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年前に橋上の市民を爆破した韓国大統領
1950年6月にに突如勃発した朝鮮戦争は、数々の歴史的教訓に満ちた凄惨な戦いだった。今回のテーマは、北朝鮮軍の戦車部隊が、ソウルをめがけ殺到する中で起きた驚愕のエピソードだ。市民や自軍兵士を置き去りにし、われ先に逃げ出した大統領の姿は、2014年のセウォル号事件の悲劇を思い出させる――。
■当てにならない責任者
2014年、韓国のセウォル号が沈没した際、避難誘導の任にあたるべき船長が真っ先に逃げました。船長は「船室で待機するように」との船内放送を流しており、この指示に従って船室にとどまった乗客は水が船室に流れ込み、出られな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その結果、修学旅行生ら293人の若い命が失われました。
1950年の朝鮮戦争の際、李承晩大統領はラジオで「国軍が北朝鮮軍をよく防いでいる。落ち着いて行動するように」という放送を流します。ソウルに北朝鮮軍が迫っていましたが、ソウル市民はこの放送を信じて、避難行動をとりませんでした。
ソウル北郊の住民たちが大挙、ソウルへと避難し、大砲の音が間近に聞こえた時、ようやくソウル市民は「これはタダ事ではない」と気付きはじめたのです。この時、李承晩大統領は既にソウルから脱出していました。
ソウル市民は北朝鮮に対し、「同族」の意識が強くありました(今でもある)。同じ民族どうしで、殺し合いなどできるはずがないと。民族を分断する戦争というものへの実感がほとんどなかったのです。そのため、市民の多くは大砲の音が間近に聞こえても、血に飢えた敵軍が迫っていると理解できなかったのです。
■ソウルは3日で地獄と化した
一方、「逃げ遅れれば殺される」と危険を感じ取ったソウル市民は避難しはじめました。ソウルから南へ逃れるには漢江(ハンガン)を渡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市民は漢江大橋に殺到し、付近は大混乱でした。
1950年6月25日、北朝鮮軍が38度線を越えて侵攻を開始して3日後、北朝鮮軍はソウル市内に突入します。韓国軍は北朝鮮軍の南下を食い止めるため、漢江大橋を爆破する計画を李承晩大統領に報告します。
ほとんどのソウル市民はまだ、市内から避難していません。橋を爆破するということは彼らを見殺しにするということです。李承晩はそれをわかっていながら、橋の爆破を許可しました。
午前2時30分、夜中でしたが漢江大橋の付近に、押すな押すなと市民が詰めかけていました。軍が市民を制止しようと試みましたが現場はパニック状態でもはや統制不可能でした。約4000名の市民が橋の上を徒歩で渡っている最中、橋は爆破されました。橋の上にいた市民約500~800名がこの爆破で死にました。
漢江北岸には多くの市民が取り残されました。この時、市民は自分たちが政府に見捨てられたのだと実感しました。
政府が見捨てたのは市民だけではありません。韓国軍の数千人に及ぶ部隊も、まだ取り残されていました。彼ら軍人は1000両にも及ぶ車両やおびただしい武器を持っていましたが北朝鮮軍にそれらを接収された上、殺されました。
市民は警官、役人、地主などから順番に、北朝鮮軍に殺されていきました。北朝鮮軍が軍事侵攻をしてからわずか3日、ソウルは地獄と変わり果ててしまいます。3日前まで、こんなことが起こるとは、ソウル市民は誰も想像しなかったでしょう。
■逃げに逃げた李承晩
漢江大橋は爆破された一般橋(人道橋)と、それとは別に、少し離れたところに鉄道橋が掛かっていました。軍はこの鉄道橋の爆破に失敗しました。そのため、北朝鮮軍はこの鉄道橋を通って、戦車部隊を南に送り込むことができました。
一般橋の爆破で、多くの市民が渡河できず、犠牲になりましたが、鉄道橋が破壊されなかったため、結局、北朝鮮軍を足止め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とんでもない失態です。当時の韓国軍の管理体制が、いかにずさんなものであったかがよくわかります。政府は爆破の失敗を現場の実行者のせいにして、彼らを処刑します。
李承晩大統領は大田(テジョン 韓国中部の都市)に逃げ、そこまで北朝鮮軍が迫るとさらに大田を捨て、大邱(テグ 韓国南部の都市)に逃げます。さらに、大邱にも北朝鮮軍が迫ると、釜山に逃げました。李承晩は7月2日に釜山に到着しています。
韓国軍は漢江大橋爆破以後、士気を大きく低下させて、指揮系統を失い、北朝鮮の進撃にまともに抗戦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でした。
しかし、ようやく開戦から1週間たった7月2日以降、アメリカ軍が本格的に部隊を送り込みます。李承晩ら政府の首脳部が当てにしていたアメリカの軍事介入はアメリカ本国との連絡調整、準備などに手間取り、遅れていました。アメリカのトルーマン大統領は朝鮮半島への介入に、慎重かつ消極的でした。この間、釜山が陥落していたとしても不思議ではない状態でした。
アメリカ帰りの李承晩は口を開けば、「アメリカ、アメリカ」でした。その彼のメンツも大いにつぶれたのです。過度な同盟依存はろくな結果とならない。歴史が教える教訓です。
67년전에 다리 위의 시민을 폭파한 한국 대통령
1950년 6월에에 갑자기 발발한 한국 전쟁은, 수많은 역사적 교훈으로 가득 찬 처참한 싸움이었다.이번 테마는, 북한군의 전차 부대가, 서울을 겨냥해 쇄도하는 가운데 일어난 경악의 에피소드다.시민이나 자군 병사를 방치로 해, 깨져 먼저 도망간 대통령의 모습은, 2014년의 세워르호사건의 비극을 생각나게 한다--.
