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舜臣将軍. 私ももちろん尊敬する.
しかし, その方が今のような “護国の象徴”, “聖雄(聖雄)”に推戴された状況にはさまざまな話がある.
1960年代以前まで将軍よりは当時の大元帥権慄将軍, 晋州城(晋州城)を射手して日本軍の陸路を通じる湖南地方進撃を遮断した金市民将軍がずっと注目されていたと言う.
何の理由なのか李舜臣(李舜臣) 将軍が壬辰の乱の独歩的英雄で目立ち始めたことは朴正煕政府の時代からと言う.
そしてその方の象徴のようになった呼称である 忠武公, それは李舜臣将軍万の呼称ではなくて, 国家の安寧と生存にこの上なく大きい貢献を一人物たちによく与えられるピョチングで分かっている. 権慄など以外に甚だしくは元均にまで 忠武公というピョチングが下賜されたと言う.
そして日本側の当時記録には先祖賃金, 当時皇太子だった光海君, 領議政 柳成竜, 大元帥権慄, クァクゼウ, 金悳領など有名だった義兵長, そして 晋州城を最後まで射手した 晋州牧師 金市民に対する記録に比べて, 李舜臣将軍と亀船に対する記録比重は非常に少ないと確認された.
将軍の偉い人柄とかっかくした功労, そして信義境地に着いたと言える能力...
その尊厳な歴史が姑息な人たちによって軽くフィドルリに, むしろ垢染みるようになるかそれが心配する.
顯忠祠に仕えられている将軍の標準影幀
東洋 書画家 張優性(張遇聖 , 1912‾2005) 1953年 作
将軍の実際姿が伝わる資料(最近日本で三国志ソチォック(三国志 西蜀)の装備(張飛)を連想させる将軍の姿を描いた絵が発見されることはしたが...)がなくて
当時生存している将軍直系子孫の姿を参考して描いたと言う.
이순신 장군. 나도 물론 존경한다.
하지만, 그분이 지금과 같은 "호국의 상징", "성웅(聖雄)"으로 추대된 상황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장군 보다는 당시의 대원수 권율 장군,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해 일본군의 육로를 통한 호남지방 진격을 차단한 김시민 장군이 훨씬 주목받고 있었다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임진왜란의 독보적 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부의 시대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그 분의 상징처럼 된 호칭인 忠武公, 그것은 이순신 장군 만의 호칭은 아니고, 국가의 안녕과 생존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들에게 자주 주어지는 표칭으로 알고 있다. 권율 등 이외에 심지어 원균에게까지 忠武公이라는 표칭이 하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측의 당시 기록에는 선조 임금,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 領議政 유성룡, 대원수 권율, 곽재우, 김덕령 등 유명했던 의병장, 그리고 晋州城을 끝까지 사수했던 晋州牧師 김시민에 대한 기록에 비해,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대한 기록 비중은 매우 적다고 확인되었다.
장군의 존경스러운 인품과 혁혁한 공로, 그리고 신의 경지에 닿았다고 할 수 있는 능력...
그 존엄한 역사가 소인배들에 의해 가볍게 휘둘리다가, 오히려 때묻게 될까 그것이 염려스럽다.
顯忠祠에 모셔져 있는 장군의 표준 영정
동양 書畵家 장우성(張遇聖 , 1912~2005) 1953년 作
장군의 실제 모습이 전해지는 자료(최근 일본에서 삼국지 서촉(三國志 西蜀)의 장비(張飛)를 연상시키는 장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발견되기는 했지만...)가 없어
당시 생존해 있는 장군 직계 자손의 모습을 참고해 그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