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ベトナム戦争の韓国軍の虐殺被害者が訪韓 そこで見た「落差」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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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年に終結したベトナム戦争に延べ32万人を派遣した韓国軍は、9000人に上るベトナムの民間人を虐殺したと言われる。この虐殺の生存者が戦後70年、ベトナム戦争終結40年となる2015年、初めて韓国を訪れた。滞在中の出来事は、まるで2人の人生のように波乱万丈だった。ハフポスト韓国版に掲載された時事雑誌「ハンギョレ21」のルポを紹介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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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年、ベトナム戦争に派兵された韓国軍部隊が、南ベトナム解放民族戦線(ベトコン)とみられる男性を捕らえた場面


4月8日午前、ソウル中心部・鍾路にある社団法人・平和博物館のギャラリー「スペース99」。戦後70年、ベトナム戦争終結40年を機に開かれた「一つの戦争、二つの記憶」写真展に招待されたグエン・トン・ロンさん(64)とグエン・チ・タンさん(55)は複雑な表情だった。

写真展のオープニングレセプションが前日、思いがけずキャンセルされたうえ、自分たちの人生を台無しにした戦争が、韓国では「記念」するものとして記憶されていると知ったからだった。

写真展を開いた写真家のイ・ジェガプさんが、2人を展示場の片隅にある小さな部屋に案内した。韓国のあちこちにある戦争記念塔を撮った写真が、プロジェクターから天井に投射されていた。ベトナムのあちこちに韓国軍を忘れない60以上の「憎悪碑」が建っているのとは対照的に、韓国には至る所に100以上の「参戦記念碑」があると説明された。

韓国ではベトナム戦争を“記念”しています。韓国のこの戦争の記憶と、ベトナムの記憶の違いを示したかったのです

2人と一緒に訪韓したベトナム・ホーチミン戦争証跡博物館のフェン・グォク・ボン館長(53)は「私たちの博物館にも痛ましい写真を展示している。戦争の話を聞き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は、写真家も心苦しかっただろう。私たちは韓国の軍人も戦争の被害者だと思う。事実を正しく認識して謝罪したとき、彼らの心も楽になるだろう」と述べた。

前日、ベトナム戦争に参戦した元軍人の団体「大韓民国枯れ葉剤戦友会」ら、300人以上の退役軍人が、近くを取り囲んで平和博物館の写真展開幕を妨害した。そのことを念頭に置いた言葉だ。軍服とサングラス姿の元軍人たちは3〜4時間の間、軍歌を歌い、叫び声をあげ、「自分たちが罪のない人を虐殺したと罵倒されている」と抗議した。開幕イベントはキャンセルされ、ロンさんとタンさんは近くで開かれた非公開の記者懇談会で「真実を知らせたかっただけなのに、彼らがこの事実を認めないのがとても悲しい」と涙声で話した。

展示場は、ベトナムと韓国に建てられた戦争記念碑、民間人虐殺の状況を証言するベトナム人の写真で埋め尽くされた。人の写真の前には半透明のビニールが日よけのようにかぶせられていた。この作家は「ベトナム戦争当時、アメリカ軍は遺体を処理する際に、主にビニールを使った。ビニールは戦争を連想させるものなんです」とした。半透明のビニールの向こうにある写真には、しわくちゃの、生気のない老婆が、涙があふれんばかりの目で幼い孫の顔と向き合っていた。伝えたいが、伝えられない言葉を噛みしめる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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グエン・チ・タン(後列左)さんとグエン・トン・ロンさん(後列右)氏が4月8日昼、ソウル中心部の日本大使館前で開かれた元日本軍慰安婦らの「水曜集会」に参加し、元慰安婦らと一緒に立っている。

元慰安婦たちとの出会い

旧日本軍の元慰安婦を支援する民間団体「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挺対協)は、毎週水曜日にソウル中心部の日本大使館の前で「水曜集会」(水曜デモ)を開く。この日は、150人の参加者が集まった。 ロンさんとタンさんは写真展の観覧を終えた後、デモの場所まで歩いていって、2人の元慰安婦の後ろに立った。

