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韓併合論というのは、ずっと以前から日韓双方で議論されて来ていました。
日本側にも賛成派と反対派が居たし、同じ様に朝鮮側にも賛成派と反対派がいました。
そして朝鮮の方が先に併合を打診してきます。
総理大臣・李完用の側近である李人植が密使として日本に来ます。
李氏朝鮮の統治がどれくらい酷かったかと言うと、1777年の朝鮮半島の総人口は1,804万人でしたが、それが日韓併合前の1910年には1,313万人にまで減っていました。
このことは、李朝518年の統治がいかにひどいものであったかを如実に証明しています。
そして、金鉱採掘権や石炭採掘権に始まり、森林伐採権、鉄道を敷く権利、海関管理権、軍隊の教育訓練権、電車・電灯・水道経営権、東海岸における捕鯨権、漁業権など売れるものすべてを外国に売り、外交権まで売ろうとしたところ危機を感じた日本が日露戦争後の1905年に、保護国化し、朝鮮の国家予算の2/3を日本が毎年負担することになります。
そんな日本に併合を望むのはむしろ朝鮮としたら当たり前の話だったと思います。
そして日韓併合反対派の日本初代総理大臣の伊藤博文が安重根によって暗殺されます。
併合反対派の重鎮が居なくなり、日本は前述の通り、4度に渡る併合の請願書を受け、朝鮮が欧米列強に売り渡した利権を日本がすべて買い戻して併合に至ります。
請願書を作った「一進会」の李容九は、数度にわたる朝鮮の政治改革の失敗から、両班による下層階級への搾取虐待を朝鮮イン自身の力で克服することを不可能と考えており、日本との合邦によって初めてこれが実現できると信じたのである。
そして、同じ「一進会」の中心人物で大韓帝国のである農商工部大臣・内相だった宋秉畯は、合併後の朝鮮半島の政治の善後策として、日本の桂太郎首相に資金150万を請願したところ、1,000万円でもよいとの回答を得て、活動を邁進し、合併後のちょうせんの政治にも大きな影響を与えた。
その朝鮮の近代化に大きな功績を残した二人は、2002年に親日人名辞書に選定され、2007年に「親日反民族行為195人名簿」にも入れられ、親日反民族行為者財産の国家帰属に関する特別法により、子孫が財産を没収された。現在は、韓国において忌み嫌われる存在となっている。
韓日合邦を要求する声明書
日本は日清戦争で莫大な費用と多数の人命を費やし韓国を独立させてくれた。
また日露戦争では日本の損害は甲午の二十倍を出しながらも、韓国がロシアの口に飲み込まれる肉になるのを助け、東洋全体の平和を維持した。
韓国はこれに感謝もせず、あちこちの国にすがり、外交権が奪われ、保護条約に至ったのは、我々が招いたのである。
第三次日韓協約(丁未条約)、ハーグ密使事件も我々が招いたのである。
伊藤博文公が韓国国民を見守ってくれ、太子を導いて我々韓国のために御苦労されたことは忘れられない。
にもかかわらずハルビンの事件が起きてしまった以上、今後どのような危険が訪れるかも分からないが、これも我々が招いたことである。
我が国の皇帝陛下と日本天皇陛下に懇願し、朝鮮インも日本人と同じ一等国民の待遇を享受して、政府と社会を発展させようではないか
ハーグ密使事件
ポーツマス条約の仲裁に入った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米大統領は「韓国は極度に無気力で、最低限の抵抗に及ぶ能力もない。名ばかりの要塞、軍艦、軍隊を保有しているが、考慮する価値もない」と評するなど、日本が朝鮮を保護国化することに世界から反対意見が全くなく承認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
保護国にする際、日本に全面協力する態度を装っていた韓国皇帝・高宗であったが、日本による近代化に反対する両班を中心に暴動が勃発します。
これに焦った皇帝・高宗は1907年の第2回万国平和会議に密使を派遣して「(保護国化の)条約締結は強制であり無効である」と訴えでるという裏切り行為を行います。
しかし、条約(第二次日韓協約)は国際的に認められていた国際協約であった為、この訴えは世界から拒絶されます。
これによって、皇帝・高宗は急速に力を失い、「一進会」が台頭してくることになります。
한일합방론이라고 하는 것은, 훨씬 이전부터 일한 쌍방에서 논의되어 와있었습니다.
