イラクのサマワ市民と自衛隊員
バンダービルド
イラクでは噂が早い。
2004年12月14日、イラクのサマワ地域は、日本の自衛隊の派遣期間の限界に達した状況で、ロケット砲弾などが飛んでくる状況になると、「自衛隊員はもう完全に離れてしまうだろうか?」と懸念する噂がすぐに広がった。
すると140人余りで構成された地元の老若男女のデモ隊が、自衛隊の宿営地に集まって、「日本の支援に感謝する」という意を伝えてきた。
そして、「どうか離れないでほしい」と懇願し始めた。
以降、自衛隊の滞在期間の延長を希望する署名運動が展開されて、二日間で1500人の署名が集められた。
実際のところ、感謝のデモはこれが二回目だった。
4月に自衛隊宿営地の隣にロケット砲弾が二度にわたって飛んでくると、サマワ市民で構成された100人以上のデモ隊が市内を行進したが、この時のスローガンは「日本の宿営地を守ろう!」だった。
前代未聞のデモだった。
米軍、イギリス軍、オランダ軍は、このデモに驚いて、日本側に向かって「一体どういうことなのか?」という問い合わせまでしてきた。
地元のイラク人と自衛隊員の間には、格別の信頼関係が形成されていた。
この信頼関係の形成の理由を説明する端的な事例はこうだ。
この信頼関係の形成の理由を説明する端的な事例はこうだ。
2004年1月に、番匠幸一郎・陸上自衛隊一等陸佐(大佐、現在は自衛隊司令官に昇格)が率いる復興支援1次援軍がイラクのサマワ地域に到着した。
装甲車両には、鮮明に日の丸が描かれていた。
装甲車両には、鮮明に日の丸が描かれていた。
また、自衛隊服の右胸の部分、左袖、背中上方には、遠くから見てもすぐに目につく日の丸が付いていた。
すると多国籍軍側からこのようなアドバイスがあった。
「(そのように国旗をつけていると)私を狙撃してくださいと宣伝することにしかならない。」
しかし日本側は「私たちは日本の自衛隊だ」という点をむしろ地元の人々にアピールしようとしたため、気にしなかった。
サマワに到着するとすぐ、番匠幸一郎一等陸佐は、地元の市民に重ねてこう理解を求めた。
「私たちはあなたの友人としてここに来ました。私たちの日本もまた、60年前、戦争のため、今のイラクと同様に国土が灰の状態でした。
すべてが無に帰り、食べるものもマトモにありませんでした。このような廃墟の中で、私たちの祖父母と親たちは立ち上がって、多くの努力をした結果、今は世界経済2位の日本という国を作ることができました。
メソポタミアという人類の歴史の中で最も優れた文明を持った偉大な民族が、まさに皆さまイラク人です。このような優れた皆さまに、日本がしたことができないはずはありません。
私たちは友人としてあなたが立ち上がることを助けるためにここに来ました。」
イラク人たちにとって、日本は同じアジア人種である。
また、日本と同じように、米国に戦争に敗れた経験まで偶然に一致している。
そんな日本から「友人として助けに来た」という話を聞いたイラク人の心は徐々に開かれた。
日本の自衛隊宿営地には、建設段階の時から多国籍外国軍が礼訪などの次元でよく訪ねてきた。
ところが自衛隊宿営地を訪れた外国軍関係者は、一様に驚いた。
自衛隊宿営地で働くイラク人の作業者が、夜なのにずっと作業をしている光景を目撃することになったからである。
他の多国籍軍宿営地で働くイラク人労働者は、午後3時4時になるとみんな家に帰る。
夏は気温が60度まで上がる劣悪な作業環境のため、3時4時に帰宅しても実際のところ無理もない。
根本的な違いを見ると、他の国の場合はイラク作業者に作業命令を下した後、イラク人だけが作業をしていたが、日本は違った。
日本の場合は、自衛隊幹部もイラク労働者たちと直接共に作業して、一緒に汗を流した。
宿営地の鉄条網設置の作業時には、日本人2~3人とイラク人7~8人がチームを組んで仕事をした。
