歴史
発祥
トンカツという名称の由来は、”豚”の音読みの「トン」と、フランス料理の“côtelettes”(カツレツ)の組み合わせから。
詳細は「カツレツ」を参照
1899年(明治32年)に洋食店「煉瓦亭」において「ポークカツレツ」というトンカツに通じる名称で豚肉をディープ・フライで揚げるという調理方法が見られる。1929年(昭和4年)の洋食店「ポンチ軒」で現在のトンカツと同様の調理方法が登場する。ここから「ポンチ軒」のコック島田信二郎がとんかつの発祥とされることが多いが、「トンカツ」という名称は屋台料理などですでに存在しており、また調理法も「王ろじ」により先鞭をつけられているとの説もあるなど、未だ発祥店を特定するのは困難である。
外食店
1899年(明治32年)、東京市・銀座の洋食店「煉瓦亭」が「豚肉のカツレツ」(「ポークカツレツ」)をメニューに載せた。それまでのカツレツと違い、牛肉でなく豚肉を使い、ソテー(炒め揚げ)ではなく天ぷらのように大量の油で揚げ(ディープ・フライ)[8]、温野菜のかわりに生キャベツの千切りを添えて提供した[注釈 1]。西洋人だけではなく日本人の客に受け入れられることを目論んで作った料理で、人気となった。
1911年(明治44年)永井荷風の随筆「銀座」[9][10]では露店で供される「トンカツ」について触れられている[11]。また高村光太郎の1912年(大正1年)の詩「夏の夜の食欲」[12]にも「トンカツ」への言及を見ることができる[13]。
関連料理として、1918年(大正7年)に「カツカレー(河金丼)」と、1921年(大正10年)に「カツ丼」[14]が誕生。同1921年に、新宿の「王ろじ」がぶ厚いロース肉を揚げ、食べやすく切り分けた「とんかつ」[15][16]をはじめて売り出したというとんかつ発祥説のひとつがある[17][注釈 2]。
1923年(大正12年)の関東大震災後、洋食や中華料理の人気におされて人気が下降していた日本蕎麦屋が、起死回生策としてカツ丼やカレーライスを扱いはじめたところ、気安く食べられる「蕎麦屋の洋食」として大人気となった[18]。
1929年(昭和4年)、御徒町の洋食店「ポンチ軒」が「とんかつ」を発売[19][20]。カツを包丁で切り分け、茶碗飯と漬け物と味噌汁で食べさせるという和定食のスタイルで客に出し、評判となった。2.5〜3センチという厚い豚肉に十分に火を通す加熱調理法を考案した同店のコック島田信二郎を「とんかつの発明者」と呼ぶ者も多いが、彼は自分の料理を「とんかつ」と呼ばれる事を嫌っていたともいう[注釈 3][21]。ともあれこのスタイルの「とんかつ」は好評を博し、全国に広まった[22][23]。
1932年(昭和7年)には、上野や浅草に「楽天」・「喜田八」・「井泉」など「とんかつ専門」を標榜する店が次々と開店し、東京下町の繁華街でとんかつブームが起こった[24]。また同じ頃、須田町食堂やデパートの大食堂など、和洋中のすべてをあつかう大衆飲食店が人気となり、豚カツの普及に貢献した。一方、昭和恐慌の時期とも重なっており、安サラリーマンの贅沢は給料日に肉屋の店頭で買う一枚五銭の豚カツとも言われた[25]。
1958年には、とんかつチェーン和幸の第一号店が開店。カツの衣を湿らさない工夫として金網を利用したり、千切りキャベツや味噌汁をおかわり自由にするなど、新たなサービス攻勢により、とんかつ専門店の間でも競争が激化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26]。
역사
발상
돈까스라고 하는 명칭의 유래는, ”돼지”의 음독의 「톤」이라고, 프랑스 요리의"côtelettes"(커틀릿) 의 편성으로부터.