■믿을 수 없는 책임자
2014년, 한국의 세워르호가 침몰했을 때, 피난 유도의 임에 해당해야 할 선장이 맨 먼저에 도망쳤습니다.선장은 「선실에서 대기하도록(듯이)」라는 선내 방송을 흘리고 있어 이 지시에 따라서 선실에 머무른 승객은 물이 선실에 흘러들어, 나올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그 결과, 수학 여행생등 293명의 젊은 생명이 없어졌습니다.
1950년의 한국 전쟁때,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로 「국군이 북한군을 잘 막고 있다.침착해 행동하도록(듯이)」라고 하는 방송을 흘립니다.서울에 북한군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만, 서울 시민은 이 방송을 믿고, 피난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서울북교의 주민들이 대거, 서울로 피난해, 대포의 소리가 가까이 들렸을 때, 간신히 서울 시민은 「이것은 공짜일은 아니다」라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이 때, 이 승만대통령은 이미 서울로부터 탈출하고 있었습니다.
서울 시민은 북한에 대해, 「동족」의 의식이 강하게 있었습니다(지금도 있다).같은 민족 끼리로, 살인등에서 올 리가 없으면.민족을 분단 하는 전쟁이라는 것에의 실감이 거의 없었습니다.그 때문에, 시민의 상당수는 대포의 소리가 가까이 들려도, 피에 굶은 적군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은 3일에 지옥화했다
한편, 「늦게 도망치면 살해당한다」라고 위험을 감지한 서울 시민은 피난하기 시작했습니다.서울에서 남쪽에 피하려면 한강(한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됩니다.시민은 한강 오오하시에 쇄도해, 부근은 대혼란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 도선을 넘어 침공을 개시해 3일 후, 북한군은 서울시내에 돌입합니다.한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 오오하시를 폭파할 계획을 이승만 대통령에 보고합니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은 아직, 시내로부터 피난하고 있지 않습니다.다리를 폭파하는 것은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둠으로 하는 것입니다.이승만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 다리의 폭파를 허가했습니다.
오전 2시 30분 , 한밤중이었지만 한강 오오하시의 부근에, 밀치락달치락과 시민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군이 시민을 제지하려고 시도했습니다만 현장은 패닉상태에서도는이나 통제 불가능했습니다.약 4000명의 시민이 다리 위를 도보로 건너고 있는 한중간, 다리는 폭파되었습니다.다리 위에 있던 시민약500~800명이 이 폭파로 죽었습니다.
한강 북해안에는 많은 시민이 남겨졌습니다.이 때, 시민은 스스로가 정부에 버림받았던 것이라고 실감했습니다.
정부가 버린 것은 시민만이 아닙니다.한국군의 수천인에 이르는 부대도, 아직 남겨지고 있었습니다.그들 군인은 1000량에 달하는 차량이나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북한군에 그것들이 접수된 후, 살해당했습니다.
시 백성은 경관, 공무원, 지주등에서 차례로, 북한군에 살해당해서 갔습니다.북한군이 군사 침공을 하고 나서 불과 3일, 서울은 지옥과 변해 버려 버립니다.3일전까지,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서울 시민은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었지요.
■도망치러 도망친 이승만
한강 오오하시는 폭파된 일반다리(인도다리)와 그것과는 별도로, 조금 떨어진 것에 철도교가 걸려 있었습니다.군은 이 철도교의 폭파에 실패했습니다.그 때문에, 북한군은 이 철도교를 다니며, 전차 부대를 남쪽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일반다리의 폭파로, 많은 시민이 도하 하지 못하고, 희생이 되었습니다만, 철도교가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북한군을 금족 할 수 없었습니다.터무니 없는 실태입니다.당시의 한국군의 관리 체제가, 얼마나 엉성한 것이었는지를 잘 압니다.정부는 폭파의 실패를 현장의 실행자의 탓으로 하고, 그들을 처형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대전 한국 중부의 도시)에 도망쳐 거기까지 북한군이 다가오면 한층 더 대전을 버리고 대구(대구 한국 남부의 도시)에 도망칩니다.게다가 대구에도 북한군이 다가오면, 부산에 도망쳤습니다.이승만은 7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한강 오오하시 폭파 이후, 사기를 크게 저하시키고, 지휘 계통을 잃어, 북한의 진격에 온전히 항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신히 개전으로부터 1주간 단 7월 2일 이후, 미군이 본격적으로 부대를 보냅니다.이승만등 정부의 수뇌부가 목표로 하고 있던 미국의 군사 개입은 미국 본국과의 연락 조정, 준비 등에 시간이 걸려, 늦었습니다.미국의 트르만 대통령은 한반도에의 개입에, 신중하고 소극적이었습니다.이전, 부산이 함락 하고 있었다고 해도 신기하다가 아닌 상태였습니다.
미국 돌아오는 길의 이승만은 입을 열면, 「미국, 미국」이었습니다.그 그의 체면도 많이 부서졌습니다.과도한 동맹 의존은 변변한 결과가 되지 않는다.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