鉄条網作業で軍服が引き裂かれてボロボロになり、時に鉄条網で怪我をして血を流しながらイラク人たちと共に作業を続けていった。
昼食もイラク人たちと一緒に分けて食べ、休憩時間なども会話の本を互いに持って、指で指しながら作業進度などに関する話などを分かち合った。
一度心に入ると好意的に取り組むのがアラブ人である。
作業時間を超えたというのに帰宅せず、自衛隊員と一緒にブルドーザーに乗り、一緒にハードワークに没頭している場合が多かった。
このようにして、徐々にイラク人の信頼を得て、「日本の人々に助けてもらいたい」というリクエストが徐々に増えるようになった。
2004年1月16日、現地サマワ新聞にこのような内容の記事が掲載された。
<私たちは、私たちの地域に日本の自衛隊が到着するまでは、道徳と倫理を備えたこの素晴らしい人々について何も知らない状態で、ただかれらは感情のない技術革命のようなもので、世界の人々の心を支配しているだけだという考えを持っていた。
しかし、かれら陸上自衛隊が私たちの地域に到着し、数週間が過ぎて、私たちサマワ地域の人々は、彼ら自衛隊員たちがやはり「伝統的な日本人」の子孫としていまだに愛情と倫理にあふれている人々だということを確認した。
彼らは偉大な文明を持っただけでなく、他国を尊重してくれるし、他の国の人々それぞれの家庭や仕事を尊重してくれるという優れた伝統を持っている。>
バンダービルド
引用ソース
https://www.chogabje.com/toron/toron22/view.asp?idx=&id=135649&table=TNTRCGJ⊂_table=TNTR01CGJ&cPage=1
あくまでも想像であるが、日本が韓国を近代化する過程でイラクと同じようなことをしたと思う。
韓国の英雄、李舜臣も日本が発掘し、韓国に広めたと言われている。
日本はなぜそういうことをしたのか?日本人を殺した武将である。
それはイラク人を励ますときにイラク人はメソポタミアの子孫だという「誇り」を拠所にしたのと同じだ。
あともう少し、もう少し頑張ろうというときに、李舜臣ならば絶対にやるだろうと自分を励ますのだ。人には「誇り」が必要だ。
ただ、日本人の敵を誇りにするしかない韓国の歴史を勉強した日本人は、どうすればよいかかなり悩んだだろうねえ。。
일본인의 방법
반들 빌드
이라크에서는 소문이 빠르다.
2004년 12월 14일, 이라크의 사마와 지역은, 일본의 자위대의 파견 기간의 한계에 이른 상황으로, 로켓 포탄등이 날아 오는 상황이 되면, 「자위대원은 이제(벌써) 완전하게 떨어져 버릴까?」라고 염려하는 소문이 곧바로 퍼졌다.
그러자(면) 140명남짓으로 구성된 현지의 남녀노소의 데모대가, 자위대의 숙영지에 모이고,「일본의 지원에 감사한다」라고 하는 뜻을 전해 왔다.
그리고,「어떨까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와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위대의 체재 기간의 연장을 희망하는 서명 운동이 전개되고, 이틀간에 1500명의 서명이 모아졌다.
4월에 자위대 숙영지의 근처에 로켓 포탄이 두 번에 걸쳐서 날아 오면, 사마와 시민으로 구성된 100명 이상의 데모대가 시내를 행진했지만, 이 때의 슬로건은「일본의 숙영지를 지키자!」(이었)였다.
전대미문의 데모였다.
미군, 영국군, 네델란드군은, 이 데모에 놀라고, 일본 측에 향해 「도대체 무슨 일인가?」라고 하는 문의까지 해 왔다.
또, 자위대옷의 우흉의 부분, 좌수, 등윗쪽에는, 멀리서 봐도 곧바로 눈에 띄는 일장기가 붙어 있었다.
