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徴用工」…韓国にとって不都合な真実とは? 日本で成功した姿を親族が語る
韓国の既得権者が主張する反日パラダイムの本質
北で大学教授を経て、脱北したキム・フンガン博士。韓国内で対北専門家としてTV、新聞、YouTubeなどで活躍中の博士の叔父は、徴用工だった。徴用工への補償のため、当時の関連企業の韓国国内資産売却を命じた大法院(最高裁判所)の「公示送達」が完了した8月4日に絡んで、博士が語る「徴用工」の本当の姿。
今、日韓関係は、過去最悪の状態ではないかと思う。
8月4日は、日本への強制動員労働者(以下、徴用工)への補償のため、当時の関連企業の韓国国内資産売却を命じた大法院(最高裁判所)の「公示送達」が完了した日だ。実際に売却に着手した場合、日本での反韓感情が高まると憂慮されている。
私は2004年に韓国に入国した1960年生まれの脱北者だ。北朝鮮にいた頃は、新聞やテレビなどの国営メディアを通じて「朝_鮮人強制徴用者」に関するニュースに何度か接したことはあるが、いずれも大まかな内容のみであり、問題の本質は知らされていなかった。私だけでなく、北朝_鮮国民のほとんどがそうであろう。
しかしながら、脱北してやってきた韓国では、「日帝残滓の黒歴史」がより問題視されており、北朝鮮で洗脳された自分が知っていた内容とのあまりの違いに、どこまでが事実であり、どこまでが感情的なものであるのか混乱してきた。
韓国の左派陣営主導の「従軍慰安婦」「強制徴用」「強制収奪」など、日本の過去の過ちに対する復讐や報復について賠償を叫ぶ態度。これに共感を覚えることもある。しかし、『反日種族主義』などの資料を読むと、現在の韓国の既得権者が主張する反日パラダイムの本質と掲げられた旗との違いに疑問が大きくなるのだ。
私は両親から日韓併合当時の体験談を聞かされたこともなく、北朝_鮮政府が宣伝する歴史観しか持ち合わせていなかった。そんな中、日本に住む叔父が、生前に故国訪問で会ったときに直接聞かせてくれた体験談が唯一の事実であり、叔父の証言は真実を衝いていると思う。
叔父のチン・ミョングンは、1944年10月に日本へ徴用工として渡った。そして1989年、45年ぶりに故郷に戻った。叔父に会うために50人以上の親戚が集まり、叔父は酒・タバコ、電化製品など、たくさんのお土産を親戚に配っていた。
徴用工だった叔父がいかにして成功したのかに興味があった
私はといえば、叔父が日本にいるため「海外縁故者」のレッテルを貼られ、大学進学や海外出張などに様々な制限があった。それでも叔父にとっては大学教授だった私が「自分の話の本質を聞いてくれる」唯一の甥だったようで、北朝_鮮滞在時は一緒に行動することが多かった。
私が出会った頃の叔父は、千葉県に大きなビルを建て、デパート経営をする落ち着いた紳士だったこともあり、徴用工だった叔父がいかにして成功したのかに興味があった。なので、叔父の話は今も頭に残っている。
1944年、中学卒業後に両親を手伝って農業を営んでいた叔父は、当時の生活に息苦しさを感じていた。徴用工募集はそんな叔父にとってまたとないチャンスだったのだ。日本に行って頑張れば大金を手にでき、日本の高校や大学にも行けるという噂を聞き、当時の朝_鮮の青年たちはこぞって一旗揚げるために日本に渡った。
およそ70人の青年たちと一緒に叔父が船に乗って行った先は北海道の炭鉱だった。仕事はきつく、両親を思い出すこともあったが、故郷を離れるときに立てた立身出世の志を心の支えにして耐え、一生懸命働いた。特に給料は故郷では考えられないほどの大金で嬉しかったという。
