アジア通貨危機
各国での状況
韓国
韓国は、マクロ経済のファンダメンタルズが十分であったが、一方で金融部門では不良債権を抱えてしまった。過剰な借金は、経営判断で大きなミスを招き、経営交代を招いた。起亜自動車の倒産を皮切りに、経済状態が悪化。国際通貨基金の援助を要請する事態となった。
アジアの市場に異変を感じた、格付け機関のムーディーズは、1997年7月に、韓国の格付けをA1からA3まで落とし、同年の11月には、さらにBaa2にまで格を落とした事で、既に落ち込んでいた韓国の証券取引市場をさらに冷え込ませて、韓国経済を不振に陥れた。
先進国協調の下で、韓国に対する金融支援パッケージが組まれた。韓国が通貨危機に際して1997年12月4日に IMF と合意した金融支援は総額580億ドル。このうち実際に支援が実施されたのは国際通貨基金の210億ドル、世界銀行の100億ドル、アジア開発銀行の40億ドル。これに加え、第二線準備として230億ドルが準備され、日本はその中で最大の100億ドルをコミットした。[4]結局、第二線準備金は使用されることはなく貸し出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5][6]。
ソウル証券取引所は、同年11月7日に4%も落ち込み、翌日には一日の株価変動としては、史上最大の7%の下落を記録した。この後、IMFがしっかりとした再建を行うかどうかの不安感も災して、1997年11月24日には、さらに7.2%落ち込んだ。12月12日時点で、韓国の抱えていた民間短期対外債務残高は、320億ドル、その借入先の内訳は、日本が118億ドル、ヨーロッパ全体で118億ドル、アメリカ合衆国で42億ドルであったとされる[3]。
そして、同年末に韓国は、デフォルト寸前の状況にまで追い込まれた。これにより IMFが韓国の経済に介入し、現代グループなどに対して財閥解体が行われた。先に述べた、日米欧の民間銀行に対する債務返済繰り延べ(リスケジューリング)の成否が、まさに韓国の国家破産を回避できるかどうかの鍵を握っていた。
日本国政府は、邦銀に対して返済繰り延べの説得に奔走し、混乱する金融市場の中で邦銀の合意を取り付け、1998年1月29日には、日米欧民間銀行団の短期債務繰り延べ交渉を妥結に導いた。これは市場に大きな安堵感を与え、1月29日に1ドル=1,678ウォンであった為替レートは、翌1月30日には1,524ウォンまで値を戻した。
原因分析
改革が必要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問題の先送りが事態を大きくした原因だったのではとETV2002アジア通貨危機の真相2にて姜慶植が分析している。
姜慶植は金永三政権での経済担当であったが、金大中政権が開催したIMF危機事態の責任を問う国会聴聞会でにおいては、「日本系の金融機関が、日本国内の予想外の金融事情から短期債権の満期延長を拒否し、1997年11月-12月に急に70億ドルを回収していったのが金融危機をもたらした原因」だと決めつけ、それを予測出来なかったのは当たり前で自分たち金融当局には直接の責任は無い、と主張した。この主張に対し、前政権を追求したかった金大中政権は、欧米系金融機関が資金を引き揚げたのに対し、日本系金融機関は最後まで韓国金融機関への協調融資に応じていたと明らかにし、激しく非難した。[9]
ところがそれ以降、韓国内ではその主張が独り歩きし、アジア通貨危機は日本の資金引き上げ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たとする新聞記事などが多くみられるが、それらはいずれも根拠がないものである。 [10] [11] [12]
また、通貨危機に際しては、多くの銀行が資金を調達できず日本政府から100億ドルの融資を使っても経済破綻は避けきれず結局は国際通貨基金の管理下に入った[13]。
日本版Wikiより
https://ja.wikipedia.org/wiki/アジア通貨危機
姜慶植の偽証が世論となった国
それが現在の南朝鮮(嘲笑)
あひゃひゃひゃ!
아시아 통화 위기
각국에서의 상황
한국
한국은,마크로 경제의펀더멘털스(fundamentals)가 충분했지만 , 한편으로금융 부문에서는불량 채권을 안아 버렸다.과잉인빚은, 경영 판단으로 큰 미스를 불러, 경영 교대를 불렀다.기아 자동차의도산을 시작으로, 경제 상태가 악화.국제통화기금의 원조를 요청하는 사태가 되었다.