그러자(면) 다국적군측으로부터 이러한 어드바이스가 있었다.
사마와에 도착하자마자, 반죠 코우이치로우 일등륙좌는, 현지의 시민에게 겹쳐 이렇게 이해를 요구했다.
우리는 친구로서 당신이 일어서는 것을 돕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그런 일본으로부터 「친구로서 도우러 왔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이라크인의 마음은 서서히 열렸다.
그런데 자위대 숙영지를 방문한 외국군관계자는, 한결같게 놀랐다.
자위대 숙영지에서 일하는 이라크인의 작업자가, 밤인데 쭉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에이다.
다른 다국적군 숙영지에서 일하는 이라크인 노동자는, 오후 3시 4시가 되면 모두가에 돌아간다.
여름은 기온이 60도까지 오르는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에, 3시 4시에 귀가해도 실제의 곳무리도 없다.
일본의 경우는, 자위대 간부도 이라크 노동자들(와)과 직접 모두 작업하고, 함께 땀을 흘렸다.
숙영지의 철조망 설치의 작업시에는, 일본인2~3인과 이라크인7~8인이 팀을 짜고 일을 했다.
철조망 작업으로 군복이 찢어져 너덜너덜이 되어, 가끔 철조망으로 다치고 피를 흘리면서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계속하고 갔다.
점심 식사도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어 휴식 시간등도 회화의 책을 서로 가지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작업 진도 등에 관한 이야기등을 분담했다.
작업시간을 넘었다는 것에 귀가하지 않고, 자위대원과 함께 불도저를 타, 함께 중노동에 몰두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하고, 서서히 이라크인의 신뢰를 얻고, 「일본의 사람들이 도와 주었으면 한다」라고 하는 리퀘스트가 서서히 증가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지역에 일본의 자위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도덕과 윤리를 갖춘 이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단지 그들은 감정이 없는 기술 혁명과 같은 것으로,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큼)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라크의 사마와 시민과 자위대원
반들 빌드
이라크에서는 소문이 빠르다.
2004년 12월 14일, 이라크의 사마와 지역은, 일본의 자위대의 파견 기간의 한계에 이른 상황으로, 로켓 포탄등이 날아 오는 상황이 되면, 「자위대원은 이제(벌써) 완전하게 떨어져 버릴까?」라고 염려하는 소문이 곧바로 퍼졌다.
그러자(면) 140명남짓으로 구성된 현지의 남녀노소의 데모대가, 자위대의 숙영지에 모이고,「일본의 지원에 감사한다」라고 하는 뜻을 전해 왔다.
그리고,「어떨까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와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위대의 체재 기간의 연장을 희망하는 서명 운동이 전개되고, 이틀간에 1500명의 서명이 모아졌다.
실제의 곳, 감사의 데모는 이것이 2회째였다.
4월에 자위대 숙영지의 근처에 로켓 포탄이 두 번에 걸쳐서 날아 오면, 사마와 시민으로 구성된 100명 이상의 데모대가 시내를 행진했지만, 이 때의 슬로건은「일본의 숙영지를 지키자!」(이었)였다.
전대미문의 데모였다.
현지의 이라크인과 자위대원의 사이에는, 각별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신뢰 관계의 형성의 이유를 설명하는 단적인 사례는 이러하다.
이 신뢰 관계의 형성의 이유를 설명하는 단적인 사례는 이러하다.
2004년 1월에, 반죠 코우이치로우·육상 자위대 일등륙좌(대령, 현재는 자위대 사령관에 승격)가 인솔하는 부흥 지원 1차 원군이 이라크의 사마와 지역에 도착했다.
장갑차 양에는, 선명히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장갑차 양에는, 선명히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또, 자위대옷의 우흉의 부분, 좌수, 등윗쪽에는, 멀리서 봐도 곧바로 눈에 띄는 일장기가 붙어 있었다.
그러자(면) 다국적군측으로부터 이러한 어드바이스가 있었다.
