 수용하였다고는 하지만, 양명학에 나름의 재해석을 가하였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孝)를 중시하였다. 자신의 몸은 부모로부터, 부모의 몸은 천지로부터, 천지는 태허(太虛, 우주)로부터 기원하였으므로 부모에 대한 효는 태허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태허에 도달하면 자연히 선악을 판별하게 되며[致良知],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매일 선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조상 숭배와 자기 내면의 탐구를 통한 경지로의 도달은 사회적 신분이라는 태생적 조건을 강조하지 않았기에 서민들에게도 수용되었고, 나카에 도주는 "오미의 성인[近江聖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밖에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의리에 합당하면 어떠한 행위의 표현 방식도 올바른 길임을 이야기하였다. 이는 외래의 사상이나 기술이 온전히 일본에 수용되지 않고, 때·장소·지위에 따라 다르게 수용되어야 한다는 시처위론(時處位論), 유교와 불교와 도교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삼교일치론(三敎一致論) 등으로 이어졌다.
나카에 도주는 1648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하에는 구마자와 반잔[熊沢蕃山, くまざわ ばんざん], 후이 코우잔[淵岡山, ふち こうざん]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옹문답(翁問答)》, 《감초(鑑草)》, 《효경계몽(孝經啓蒙)》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