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が一番弱い時に竹島を取った韓国 下條正男・拓殖大教授
「島根県の『竹島の日条例』は、東アジア情勢を語る新たな基点だ」-。島根県が主催する「竹島問題を考える講座」が同県浜田市で開かれた。講師を務めた県竹島問題研究会座長の下條正男・拓殖大国際学部教授(日本史)は、この条例を制定した島根県の功績を評価する一方、韓国による竹島の不法占拠が続く問題が65年以上を経ても解決しない現状を嘆いた。「竹島問題の理解のために」と題して行われた同講座の主な内容は次の通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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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島問題は、1952年1月18日、当時の李承晩・韓国大統領が公海上に「李承晩ライン」を引き、竹島を一方的に韓国領に含めてしまったのが発端だ。
韓国は当時、北朝鮮との動乱が続いていたさなかで、多くの韓国人が日本に逃げ込んでいた。また、日本は53億ドルともいわれる資産を朝鮮半島に残していた。そんな中、同年2月から始まった日韓国交正常化交渉で、韓国側としては、多数の韓国人を日本から送り返されたり、膨大な資産を回収されたりしては困る。このため、外交カードとして使われたのが竹島であり、李ラインを理由に拿捕(だほ)・抑留された日本の漁船員であった。
交渉の結果、1965年6月に日韓基本条約が締結された。結局、日本は無償で3億ドル、有償で2億ドル、民間から3億ドルを韓国側に渡し、朝鮮半島に残した資産もそのままとなった。
その後、国連海洋法条約(1994年発効)に基づき、各国が自国の排他的経済水域を設定する中で、韓国は竹島の不法占拠を正当化する手段として、竹島に接岸施設を作った。日本は抗議したものの、結局なにもでき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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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んな日本の状況を一変させたのが、島根県の「竹島の日」条例だ。竹島周辺の海域は本来、日本の排他的経済水域内だが、日韓両国の共同管理水域となってしまい、たくさんの韓国船が入って不法状態となったため、島根県は2005年3月に条例を制定し、領土権の確立を求めた。
この年は、日本政府が竹島の領土編入を閣議決定し、島根県が県告示で隠岐島司の所管とした1905年からちょうど100周年。島根県はこれを記念して「竹島の日」を設け、領土権の確立を目指したのだ。
一方、この年は日韓国交正常化40周年にも当たり、島根県の動きに対し外務省は韓国との関係を考え、条例を制定しないよう圧力をかけてきた。だが、島根県議会はそれを拒否。そこから事態は大きく動く。それまで韓国側は、「日韓間に領土問題は存在しない」「静かな外交を」と言っていたが、(後に述べるように)大きく変わってい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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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家には、領土・領海・領空▽国民▽主権-の3要素がある。領土を侵されたり、国民が拉致されたりした場合、それは国家が侵されているのであり、政治家であれば、国会議員であれば、なおさらそれに対応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しかし、日本は北朝鮮による拉致を放置してきたし、尖閣諸島の問題もアメリカに解決を頼ってきた。竹島や北方領土の問題も未解決のままだ。
これで、日本は本当に外交を行っているといえるのか。(そんなとき)国に代わって島根県が日本としての意思表示をしたのだ。
当時の政府、外務省などはこれにいい感情を持っていなかった。さらにそのあとの旧民主党政権では、「竹島は韓国領だ」などと言う鳩山由紀夫氏が首相を務めた。
島根県がこういう対応をしなければ、誰も動かなかったということだ。この条例制定が、新たな東アジア情勢を語る基点になるかもしれないし、そうしていかなければいけ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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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側は、問題が起こったときの対応が早い。島根県が条例を制定する直前、当時の盧武鉉(ノ・ムヒョン)大統領が「東北アジアの平和のための正しい歴史定立企画団」の設立を法律で定め、条例制定後の翌月にはこれを発足させた。
さらに翌年には「東北アジア歴史財団」と改称し、竹島問題や慰安婦問題、日本海呼称問題、歴史教科書問題などを専門的に研究する財団とした。ここには50~60人の研究員がいる。