「(그처럼 국기를 붙이고 있으면) 나를 저격 해 주세요라고 선전하는 것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일본측은 「우리는 일본의 자위대다」라고 하는 점을 오히려 현지의 사람들에게 어필하려고 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다.
사마와에 도착하자마자, 반죠 코우이치로우 일등륙좌는, 현지의 시민에게 겹쳐 이렇게 이해를 요구했다.
「우리는 당신의 친구로서 여기에 왔습니다.우리의 일본도 또, 60년전, 전쟁 때문에, 지금의 이라크와 같게 국토가 재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무에 돌아가, 먹을 것도 마트모에 없었습니다.이러한 폐허안에서, 우리의 조부모와 부모들은 일어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지금은 세계경제 2위의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인류의 역사 중(안)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확실히 여러분 이라크인입니다.이러한 뛰어난 여러분에게, 일본이 했던 것이 할 수 없을 것은 없습니다.
이라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본은 같은 아시아인종이다.
또, 일본과 같이, 미국에 전쟁에 진 경험까지 우연히 일치하고 있다.
그런 일본으로부터 「친구로서 도우러 왔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이라크인의 마음은 서서히 열렸다.
일본의 자위대 숙영지에는, 건설 단계때부터 다국적 외국군이 례방등의 차원에서 잘 찾아 왔다.
그런데 자위대 숙영지를 방문한 외국군관계자는, 한결같게 놀랐다.
자위대 숙영지에서 일하는 이라크인의 작업자가, 밤인데 쭉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에이다.
다른 다국적군 숙영지에서 일하는 이라크인 노동자는, 오후 3시 4시가 되면 모두가에 돌아간다.
여름은 기온이 60도까지 오르는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에, 3시 4시에 귀가해도 실제의 곳무리도 없다.
근본적인 차이를 보면, 다른 나라의 경우는 이라크 작업자에게 작업 명령을 내린 후, 이라크인만이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경우는, 자위대 간부도 이라크 노동자들(와)과 직접 모두 작업하고, 함께 땀을 흘렸다.
숙영지의 철조망 설치의 작업시에는, 일본인2~3인과 이라크인7~8인이 팀을 짜고 일을 했다.
철조망 작업으로 군복이 찢어져 너덜너덜이 되어, 가끔 철조망으로 다치고 피를 흘리면서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계속하고 갔다.
점심 식사도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어 휴식 시간등도 회화의 책을 서로 가지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작업 진도 등에 관한 이야기등을 분담했다.
한 번 마음에 들어가면 호의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랍인이다.
작업시간을 넘었다는 것에 귀가하지 않고, 자위대원과 함께 불도저를 타, 함께 중노동에 몰두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하고, 서서히 이라크인의 신뢰를 얻고, 「일본의 사람들이 도와 주었으면 한다」라고 하는 리퀘스트가 서서히 증가하게 되었다.
2004년 1월 16일, 현지 사마와 신문에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그러나, 그들 육상 자위대가 우리의 지역에 도착해, 수주간이 지나고, 우리 사마와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 자위대원들이 역시 「전통적인 일본인」의 자손으로 하고 있어 아직에 애정과 윤리에 넘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위대한 문명을 가졌던 것 뿐만 아니라, 타국을 존중해 주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 각각의 가정이나 일을 존중해 준다고 하는 뛰어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 하는 과정에서 이라크와 같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히데오, 이순신도 일본이 발굴해, 한국에 넓혔다고 말해지고 있다.
일본은 왜 그런 것을 했는지?일본인을 죽인 무장이다.
그것은 이라크인을 격려할 때 이라크인은 메소포타미아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랑」을 거소로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좀 더, 좀 더 노력하자고 할 때,이순신이라면 반드시 할 것이라고 자신을 격려한다.사람에게는 「자랑」이 필요하다.
단지, 일본인의 적을 자랑으로 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역사를 공부한 일본인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꽤 고민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