자세한 것은 「커틀릿」을 참조
1899년(메이지 32년)에 양식점 「벽돌정」에 대해 「포크카트레트」라고 하는 돈까스에 통하는 명칭으로 돼지고기를 딥·프라이로 튀긴다고 하는 조리 방법을 볼 수 있다.1929년(쇼와 4년)의 양식점 「펀치채」에서 현재의 돈까스와 같은 조리 방법이 등장한다.여기로부터 「펀치채」의 콕 시마다 신지로가 돈까스의 발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많지만, 「돈까스」라고 하는 명칭은 포장마차 요리등에서 벌써 존재하고 있어, 또 조리법도 「왕골목길」에 의해 선수를 빼앗기고 있다라는 설도 있는 등, 아직도 발상점을 특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외식점
1899년(메이지 32년), 도쿄시·긴자의 양식점 「벽돌정」이 「돼지고기의 커틀릿」( 「포크카트레트」)을 메뉴에 실었다.지금까지의 커틀릿과 달라, 쇠고기가 아니고 돼지고기를 사용해, 소테(서양 요리)(볶아 올려)는 아니고 튀김과 같이 대량의 기름으로 튀겨(딥·플라이)[8], 온야채대신에생 양배추의 채침을 더해 제공?`오[주석 1].서양인 만이 아니게 일본인의 손님에게 받아 들여지는 것을 목론 그리고 만든 요리로, 인기가 되었다.
1911년(메이지 44년) 나가이카후의 수필 「긴자」[9][10]에서는 노점에서 제공되는 「돈까스」에 대해 다룰 수 있고 있는[11].또 다카무라 코타로의 1912년(타이쇼 1년)의 시 「여름의 밤의 식욕」[12]에도 「돈까스」에의 언급을 볼 수 있는[13].
관련 요리로서 1918년(타이쇼 7년)에 「커틀릿 카레(하금 사발)」라고, 1921년(타이쇼 10년)에 「커틀릿사발」[14]가 탄생.동1921년에, 신쥬쿠의 「왕골목길」두꺼운 로스고기를 튀겨 먹기 쉽게 분리한 「돈까스」[15][16]을 시작해 팔기 시작했다고 하면 한편 발상설의 하나가 있다[17][주석 2].
1923년(타이쇼 12년)의 관동 대지진 후, 양식이나 중화 요리의 인기에 눌러져 인기가 하강하고 있던 일본 소바가게가, 기사회생책으로서 커틀릿사발이나 카레라이스를 취급하기 시작했는데, 거리낌 없게 먹을 수 있는 「소바가게의 양식」으로서 대인기가 된[18].
1929년(쇼와 4년), 오카치마치의 양식점 「펀치채」가 「돈까스」를 발매[19][20].커틀릿을 부엌칼로 분리해 밥공기밥과 절임과 된장국으로 먹인다고 하는 화정식의 스타일로 손님에게 내, 평판이 되었다.2.5~3센치라고 하는 두꺼운 돼지고기에 충분히 불을 통하는 가열 조리법을 고안 한 동점의 콕 시마다 신지로를 「돈까스의 발명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지만, 그는 자신의 요리를 「돈까스」라고 불리는 일을 싫어하고 있었다고도 말하는[주석 3][21].여하튼 이 스타일의 「돈까스」는 호평을 얻어, 전국에 퍼진[22][23].
1932년(쇼와 7년)에는, 우에노나 아사쿠사에 「낙천」·「키타8」·「우물」 등 「돈까스 전문」을 표방하는 가게가 차례차례로 개점해, 도쿄 변두리의 번화가에서 돈까스 붐이 일어난[24].또 같은 무렵, 스다초 식당이나 백화점의 대식당 등, 일본과 서양중의 모든 것을 다루는 대중 음식점이 인기가 되어, 돈까스의 보급에 공헌했다.한편, 쇼와공황의 시기이나 겹치고 있어 저임금샐러리맨의 호화는 월급날에 정육점의 매장에서 사는 한 장5전의 돈까스라고도 말한[25].
1958년에는, 돈까스 체인 카즈유키의 제일호점이 개점.커틀릿의 옷을 적시지 않는 궁리로서 철망을 이용하거나 채침 양배추나 된장국을 한 그릇 더 자유롭게 하는 등, 새로운 서비스 공세에 의해, 돈까스 전문점의 사이에서도 경쟁이 격화하는 계기가 된[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