「孫よ、あなたはこの言葉を覚えておけ。韓国の軍人は私たちを爆弾の穴に追い込んでみんな撃ち殺した。孫よ、大きくなってもこの言葉を覚えておけ」

ロンさんとタンさんが写真展の後で参加した、旧日本軍の元慰安婦や支援団体が日本大使館前で毎週水曜日に開いている「水曜デモ」のプラカードに書かれた文だ。

マスメディアのカメラマンが押しよせ、2人の表情はしばらく固くなった。誰かが「穏やかな表情で」と頼んで、やっとわずかな笑みを浮かべた。挺対協のユン·ミヒャン代表がマイクを握り「二度と、どんな戦争でも、性暴力の被害者や民間人虐殺の犠牲者を出してはなりません」と叫んだ。タンさんは「元慰安婦の方々と韓国の友人にあいさつします。私の名前はグエン・チ・タン、韓国軍による民間人虐殺の生存者です。虐殺のとき8歳でした」と話した。タンさんが発言するたびに、デモの参加者たちからため息が漏れた。

ロンさんとタンさんが旧日本軍の元慰安婦たちと会ったのは、この日が初めてではなかった。訪韓初日の4月4日、宿に荷物を置いてすぐに向かったのが、元慰安婦たちの共同生活施設「ナヌムの家」だった。

ロンさんは1966年2〜3月、計1004人が死亡したタイヴィン虐殺の生存者だ。虐殺で母と妹を失い、孤児となった。タンさんは1968年2月12日、住民74人が犠牲になったフォンニィ・フォンニャットの虐殺で生き残った。母と弟、姉、叔母、甥など5人の家族を失った。これらの事情を聞いた元慰安婦のユ・フイナムさん(87)は「戦争被害者の苦しみと悲しみを本当に理解できる人はあまりいない。同じ被害者に会うと本当にうれしい」と語った。加害者が韓国軍か日本軍かの違いだけで、被害者は簡単に共感して悲しみを分かち合った。

最初の記者会見とインタビュー

訪韓3日目の4月6日、ロンさんとタンさんは韓国の国会を訪れた。

「50年近い月日が流れたが、残酷な虐殺と苦痛に満ちた悲鳴は生々しく頭の中に残っています。あの日の記憶が呼び起こされると、半月は眠れず、体が痛みます。しかし、あの日を記憶し続け、伝えていくことが私の人生最後の任務と考えています」

国会議事堂の政論館でロンさんとタンさんは、これまで数百回繰り返し話してきた虐殺当時の様子を証言した。 韓国で、それも公開の場で話すのは初めてだった。 痛みを伴う証言への反応は、翌日に伝わった。

7日午後、写真展の開幕イベントはキャンセルされた。代わりに、宿泊していたホテルの小さな部屋で非公開の記者会見を開いた。ベッドを外に出し、他の部屋から椅子を借りて、わずか約10人の記者と2人のベトナム人、1人の通訳が座る席を用意した。記者の質問が始まる前にロンさんは「外に出て、あの人たちに話をしたい。記者たちに話して伝わるだろうか」と焦った。窓の外から、「枯れ葉剤戦友会」が歌う国歌が聞こえてきた。

ロンさんは「元軍人たちに会って、丁寧に挨拶をしようと思います。私がここにいるとは思っていないでしょう。韓国の国民に、韓国の軍人がベトナムにいたとき何が起きたのか、率直な私の心情を打ち明けたい」と言った。

窓の外からまた「ワーッ」という叫び声が聞こえてきた。ロンさんは「彼らを許す」とも述べた。「皆さんが過ちを犯したのは過去の旧制度で起きたことです。皆さんを許す心を十分に持っています。もし皆さんが過去の過ちを直視し、過ちを正す気持ちを持っているなら、私たちは皆さんを十分に理解できます」

「枯れ葉剤戦友会」の叫び声と喚声は続いた。ロンさんとタンさんのインタビューは、2人が経験した虐殺の状況について、具体的な証言に入った。

「銃声がより近くなり、住民の悲鳴と叫び、大声が一緒に聞こえてきました。やがて音は遠ざかりましたが、妹と私の間にいた母は、私たちに手拭いをかけていました。母の手拭いのぬくもりで、お腹が空いたことも、のどが乾いたことも忘れていました」

ロンさんの母は、虐殺が起きた日は一日中、ロンさんと妹を抱いて防空壕の中に隠れていたが、遅くに韓国軍に見つかった。よその村の住民と一緒に連行され、銃と手榴弾を乱射された。母は下半身がほぼなくなった状態で発見された。妹は頭がめちゃくちゃに壊れていた。母の話をするとき、ロンさんは目を赤くして言葉を詰まらせた。見守っていたタンさんが腕をさすり、何とか証言を続けた。証言が具体的になればなるほど、頰が震えて涙が浮かんだ。窓の外から、マイクを握った人々の叫びが聞こえてきた。

