広島原爆投下が日本をいかした?
1945年 8月原爆投下の隠れた話…
原爆投下なかったら日本列島荒れ地されたかも...
イドングフンコラムリスト
[ソウル経済ポピュラーサイエンス] 日本帝国主義に対する死刑宣告である広島と長崎アトミックボム投下をおいて今まで論難が多い.
アメリカはどんな理由で日本の敗戦が確かな状況で劇薬処方を下げたのだろう.
これが果して戦術的に必ず必要なことや, ではなければ考査(枯死) 直前の日本に対する苛酷な仕打ちに過ぎなかったことか.
一方自爆航空機部隊神風, 自爆魚雷部隊仮イッテン, 自爆ボート部隊シンヨオなどを運用するほどに本土射手を叫んだ日本軍首脳部は何の理由で直ちに白旗をあげただろうか.
[原爆投下を取り囲んだ論難長続き]
太平洋 戦争がどん詰まりに走り上げた 1945年 8月. アメリカは B-29 爆撃機を利用して 8月 6日課 9日広島と長崎にそれぞれ 15キロトン級アトミックボム ‘リットルボーイ’と 21キロトン級 ‘パットマン’を投下した.
原爆投下によって広島で 14万名, 長崎では 7万名が死んだ. 負傷及び放射能被爆による遺伝子組み換えで代を引き継いで苦痛された人々も数万人が超えた.
一撃を受けた日本天皇は 8月 15日連合国に無条件降伏したし, 9月 2日米戦艦ミズーリ艦上での降参 調印式を終りに 15年の間数千だけの人名を殺傷した太平洋戦争は完全に幕を閉じた.
ここまでは誰も, 特に韓国人ならとてもよく分かる事実だ.
ところが ‘果して日本に対する原爆ツーする不可避だったのか’という主張がこのごろになって諸所で申し立てられている.
言い換えれば原爆を使わなくて戦争を終わら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かする疑問であることだ.
反核, 反米立場(入場)を立て通す人々の中にこのような疑問を抱く人が多い.
ちょっと過激な人々はドイツに原爆を投下しないことをあげて “対日原爆ツーする黄人種を劣等にここはアメリカの人種差別的戦争遂行の証拠”とまで主張する.
[2次大戦後半の玉れ行列]
アメリカの原爆使用理由が分かろうとすれば少し時間をさかのぼって 1943年当時太平洋戦争の戦況が分かる必要がある.
1941年 12月真珠湾空襲以後の前太平洋を荒して不敗行進を続いた日本軍は 1942年 6月のミドウェイ海戦の同じ年 8月から翌年 2月まで起ったグァダルカナル地上戦で米軍に敗れる.
熟練された戦闘員かなり多い数を損失することで日本が水勢に立ち入るようになったこと.
自信感を得たアメリカはもう日本本土に向けて進撃を始めるがグァダルカナルで日本本土までは 5,000kmも離れていたし, その間にある太平洋の島々は皆日本軍が守っていた.
これらを捨ておくということは太平洋の制海権と制空権を日本軍の手元に捨ておくということと同じ意味だった.
したがってアメリカは日本軍の支配の下にある太平洋の島々を順次陷落させながら日本本土で進むいわゆる ‘蛙ジャンプ戦略’を採択した.
すなわち海兵隊と陸軍を先に立たせてこれら島に対する上陸前に入って行ったこと.
しかし日本軍の抵抗も手強かった. 国家のための, 天皇のための死を栄誉なことで思う日本軍に降参はすぐ恥辱だった.
特に命を捨てても任務を遂行しなさいと洗脳受けていた当時の日本兵士らは米軍が行く戦場敷地ごとに文字のどおり ‘最後の 1人まで’ 争った.
このように敵と争って全滅した日本軍を ‘玉のように美しくこわれた’と言って玉れ(玉碎)と表現した.
1943年 5月 29日. アルリュシャン列島のアト島でYamazakiヤスです陸軍大領旗下の兵力 2,650人が上陸した米軍を迎えわずか 13人の生存者だけ残したまま全部全滅してしまった.
これを始まりにマキン島, タラと島, クェゼルリン制度, サイパン島, ティニアン島, グアムとう, ペリルリュ島などを守っていた日本軍は米軍の攻撃を迎え最後まで争って極少数の生存者のみを残して全部全滅した.