叔父の話の中で共感したしたのは次のような話だった。
《私が炭鉱でお金を稼げたのは、他人よりも徹底して禁欲したからだ。給料をもらったからと酒を飲んでタバコを吸い、女性を買ったらいくらも残らない》 《給料をもらうとき、控除分がいくらと計算して、なるべく少なく天引きされるようにした。給料のかなりの部分を貯金に回してとにかく貯めた》
《終戦後に手元にあった金の半分を両親に送り、残りの半分を元手に世話になった人と一緒に東京へ行き、商売を始めた。あの金がなければ、今も日本でくすぶっていたかもしれない》
当時を振り返る叔父の話は、苦役や不当に受けた扱いによる苦しみよりは、一生懸命働いて稼いだ金で両親を喜ばせ、日本での定着と成功から来るプライドをひしひしと感じさせるものであった。
過去よりも現在と未来をより重要視する北のスタンス
叔父の話を聞きながら、私はこんなことを思った。
北朝_鮮は、自国の青年たちをロシアなど海外に出稼ぎ労働者として送り、叔父よりもさらに劣悪な環境で死にものぐるいで働かせ、3~5年後に戻る時にはカラーテレビを数台買える大金を握らせたというけれど、これは日本の徴用よりひどい収監だ。これこそが、現代版の徴用と呼ぶにふさわしい。
叔父の話はこれくらいにするが、最後に言いたいことは、日韓の過去の歴史に対する脱北者たちの願いだ。 韓国のように感情的に日韓関係を動かそうとするのは正しくないと思う。北朝_鮮の政権も韓国に刺激され、日韓関係改善の政治カードとして徴用工問題を握ってはいるが、金日成と金正日の語録を読み返しても、過去よりも現在と未来をより重要視しているのが、北朝_鮮のスタンスだ。
過去に縛られていては後の世代に悪影響しか及ばさない。日本も韓国人たちが納得する謝罪をして、未来志向的なステップを踏み出さねばならないと思う。 韓国の場合、歴史問題を政治的に暴き出し、金銭的補償のみで問題の解決を進めようとすれば、日本国民だけでなく国際社会の誰からも共感を得られない。
にもかかわらず、両国の政権が変わる度に歴史の基準が変わり、事実が覆され、むしろこのような不協和音が市民運動のモチーフとなっている。
最も近い隣国の若者たちが互いに手を取り合い、未来に向かって進むのを妨げることこそ愚かな行為であることを、現在の既得権者や左派追従者の人々は忘れないでほしい。
金興光(キム・フンガン) 北朝_鮮の平壌金策工業総合大学電子工学卒業後、咸興共産大学で博士号を取得。2003年に韓国へ脱北し、2006年には韓国政府内の統一部北朝_鮮離脱住民後援会課長を経て現在、(社)NK知識人連帯の代表を務めながら韓国内で対北専門家としてTV、新聞、YouTubeなどで活躍中。http://www.youtube.com/c/NKtv3
週刊新潮WEB取材班
https://news.yahoo.co.jp/articles/b35ec7b5a0a0216cb35be7293e7e2d54e4045f6a
https://news.yahoo.co.jp/articles/b35ec7b5a0a0216cb35be7293e7e2d54e4045f6a?page=2
https://news.yahoo.co.jp/articles/b35ec7b5a0a0216cb35be7293e7e2d54e4045f6a?page=3
徴用工募集はそんな叔父にとってまたとないチャンスだった
特に給料は故郷では考えられないほどの大金で嬉しかった
募集に応じて徴用工になり
故郷では考えられないような大金を
給与として受け取り嬉しかった、らしいです♪
どこが強制やねん!
どこが奴隷やねん!
真実は常にチョソにとって無慈悲で過酷なものようです♪(嘲笑)
あひゃひゃひゃ!