タンさんも証言を続けた。「まだら模様の服を着た韓国の軍人が、子供たちが入っていた防空壕に手榴弾を入れるふりをしながら『出てこい』と言いました。出てこなければ投げるということでした。あまりにも怖くて出て行くと、一人ずつ銃で撃たれました

タンさんの兄は、その場で片方の尻が吹っ飛び、一緒にいた叔母は、韓国軍の銃剣に突かれて死んだ。姉と弟、甥もみんな銃で撃たれて死んだ。話が進むにつれ、タンさんの嗚咽はすすり泣きに変わった。「あのときは8歳だったが、今でもあの日のことを生々しく、鮮明に覚えている」と語った。

その日の夕方、2人を慰労する会が催された。2人に縁のある韓国人が一堂に集まった。ベトナムとの友好を目指す若い作家たち、ベトナム平和医療連帯、保健医療労組、挺対協、アジアフェアトレードネットワークなどの100人余りが招待された。ベトナム戦争に参戦した人もいた。

写真家のイ・ジェガプさんはこの席で「2人に申し訳ないという言葉を、このような場でできるようになってよかったと思う。韓国人にも良心的な人がたくさんいることを知ってほしい」とあいさつした。ロンさんは「韓国に来たのは、ただ共感と平和を分かち合うためです」と答えた。通訳の韓国人は「ロンさんは足に残っていた手榴弾の破片を取り除いたが、ずっと足がしびれていた。でも韓国に来てからは痛くな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タンさんはもう韓国人が怖く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と紹介した。集まった人々が立ち上がって拍手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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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月9日午後、「大韓民国枯れ葉剤戦友会」大邱支部の会員が大邱・慶北大学のキャンパスで集会を開いた。チョン・チュングァン大邱支部長(73、左から2番目)は「どこの国の戦争でも、少数の民間人が被害に遭うのは仕方がない」と述べた。

枯れ葉剤戦友会「突撃、前へ」

ロンさんとタンさん一行は4月8日、水曜デモの後、釜山に向かった。この日の夕方、釜山市の公園で、翌日には大邱の慶北大学で講演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枯れ葉剤戦友会」が行く先々で2人を出迎えた。8日の懇談会場となっていた釜山の公園の入り口で「枯れ葉剤戦友会」釜山支部の会員約170人が反対集会を開いた。

9日には大邱・慶北大学のキャンパス内で、「枯れ葉剤戦友会大邱支部」の会員40〜50人がデモをした。

「通訳の韓国人を殺せ!」

「こんな行事を許可した総長は辞任しろ!」

夕方、キャンパスに下品な言葉がこだました。見物していた大学生と教職員が呆れた表情を浮かべた。「学校の中でこんなの許可していいのか」「学生会は何をしている」。「枯れ葉剤戦友会」のチョン・チュングァン大邱支部長(73)は「どこの国の戦争でも、少数の民間人が被害に遭うのは仕方がない。でも私たちはあの時、民間人は撤退するようにビラをまいたし放送もした。残っていたのはみんなベトコンだ」と言った。ある記者が尋ねた。赤ちゃんも死んでいる。それはどう説明するんでしょうか?」。戦友会のメンバーがざわめいた。「事情も知らないくせに何を言う!」「子供がベトコンのいる防空壕にいたんだ」。戦友会会員のキム・テボン氏が「行くぞ。俺たちが入れないように、わざと記者が邪魔しているんだ」と会場に向かおうとした。チョン支部長が「ちょっと待て」と立ちふさがった。記者を取り囲んだ戦友会のメンバーはうろたえた。ときどき突撃、前へ!」「自由大韓!」といった叫び声が上がった。いつの間にか日が暮れていた。

会場になった講堂には200人ほど聴衆が集まっていた。4箇所の出入口のうち3つは閉められていた。予定時間から15分ほど遅れてロンさんとタンさん一行が入ってきた。司会者は「外にいる『枯れ葉剤戦友会』のメンバーが『自分たちも撤収するから大義名分がほしい。記者を撤収させろ』と言ってきた。だからお願いします。記者さん外に出てください。私は言いましたからね」と冗談を言った。聴衆が笑った。参加者の紹介が終わり、ロンさんが話し始めた。

「私はベトナムから来たグエン・トン・ロンです。始める前に、まず一言申し上げます。今日、私が話そうとしていることは、私の目で見て、耳で聞いて、体で体験したことです」