日本軍の戦闘は仮面ますます激しくなって 1945年 2月 19日日本本土隣近のイオジマに米軍が上陸すると日本軍 2万3,000人は 1,000人もなる事ができない生存者を残して全部全滅した.
上陸した米軍やっぱり戦死者約 7,000人, 負傷者 2万名以上の記録的な人名被害を出す.
1945年 4月 1日から2ヶ月半分の間続いた沖繩上陸前では 10万日本軍の中で戦死及び失踪 6万6,000人, 日本民間人死亡及び失踪 15万名の被害を出す.
しかし日本はもっと驚く対応に出る. アメリカ空母を向け出そうぞささる神風特攻隊が正しくそれだ.
それだけではない. 日本軍は自爆魚雷部隊である仮イッテン, 自爆ボート部隊であるシンヨオなども運用した.
‘知能を取り揃えた生体回路で誘導されるミサイル’に表現されたりしたこの自爆部隊は連合軍に大きな恐ろしさの対象だった.
もちろんその以前にも戦闘で軍人が自殺的な攻撃または自爆攻撃を通じて書く撃退する行為はたびたびあって来た.
しかし日本ははじめから死が 100% 保障された自殺攻撃専門部隊を作ったし, 彼に当たる自殺用兵器まで特別製作したという点が違った.
こんなに極甚な抵抗にぶつかった米軍がいただいた物質的, 精神的な衝撃はすごかった.
九州, 本州, 四国, 北海道などを直接攻撃したあとは果していくらほどの人命損失が出ようか? そしてヨーロッパ戦線でアドルフヒトラーがもう敗れた時において 国民にこれ以上の犠牲を強要する十分な名分があろうか?
[アメリカの莫大な死傷者予測]
それにもかかわらずアメリカは日本本土上陸作戦である ‘ダウンポル’ 作戦を準備の中だった.
ダウンポル作戦の下部作戦で九州上陸作戦である ‘オリンピック’ 作戦, そして本州上陸作戦である ‘コロネット’ 作戦が構想された.
オリンピック作戦の予定日は 1945年 11月 1日, コロネット作戦の予定日は 1946年 3月 1日だった.
オリンピック作戦では 34万名, コロネット作戦では 57万名が日本に上陸して争う予定だった.
日本やっぱり ‘ギョルホザックゾン’という名前で徹底的な本土防御態勢を切り刻んでいた.
以前直前日本本土に駐屯した陸軍社団数は総 65個. しかしその中十分な武将と弾薬を支払ってもらったことは半分以下の 30個社団に過ぎなかった.
切羽詰った日本は 15‾60歳までの民間人大人男性と 17‾40歳までの民間人大人女性まで皆動員して郷土防衛台を編成するのに至る.
これらの武将はよくして見ると旧式小銃または民間用聡気だったし大部分は竹窓と鎌, 日本もなどでしがなかった.
しかしこれらに細菌兵器を感染させてたとえ死んでもその死体を生物学的ブービートラップで使おうとする計画まであったという書き入れ時では実に毛骨が松烟される.
要するに国家を維持するためなら国民は
いくらでも死んでも構わないという考え方だった.
このような日本の命がけの軍民合同抗戦態勢が分かるようになったアメリカはダウンポル作戦内容に日本内 25個大都市を毒ガスで攻撃するという内容まで挟みこむ.
毒ガス攻撃は 25ヶ都市の人口 500万名が全滅するその日まで続くはずだった.
日本本土上陸作戦が戦死上一番悽絶な戦闘になるはずだというやけどする理論の余地がなかった.
こんな中 1945年 6月 18日海里トルーマン当時米大統領が出席した中に開かれたアメリカ合同参謀本部会議でダウンポル作戦進行の時発生する米軍死傷者予想値が論議された.
陸軍と海軍の多くの専門家及び高官たちが多様な予測を出したが最小限 25万名の米軍が戦死?負傷?失踪されて戦争が 16ヶ月以上もう延長されるはずだというところ誰も異意を申し立てなかった.
はなはだしくは米軍戦死者だけ 50万名が発生することを覚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主張も出た. これは当時のアメリカとして到底耐えることができないおびただしい負担だった.
[日本列島, 荒れ地されたかも]
1945年 7月 16日. アメリカロスアラーモールスで人類最初のアトミックボム実験が成功裏に終わる.
そして十日後人 7月 26日にはアメリカ, イギリス, 中国, ソ連など 4ヶ国首脳が ドイツポツダムで集まって日本の降参条件と日本占領地の処理に関して論議したポツダム宣言を発表した.