日本には、外務省の外郭団体として日本国際問題研究所があり、島根県の竹島問題研究会の何十倍もの予算を使って活動しているが、成果は何十分の一ほども挙げていない。韓国側が標的にしているのは、あくまでも島根県の竹島問題研究会。ここが、国に代わり韓国に対して反論をしてい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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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島の日条例は、日本の政治のあり方を考え直す原点を作った。今後、これをどう解決に結びつけていくか。国際法の観点を主張するだけでなく、仲良くしようということだけでなく、自分たちの主張を明確にしていくことが重要だ。
韓国は長い歴史の中で、日本が弱いときには中国につき、中国が弱くなると日本についてきた国。李ラインを引き、竹島を不法占拠したのは、第二次大戦で日本が敗れ、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の発効前で日本が国家としての資格を持っていない時だった。日本が一番弱いときに、韓国が取ったのだ。
これに対し、日本は「ごめんなさい」と言えば相手が譲歩してくれると思っていたが、それは絶対ない。言うべきことをいい、すべきことをしないと、日本は生きていけない。
問題は、尖閣諸島に対しても竹島に対しても、「日本の領土ではない」という人たちが日本国内にも多数いることだ。われわれは、そうした見解の異なる人たちとも戦っ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は「竹島問題を考える講座」のような会をもっと開いて、みなさんに理解してもらうことが必要になる。(7月末に開催された講座の詳報です)
拓殖大は本当に保守色が強そうですね。
たしか呉善花も拓殖大教授だったようなw
일본이 제일 약할 때에 타케시마를 잡은 한국 시모죠 마사오·타쿠쇼쿠대 교수
「시마네현의 「타케시마의 날조례」는, 동아시아 정세를 말하는 새로운 기점이다」-.시마네현이 주최하는 「타케시마 문제를 생각하는 강좌」가 동현 하마다시에서 열렸다.강사를 맡은 현 타케시마 문제 연구회 단장 시모죠 마사오·타쿠쇼쿠대 국제 학부 교수(일본사)는, 이 조례를 제정한 시마네현의 공적을 평가하는 한편, 한국에 의한 타케시마의 불법 점거가 계속 되는 문제가 65년 이상을 거쳐도 해결하지 않는 현상을 한탄했다.「타케시마 문제의 이해를 위해서」라고 제목을 붙여 행해진 동강좌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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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시마 문제는, 1952년 1월 18일, 당시의 이승만·한국 대통령이 공해상에 「이승만 리인」을 그어, 타케시마를 일방적으로 한국령에 포함해 버린 것이 발단이다.
한국은 당시 , 북한과의 동란이 계속 되어 아픔 (안)중으로,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 도망치고 있었다.또, 일본은 53억 달러라고도 하는 자산을 한반도에 남기고 있었다.그런 가운데, 동년 2월부터 시작된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으로, 한국측으로서는, 다수의 한국인을 일본에서 돌려 보내지거나 방대한 자산을 회수 되거나 해서는 곤란하다.이 때문에, 외교 카드로 해서 사용된 것이 타케시마이며, 이 라인을 이유로 나포()·억류된 일본의 어선원이었다.
교섭의 결과, 1965년 6월에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었다.결국, 일본은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으로 2억 달러, 민간으로부터 3억 달러를 한국측에 건네주어, 한반도에 남긴 자산도 그대로되었다.
그 후, 유엔 해양법 조약(1994년 발효)에 근거해, 각국이 자국의 배타적 경제 수역을 설정하는 가운데, 한국은 타케시마의 불법 점거를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서 타케시마에 접안 시설을 만들었다.일본은 항의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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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본의 상황을 일변시킨 것이, 시마네현의 「타케시마의 날」조례다.타케시마 주변의 해역은 본래, 일본의 배타적 경제 수역내이지만, 일한 양국의 공동 관리 수역이 되어 버려, 많은 한국선이 들어가 불법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시마네현은 2005년 3월에 조례를 제정해, 영토권의 확립을 요구했다.