「징용공」 한국에 있어서 무례한 진실하다고는? 일본에서 성공한 모습을 친족이 말하는
한국의 기득권자가 주장하는 반일 패러다임(paradigm)의 본질
북쪽에서 대학교수를 거치고, 탈북 한김·분 암 박사.한국내에서 대북 전문가로서 TV, 신문, YouTube등에서 활약중의 박사의 숙부는,징용공이었다.징용공에게의 보상 때문에, 당시의 관련 기업의 한국 국내 자산 매각을 명한 대법원(최고재판소)의 「공시 송달」이 완료한8월 4일에 관련되고, 박사가 말하는 「징용공」의 진짜 모습.
지금, 일한 관계는, 과거 최악 상태는 아닐까 생각한다.
8월 4일은, 일본에의 강제 동원 노동자(이하, 징용공)에게의 보상 때문에, 당시의 관련 기업의 한국 국내 자산 매각을 명한 대법원(최고재판소)의 「공시 송달」이 완료한 날이다.실제로 매각에 착수했을 경우, 일본에서의 반한감정이 높아지면 우려되고 있다.
나는 2004년에 한국에 입국한 1960 년생의 탈북자다.북한에 있었을 무렵은, 신문이나 텔레비전등의 국영 미디어를 통해서 「조_선인 강제 징용자」에 관한 뉴스에 몇 번인가 접한 것은 있다가, 모두 대략의 내용뿐이어, 문제의 본질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나 뿐만이 아니라, 북조_선국민의 대부분이 그렇겠지.
그렇지만, 탈북 해 주어 온 한국에서는, 「일제 잔재의 흑역사」가 보다 문제시되고 있어 북한에서 세뇌된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과의 너무나 달라 ,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감정적인 물건인지 혼란해 졌다.
한국의 좌파 진영 주도의 「종군위안부」 「강제 징용」 「강제 수탈」 등, 일본의 과거의 잘못에 대한 복수나 보복에 대하고 배상을 외치는 태도.이것에 공감을 느끼는 일도 있다.그러나, 「반일 종족 주의」등의 자료를 읽으면, 현재의 한국의 기득권자가 주장하는 반일 패러다임(paradigm)의 본질과 내걸 수 있었던 기와의 차이에 의문이 커진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한일합방 당시의 체험담을 들은 적도 없고, 북조_선정부가 선전하는 역사관 밖에 가지지 않았었다.그런 가운데, 일본에 사는 숙부가, 생전에 고국 방문으로 만났을 때에 직접 들려준 체험담이 유일한 사실이며, 숙부의 증언은 진실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숙부의 틴·묘군은, 1944년 10월에 일본에 징용공으로서 건넜다.그리고 1989년, 4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숙부를 만나기 위해서 50명 이상의 친척이 모여, 숙부는 술·담배, 전자제품 등, 많은 선물을 친척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징용공이었던 숙부가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흥미가 있었다
나는이라고 하면, 숙부가 일본에 있기 위해 「해외 연고자」가 평가를 받아져 대학 진학이나 해외출장 등에 님 들인 제한이 있었다.그런데도 숙부에게 있어서는 대학교수였던 내가 「자신의 이야기의 본질을 들어 준다」유일한 조카였던 것 같고, 북조_선체재시는 함께 행동하는 것이 많았다.
내가 만났을 무렵의 숙부는, 치바현에 큰 빌딩을 지어 백화점 경영을 하는 침착한 신사였던 일도 있어,징용공이었던 숙부가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흥미가 있었다.그래서, 숙부의 이야기는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다.
1944년, 중학 졸업 후에 부모님을 돕고 농업을 영위하고 있던 숙부는, 당시의 생활에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징용공 모집은 그런 숙부에게 있어서 또없을 찬스였던 것이다.일본에 가서 노력하면 큰 돈을 손에 생겨 일본의 고등학교나 대학에도 갈 수 있다고 하는 소문을 (들)물어, 당시의 조_선의 청년들은 빠짐없이 하나의 깃발 올리기 위해서 일본에 건넜다.
대략 70명의 청년들과 함께 숙부가 배를 타고 간 앞은 홋카이도의 탄광이었다.일은 힘들고, 부모님을 생각해 내기도 했지만, 고향을 떠날 때 세운 입신 출세의 뜻을 마음이 지주로 삼아 참아 열심히 일했다.특히 급료는 고향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돈으로 기뻤다고 한다.