が席で降参条件は帝国主義的指導勢力の除去, 戦争犯罪者の処罰, 連合国の日本支配, 日本領土制限, 徹底的な民主化などに規定されたが 当時日本総理であるSuzuki カンタでは 7月 28日の声明(名前)を通じてポツダム宣言を黙殺するという意思を表明した.
もうアメリカに原爆以外により良い
選択の余地はなかった. 原爆を使わなければ
アメリカ人数十万名と日本人数百万名の犠牲を
かえりみず本土上陸前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結局 8月 6日ティニアン島に駐屯していた第509 混成航空団所属 B-29 ‘エノルだとゲイ’呼値ポール W. ティベツ大領の操縦で飛行, 和製2軍司令部が位した広島に 15キロトン級アトミックボムリットルボーイを投下する.
広島は完破されたし, 日本の政治及び軍事リーダーたちは驚愕を禁じえなかった. しかし予想より彼らの反応は微弱だった.
誰も降伏しようとしなかったしはなはだしくは “いくらアメリカでもあんな武器を 2発以上持っているわけがない”と思った人もいた.
初原爆を当たったにも日本が降伏しないでアメリカは結局 8月 9日長崎にも 21キロトン級原子爆弾パットマンを投下した.
やっと状況を納得した日本天皇と大臣たちはポツダム宣言の要求事項を受諾して, 連合国に無条件降参を決めるのに至る.
ところで広島と長崎にアトミックボムが投下されなかったら果してどんなことが起っただろうか?
もちろんアトミックボムが数十万名の罪のない人名を殺傷して前後ほほ笑み間全面核戦争脅威に象徴される暗い冷戦時代を開いたことは否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事実だ.
しかし
原爆が使われなかったら
二度にかけた日本本土上陸前と
無差別的に展開される
化生放戦によって日本列島は
人が住むことができない
地に変わったはずだ.
天皇を含めた日本指導部が朝鮮で居所を移して抗戦を続いた場合我が国も決して世界大戦の電話で安全ではなかったはずだ.
結果的に見れば広島と長崎で死んだ日本人 1人は数百人以上の同胞命を救ったわけになる.
このようなものがたぶん歴史の非情な算術と同時にアイロニーとするでしょう.
http://economy.hankooki.com/lpage/industry/200708/e2007080910162370260.htm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sec&sid1=105&oid=011&aid=0000194330
冷情に落ち着いて歴史的事実を敍述している珍しい記事だ...
とにかく, アメリカの立場でも自国民たちをでたらめに殺しても絶対敗北宣言しない
曰帝を降参させるためにはどうする 数ない選択....
そんな観点で見れば原爆はアメリカと大和皆に責任があるが,
大和側にその責任がもっと大きいと言うしかない..
少なくとも広島の時真面に認知したら
長崎は無事だったろう....
どんなに見ても自業自得...
原爆ツーする曰帝の和病を阻む仕方ない必要悪だったと思う...
ところが, 出たらめにも
アメリカ一人で孤独に重い歴史的十字架を担っているね....
とにかく, こんな歴史的 FACTさえ歪曲したままアメリカだけ死に物狂いで誹謗した大和は果して読解力 15位の愚民大国だ.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일본을 살렸다?
1945년 8월 원폭 투하의 숨은 이야기…
원폭 투하 없었다면 일본 열도 황무지됐을지도...
이동훈 칼럼리스트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사형선고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놓고 지금까지 논란이 많다.
미국은 어떤 이유로 일본의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극약처방을 내린 것일까.
이것이 과연 전술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나, 아니면 고사(枯死) 직전의 일본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반면 자폭 항공기부대 가미가제, 자폭 어뢰부대 가이텐, 자폭 보트부대 신요오 등을 운용할 정도로 본토 사수를 외치던 일본군 수뇌부는 무슨 이유로 즉각 백기를 들었을까.
[원폭 투하를 둘러싼 논란 지속]
태평양 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5년 8월. 미국은 B-29 폭격기를 이용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15킬로톤급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21킬로톤급 ‘패트 맨’을 투하했다.
원폭 투하로 인해 히로시마에서 14만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명이 숨졌다. 부상 및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으로 대를 이어 고통당한 사람들 역시 수만명이 넘었다.