일본 측에도 찬성파와 반대파가 있었고, 같게 조선 측에도 찬성파와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먼저 병합을 타진해 옵니다.
총리대신·이완용의 측근인 리인식이 밀사로서 일본에 옵니다.
이씨 조선의 통치가 어느 정도 심했는가 하고 말하면, 1777년의 한반도의 총인구는 1,804만명이었지만, 그것이 한일합방전의 1910년에는 1,313만명에게까지 줄어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조 518년의 통치가 얼마나 심한 것이었는지를 여실에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광 채굴권이나 석탄 채굴권에 시작해, 삼림 벌채권, 철도를 깔 권리, 해관 관리권, 군대의 교육 훈련권, 전철·전등·수도 경영권, 동해안에 있어서의 포경권, 어업권등 팔리는 것 모든 것을 외국에 팔아, 외교권까지 팔려고 했는데 위기를 느낀 일본이 러일 전쟁 후의 1905년에, 보호국화해, 조선의 국가 예산의 2/3을 일본이 매년 부담하게 됩니다.
그런 일본에 병합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조선으로 하면 당연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일합방 반대파의 일본 최초대 총리대신 이토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서 암살됩니다.
병합 반대파의 중진이 없게 되어, 일본은 상술한 대로, 4도에 걸치는 병합의 청원서를 받아 조선이 구미 열강에 매도한 이권을 일본이 모두 되사 병합에 이릅니다.
청원서를 만든 「일진회」의 리용9는, 몇차례에 걸치는 조선의 정치 개혁의 실패로부터, 양반에 의한 하층계급에의 착취 학대를 조선 인 자신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불가능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일본과의 합방에 의하고 처음으로 이것을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을 「일진회」의 중심 인물로 대한제국의 것인 농상 코우베 대신·내상이었던 송병?(은)는, 합병 후의 한반도의 정치의 후선책으로서 일본의 가쓰라 다로 수상에 자금 150만을 청원 했는데, 1,000만엔이라도 좋다는 회답을 얻고, 활동을 매진 해, 합병 후의 나비 선의 정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조선의 근대화에 큰 공적을 남긴 두 명은, 2002년에 친일 인명 사전에 선정되어 2007년에 「친일반민족 행위 195 인명부」에도 넣을 수 있어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자손이 재산이 몰수되었다.현재는, 한국에 있어 기피해지는 존재가 되고 있다.
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일본은 청일 전쟁으로 막대한 비용과 다수의 인명을 소비해 한국을 독립시켜 주었다.
또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의 손해는 갑오의 20배를 내면서도, 한국이 러시아의 입에 삼켜지는 고기가 되는 것을 도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유지했다.
한국은 이것에 감사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의 나라에 매달려, 외교권이 빼앗겨 보호 조약에 이른 것은, 우리가 불렀던 것이다.
제3차 일한 협약(테이미 조약), 헤이그 밀사 사건도 우리가 불렀던 것이다.
이토히로부미공이 한국 국민을 지켜봐 주고 태자를 이끌어 우리 한국을 위해서 수고 된 것은 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얼빈의 사건이 일어나 버린 이상, 향후 어떠한 위험이 방문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우리가 부른 것이다.
우리 나라의 황제 폐하와 일본 일본왕에게 간절히 원해, 조선 인도 일본인과 같은 일등국민의 대우를 향수하고, 정부와 사회를 발전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헤이그 밀사 사건
포츠머스 조약의 중재에 들어간 세오도어·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한국은 극도로 무기력하고, 최저한의 저항에 이르는 능력도 없다.이름뿐의 요새, 군함,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고려하는 가치도 없다」라고 평가하는 등,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것에 세계로부터 반대 의견이 전혀 없게 승인되게 됩니다.
보호국으로 할 때, 일본에 전면 협력하는 태도를 가장하고 있던 한국 황제·고종이었지만, 일본에 의한 근대화에 반대하는 양반을 중심으로 폭동이 발발합니다.
이것에 초조해 한 황제·고종은 1907년의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보호국화의) 조약 체결은 강제이며 무효이다」라고 호소해 나온다고 하는 배반 행위를 실시합니다.
그러나, 조약(제2차 일한 협약)은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국제 협약인 때문, 이 호소는 세계로부터 거절됩니다.
이것에 의해서, 황제·고종은 급속히 힘을 잃어, 「일진회」가 대두해 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