숙부의 이야기속에서 공감 혀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탄광에서 돈을 벌 수 있던 것은, 타인보다 철저하게 금욕했기 때문이다.급료를 받았다고 술을 마셔 담배를 피워, 여성을 사면 얼마 남지 않는다》 《급료를 받을 때, 공제분이 얼마계산하고, 가능한 한 적게 공제되도록(듯이) 했다.급료의 상당한 부분을 저금에 돌려 어쨌든 모았다》
《종전 후에 수중에 있던 돈의 반을 부모님에게 보내, 나머지의 반을 자본에 신세를 진 사람과 함께 도쿄에 가, 장사를 시작했다.그 돈이 없으면, 지금도 일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를 되돌아 보는 숙부의 이야기는, 고역이나 부당하게 받은 취급에 의한 괴로움보다는,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 일본에서의 정착과 성공으로부터 오는 프라이드를 오싹오싹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보다 중요시하는 북쪽의 스탠스
숙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일을 생각했다.
북조_선은, 자국의 청년들을 러시아 등 해외에 객지벌이 노동자로서 보내, 숙부보다 한층 더 열악한 환경에서 죽음에도가 꾸물거리는 있어로 일하게 해3~5년 후로 돌아올 때에는 컬러 텔레비전을 수대 살 수 있는 큰 돈을 잡게 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징용보다 심한 수감이다.이것이, 현대판의 징용이라고 부르기에 어울린다.
숙부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지만, 마지막에 말하고 싶은 것은, 일한의 과거의 역사에 대한 탈북자들의 소원이다. 한국과 같이 감정적으로 일한 관계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북조_선의 정권도 한국에 자극되어 일한 관계 개선의 정치 카드로 해서징용공 문제를 잡고는 있지만,김일성과김정일의 어록을 다시 읽어도,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 북조_선의 스탠스다.
과거에 묶여 있고는 후세대에 악영향 밖에 급없다.일본도 한국인들이 납득하는 사죄를 하고, 미래 지향적인 스텝을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역사 문제를 정치적으로 들추어내, 금전적 보상만으로 문제의 해결을 진행시키려고 하면, 일본국민 뿐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누구로부터도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의 기준이 바뀌어, 사실이 뒤집어져 오히려 이러한 불협화음이 시민운동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의 젊은이들이 서로 손을 마주 잡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행위인 것을, 현재의 기득권자나 좌파 추종자의 사람들은 잊지 않으면 좋겠다.
금흥광(김·분 암) 북조_선의 평양 금책 공업 종합대학 전자 공학 졸업 후, 함흥 공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2003년에 한국에 탈북 해, 2006년에는 한국 정부내의 통일부 북조_선이탈 주민 후원회 과장을 거쳐 현재, (회사) NK지식인 연대의 대표를 맡으면서 한국내에서 대북 전문가로서 TV, 신문, YouTube등에서 활약중.http://www.youtube.com/c/NKtv3
주간 신쵸 출판사 WEB 취재반
https://news.yahoo.co.jp/articles/b35ec7b5a0a0216cb35be7293e7e2d54e4045f6a
https://news.yahoo.co.jp/articles/b35ec7b5a0a0216cb35be7293e7e2d54e4045f6a?page=2
https://news.yahoo.co.jp/articles/b35ec7b5a0a0216cb35be7293e7e2d54e4045f6a?page=3
징용공 모집은 그런 숙부에게 있어서 또없을 찬스였다
특히 급료는 고향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돈으로 기뻤다
모집에 따라 징용공이 되어
고향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듯한 큰 돈을
급여로 해서 받아 기뻤다, 답습니다♪
어디가 강제나 자지 않아!
어디가 노예나 자지 않아!
진실은 항상 쵸소에 있어서 무자비하고 가혹한 것나름입니다♪(조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