이 해는, 일본 정부가 타케시마의 영토 편입을 각의 결정해, 시마네현이 현 고시로 오키 시마 츠카사의 소관으로 한 1905년부터 정확히 100주년.시마네현은 이것을 기념해 「타케시마의 날」을 마련해 영토권의 확립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한편, 이 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에도 맞아, 시마네현의 움직임에 대해 외무성은 한국과의 관계를 생각해 조례를 제정하지 않게 압력을 가해 왔다.하지만, 시마네현 의회는 그것을 거부.거기로부터 사태는 크게 움직인다.그것까지 한국측은, 「일한간에 영토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용한 외교를」이라고 했지만 , ( 후에 말하도록(듯이)) 크게 바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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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는, 영토·영해·영공▽국민▽주권-의 3 요소가 있다.영토를 침범되거나 국민이 납치 되거나 했을 경우, 그것은 국가가 침범되고 있는 것이어, 정치가이면, 국회 의원이면, 더욱 더 거기에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북한에 의한 납치를 방치해 왔고, 센카쿠 제도의 문제도 미국에 해결을 의지해 왔다.타케시마나 북방 영토의 문제도 미해결인 채다.
이것으로, 일본은 정말로 외교를 실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그럴 때) 나라에 대신해 시마네현이 일본으로서의 의사 표시를 했던 것이다.
당시의 정부, 외무성 등은 이것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한층 더 그 후의 구민주당 정권에서는, 「타케시마는 한국령이다」 등이라고 하는 하토야마 유키오씨가 수상을 맡았다.
시마네현이 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이 조례 제정이, 새로운 동아시아 정세를 말하는 기점이 될지 모르고, 그렇게 해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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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측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의 대응이 빠르다.시마네현이 조례를 제정하기 직전, 당시의 노무현(노·무홀) 대통령이 「토호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올바른 역사 정립 기획단」의 설립을 법률로 정해 조례 제정 후의 다음달에는 이것을 발족시켰다.
한층 더 다음 해에는 「토호쿠 아시아 역사 재단」이라고 개칭해, 타케시마 문제나 위안부 문제, 일본해 호칭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재단으로 했다.여기에는 50~60명의 연구원이 있다.
일본에는, 외무성의 외곽단체로서 일본 국제 문제 연구소가 있어, 시마네현의 타케시마 문제 연구회의 몇십배의 예산을 사용해 활동하고 있지만, 성과는 몇십 분의1(정도)만큼이나 들지 않았다.한국측이 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마네현의 타케시마 문제 연구회.여기가, 나라에 대신해 한국에 대해서 반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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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시마의 날조례는, 일본의 정치의 본연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는 원점을 만들었다.향후, 이것을 어떻게 해결에 묶어 갈까.국제법의 관점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는 것 뿐만이 아니고, 스스로의 주장을 명확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긴 역사 중(안)에서, 일본이 약할 때에는 중국에 대해, 중국이 약해지면 일본에 따라 온 나라.이 라인을 그어, 타케시마를 불법 점거한 것은,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져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의 발효전에 일본이 국가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였다.일본이 제일 약할 때에, 한국이 잡았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일본은 「미안해요」라고 하면 상대가 양보해 준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절대 없다.말해야 할 일을 말해, 해야 할것을 하지 않으면 일본은 살아갈 수 없다.
문제는, 센카쿠 제도에 대해서도 타케시마에 대해서도, 「일본의 영토는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본내에도 다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그러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도 싸워 가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기 위해서는 「타케시마 문제를 생각하는 강좌」와 같은 회를 더 열고, 여러분에게 이해받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7월말에 개최된 강좌의 상세보도입니다)
타쿠쇼쿠대는 정말로 보수색이 강한 듯하네요.
분명히 오선화도 타쿠쇼쿠대 교수였던 것 같은 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