일격을 받은 일본 천황은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고, 9월 2일 미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의 항복 조인식을 끝으로 15년 동안 수천만의 인명을 살상한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특히 한국인이라면 아주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는 불가피 했는가’라는 주장이 요즘 들어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다.
다시 말해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끝낼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인 것이다.
반핵, 반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 중에 이 같은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다.
좀 과격한 사람들은 독일에 원폭을 투하하지 않은 것을 들어 “대일 원폭 투하는 황인종을 열등하게 여긴 미국의 인종차별적 전쟁 수행의 증거”라고까지 주장한다.
[2차 대전 후반의 옥쇄 행렬]
미국의 원폭 사용 이유를 알려면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43년 당시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 필요가 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전 태평양을 휩쓸며 불패 행진을 계속하던 일본군은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해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벌어진 과달카날 지상전에서 미군에 패한다.
숙련된 전투원 상당수를 손실함으로써 일본이 수세에 들어서게 된 것.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이제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지만 과달카날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5,000km나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있는 태평양의 섬들은 모두 일본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을 방치해 둔다는 것은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일본군의 수중에 방치해 둔다는 것과 마찬가지 뜻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는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차례 함락시키면서 일본 본토로 전진하는 이른바 ‘개구리 뜀 전략’을 채택했다.
즉 해병대와 육군을 앞세워 이들 섬에 대한 상륙전에 들어간 것.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국가를 위한, 천황을 위한 죽음을 영예로운 것으로 여기는 일본군에게 항복은 곧 치욕이었다.
특히 목숨을 버려서라도 임무를 수행하라고 세뇌 받고 있던 당시의 일본 병사들은 미군이 가는 전장 터마다 문자 그대로 ‘최후의 1명까지’ 싸웠다.
이렇듯 적과 싸우다 전멸한 일본군을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졌다’고 해서 옥쇄(玉碎)라고 표현했다.
1943년 5월 29일. 알류샨 열도의 아투 섬에서 야마자키 야스요 육군 대령 휘하의 병력 2,650명이 상륙한 미군을 맞아 불과 13명의 생존자만 남긴 채 모조리 전멸해 버렸다.
이 것을 시작으로 마킨 섬, 타라와 섬, 퀘젤린 제도, 사이판 섬, 티니안 섬, 괌 섬, 페릴류 섬 등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맞아 끝까지 싸워 극소수의 생존자만을 남기고 모조리 전멸했다.
일본군의 전투는 가면 갈수록 치열해져 1945년 2월 19일 일본 본토 인근의 이오지마에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 2만3,000명은 1,000명도 못되는 생존자를 남기고 모조리 전멸했다.
상륙한 미군 역시 전사자 약 7,000명, 부상자 2만명 이상의 기록적인 인명 피해를 낸다.
1945년 4월 1일부터 두 달 반 동안 계속된 오키나와 상륙전에서는 10만 일본군 중 전사 및 실종 6만6,000명, 일본 민간인 사망 및 실종 15만 명의 피해를 낸다.
하지만 일본은 더욱 경악스러운 대응에 나선다. 미국 항공모함을 향해 내리 꽂히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일본군은 자폭 어뢰부대인 가이텐, 자폭 보트부대인 신요오 등도 운용했다.
‘지능을 갖춘 생체회로로 유도되는 미사일’로 표현되기도 했던 이 자폭부대는 연합군에게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전투에서 군인이 자살적인 공격 또는 자폭 공격을 통해 적을 격퇴하는 행위는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죽음이 100% 보장된 자살공격 전문부대를 만들었고, 그에 맞는 자살용 병기까지 특별 제작했다는 점이 달랐다.
이렇게 극심한 저항에 부딪친 미군이 받은 물질적,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다.
규슈, 혼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을 직접 공격했다가는 과연 얼마만한 인명손실이 날 것인가? 그리고 유럽 전선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미 패배한 마당에 국민들에게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충분한 명분이 있을 것인가?
[미국의 막대한 사상자 예측]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인 ‘다운폴’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다운폴 작전의 하부 작전으로 규슈 상륙작전인 ‘올림픽’ 작전, 그리고 혼슈 상륙작전인 ‘코로넷’ 작전이 구상됐다.
올림픽 작전의 예정일은 1945년 11월 1일, 코로넷 작전의 예정일은 1946년 3월 1일이었다.
올림픽 작전에서는 34만명, 코로넷 작전에서는 57만명이 일본에 상륙해 싸울 예정이었다.