아시아의시장에 이변을 느낀,등급 설정 기관의무디스는,1997년7월에, 한국의 등급설정을A1로부터 A3까지 떨어뜨려, 동년의11월에는, 한층 더Baa2에까지 격을 떨어뜨린 일로, 이미 침체되어 있던 한국의 증권거래 시장을 한층 더 차가워지게 하고, 한국 경제를 부진에 빠뜨렸다.
선진국 협조아래에서, 한국에 대한 금융 지원 패키지가 짜여졌다.한국이 통화 위기에 즈음하여 1997년 12월 4일에 IMF 와 합의한 금융 지원은 총액 580억 달러.이 중 실제로 지원이 실시된 것은국제통화기금의210억 달러,세계 은행의100억 달러,아시아 개발은행의40억 달러.이것에 가세해 제2선준비로서 230억 달러가 준비되어 일본은 그 중에 최대의 100억 달러를 위탁했다.[4]결국, 제2선준비금은 사용될 것은 없게 대출될 것은 없었다[5][6].
서울 증권거래소는, 동년11월 7일에4%도 침체해, 다음날에는 하루의 주가변동으로서는, 사상 최대의7%의 하락을 기록했다.이 후, IMF가 제대로 한 재건을 실시할지의 불안감도 재 하고, 1997년11월 24일에는, 게다가7.2%침체했다.12월 12 일시점으로, 한국이 안고 있던 민간 단기 대외채무 잔고는,320억 달러, 그 차입처의 내역은, 일본이 118억 달러,유럽 전체로118억 달러,아메리카 합중국에서42억 달러였다고 여겨지는[3].
그리고, 동년말에 한국은,디폴트 직전의 상황에까지 몰렸다.이것에 의해 IMF가 한국의 경제에 개입해,현대 그룹 등에 대해재벌 해체를 했다.먼저 말한,일.미.유럽의 민간은행에 대한 채무 반제 연기(리스케줄링(rescheduling))의 성공 여부가, 확실히 한국의 국가 파산을 회피할 수 있을지의 열쇠를 잡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은행에 대해서 반제 연기의 설득에 분주 해, 혼란하는 금융시장안에서 자국은행의 합의를 달아1998년1월 29일에는, 일.미.유럽 민간 은행단의 단기 채무 연기 교섭을 타결로 이끌었다.이것은 시장에 큰 안도감을 주어1월 29일에1 달러=1,678원인 환율은, 다음 1월 30일에는 1,524원까지 값을 되돌렸다.
원인 분석
개혁이 필요했던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재고가 사태를 크게 한 원인(이)었던 것은과 ETV2002 아시아 통화 위기의 진상 2에서강 경식이 분석하고 있다.
강 경식은 금영3 정권으로의 경제 담당이었지만, 김대중 정권이 개최한IMF 위기 사태의 책임을 묻는 국회 청문회에서냄새나서는, 「일본계의 금융기관이, 일본내의 예상외의 금융 사정으로부터 단기 채권의 만기 연장을 거부해, 1997년 11월-12월에 갑자기 70억 달러를 회수하며 간 것이 금융 위기를 가져온 원인」이라고 결정해 그것을 예측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고 스스로 금융 당국에는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라고 주장했다.이 주장에 대해, 전 정권을 추구하고 싶었던 김대중 정권은, 구미계 금융기관이 자금을 돌아온 것에 대해,일본계 금융기관은 끝까지 한국 금융기관에의 협조 융자에 따르고 있었다와 분명히 해, 격렬하게 비난 했다.[9]
그런데 그 이후,한국내에서는 그 주장이 독보해, 아시아 통화 위기는 일본의 자금 인상에 의해서 일으켜졌다고 하는 신문 기사등을 많이 볼 수 있지만,그것들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이다. [10] [11] [12]
또,통화 위기에 즈음해서는, 많은 은행이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100억 달러의 융자를 사용해도 경제 파탄은 피하지 않고 결국은국제통화기금의 관리하에 들어간[13].
일본판 Wiki보다
https://ja.wikipedia.org/wiki/아시아 통화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