일본 역시 ‘결호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한 본토 방어 태세를 다지고 있었다.
종전 직전 일본 본토에 주둔한 육군 사단 수는 총 65개. 그러나 그 중 충분한 무장과 탄약을 지급받은 것은 절반 이하인 30개 사단에 불과했다.
다급해진 일본은 15~60세까지의 민간인 성인 남성과 17~40세까지의 민간인 성인 여성까지 모두 동원해 향토 방위대를 편성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무장은 잘해봐야 구식 소총 또는 민간용 총기였고 대부분은 죽창과 낫, 일본도 등으로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세균병기를 감염시켜 설령 죽더라도 그 시신을 생물학적 부비트랩으로 사용하려는 계획까지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실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요컨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국민은
얼마든지 죽어도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결사적인 군민합동 항전태세를 알게 된 미국은 다운폴 작전 내용에 일본 내 25개 대도시를 독가스로 공격한다는 내용까지 끼워 넣는다.
독가스 공격은 25개 도시의 인구 500만명이 전멸하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었다.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전사상 가장 처절한 전투가 될 것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6월 18일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이 출석한 가운데 열린 미국 합동참모본부 회의에서 다운폴 작전 진행시 발생할 미군 사상자 예상치가 논의됐다.
육군과 해군의 여러 전문가 및 고관들이 다양한 예측을 내놓았지만 최소한 25만명의 미군이 전사?부상?실종당하고 전쟁이 16개월 이상 더 연장될 것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군 전사자만 50만명이 발생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것은 당시의 미국으로서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일본 열도, 황무지됐을지도]
1945년 7월 16일. 미국 로스 알라모스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리에 끝난다.
그리고 열흘 후인 7월 26일에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4개국 수뇌가 독일 포츠담에서 모여 일본의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의 처리에 관해 논의한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항복 조건은 제국주의적 지도 세력의 제거, 전쟁 범죄자의 처벌, 연합국의 일본 지배, 일본 영토 제한, 철저한 민주화 등으로 규정되었지만 당시 일본 총리인 스즈키 칸타로는 7월 28일의 성명을 통해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제 미국에게 원폭 이외에 더 나은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원폭을 사용하지 않으면
미국인 수십만명과 일본인 수백만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본토 상륙전을 벌여야 했다.
결국 8월 6일 티니안 섬에 주둔해 있던 제509 혼성항공단 소속 B-29 ‘에놀라 게이’호가 폴 W. 티베츠 대령의 조종으로 비행, 일본 제2군사령부가 위치한 히로시마에 15킬로톤급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다.
히로시마는 완파되었고, 일본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그들의 반응은 미약했다.
아무도 항복하려 들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무리 미국이라도 저런 무기를 2발 이상 갖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첫 원폭을 맞았음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결국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21킬로톤급 원자탄 패트 맨을 투하했다.
그제서야 상황을 납득한 일본 천황과 대신들은 포츠담 선언의 요구사항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물론 원자폭탄이 수십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전후 미소간 전면 핵전쟁 위협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냉전시대를 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폭이 사용되지 않았더라면
두번에 걸친 일본 본토 상륙전과
무차별적으로 전개될
화생방전으로 인해 일본 열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했을 것이다.
천황을 비롯한 일본 지도부가 조선으로 거처를 옮겨 항전을 계속했을 경우 우리나라도 결코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안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어간 일본인 1명은 수백명 이상의 동포 목숨을 구한 셈이 된다.
이런 것이 아마도 역사의 비정한 산술이자 아이러니라고 할 것이다.
http://economy.hankooki.com/lpage/industry/200708/e2007080910162370260.htm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sec&sid1=105&oid=011&aid=0000194330
냉정하게 침착하게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고 있는 보기 드문 기사다...
아무튼, 미국의 입장에서도 자국민들을 마구 죽여서라도 절대 패배 선언하지 않는
曰帝를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런 관점에서 보면 원폭은 미국과 야마토 모두에 책임이 있지만,
야마토측에 그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히로시마 때 착실하게 인지했다면
나가사키는 무사했을 것이다....
어떻게 봐도 자업자득...
원폭 투하는曰帝의和病을 막는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미국 혼자 고독하게 무거운 역사적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군....
아무튼, 이런 역사적 FACT조차 왜곡한 채 미국만 필사적으로 비방한 야마토는 과연 독해력 15위의 우민大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