拍手が沸き起こった。ロンさんとタンさんが韓国で過ごす最後の夜だった。会場の外にいた「枯れ葉剤戦友会」のメンバーは、いつの間にかいなくなっていた。ロンさんとタンさんがすでに数百回繰り返した話に、人々は耳を傾けていた。

「私は心臓で話をしています。歴史の真実を聞いてもらうためです。怨恨や憎悪をあおるつもりもありません。韓国軍の民間人虐殺の生存者です」。ロンさんはこの日も、母の死のところで涙声になり、言葉を詰まらせた。




베트남인 피해자를 원한국 군인이 위협하는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의학살 피해자가 방한 거기서 본 「낙차」란


투고일:

1975년에 종결한베트남 전쟁에 총계 32만명을 파견한한국군은,9000명에 달한다베트남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말해진다.이학살의 생존자가전후 70년,베트남 전쟁 종결 40년이 되는 2015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체제중의 사건은, 마치 2명의 인생과 같이 파란만장이었다.하후포스트 한국판에 게재된 시사 잡지「한겨레 21」의 르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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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 부대가, 남 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Vietcong)으로 보여지는 남성을 잡은 장면


4월 8일 오전, 서울 중심부·종로에 있는 사단법인·평화 박물관의 갤러리 「스페이스 99」.전후 70년, 베트남 전쟁 종결 40년을 기회로 열린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사진전에 초대된 구엔·톤·론씨(64)와 구엔·치·탄씨(55)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사진전의 오프닝 리셉션이 전날, 뜻하지 않게 캔슬된 뒤, 스스로의 인생을 엉망으로 한 전쟁이, 한국에서는 「기념」하는 것으로서 기억되고 있는과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진전을 연 사진가의 이·제가프씨가, 2명을 전시장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방에 안내했다.한국의 여기저기에 있는 전쟁 기념탑을 찍은 사진이, 프로젝터로부터 천정에 투사 되고 있었다.베트남의 여기저기에 한국군을 잊지 않는 60이상의 「증오비」가 세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에는 이르는 곳에 100이상의 「참전 기념비」가 있다라고 설명되었다.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기념”하고 있습니다.한국의 이 전쟁의 기억과 베트남의 기억의 차이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2명과 함께 방한한 베트남·호치민 전쟁 증적 박물관의 펜·그크·본 관장(53)은 「우리의 박물관에도 참혹한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전쟁의 이야기를 계속 듣지 않으면 안 된다고는, 사진가도 마음이 괴로왔을 것이다.우리는한국의 군인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해 사죄했을 때, 그들의 마음도 편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전 군인의 단체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등,300명 이상의 퇴역군인이, 근처를 둘러싸 평화 박물관의 사진전 개막을방해했다.그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군복과 선글래스차림의 전 군인들은 3~4시간의 사이, 군가를 노래해,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주어 「스스로가 죄의 없는 사람을 학살했다고 매도되고 있다」라고 항의했다.개막 이벤트는 캔슬되어 론씨와 탄씨는 근처에서 열린 비공개의 기자 간담회에서「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 뿐인데, 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매우 슬프다」와 울먹이는 소리로 이야기했다.

전시장은, 베트남과 한국에 지어진 전쟁 기념비, 민간인 학살의 상황을 증언하는 베트남인의 사진으로 가득 찼다.사람의 사진의 전에는 반투명의 비닐이 차양과 같이 씌여지고 있었다.이 작가는 「베트남 전쟁 당시 , 미군은 사체를 처리할 때에, 주로 비닐을 사용했다.비닐은 전쟁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반투명의 비닐의 저 편에 있는 사진에는, 인색하면의, 생기가 없는 노파가, 눈물이 넘치 듯이 눈으로 어린 손자의 얼굴과 마주보고 있었다.전하고 싶지만, 전해지지 않는 말을 씹어 습기차도록(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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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엔·치·탄(뒷줄왼쪽)씨와 구엔·톤·론씨(뒷줄우) 씨가 4월 8일 낮, 서울 중심부의 일본 대사관앞에서 열린 전 일본군위안부등의 「수요일 집회」에 참가해, 전 위안부등과 함께 서있다.

원위안부들과의 만나

구일본군의 원위안부를 지원하는 민간 단체 「한국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정 대 협)은, 매주 수요일에 서울 중심부의 일본 대사관의 앞에서 「수요일 집회」(수요일 데모)을 연다.이 날은, 150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론씨와 탄씨는 사진전의 관람을 끝낸 후, 데모의 장소까지 걸어가고, 2명 원위안부의 뒤로 섰다.

「손자야, 당신은 이 말을 기억해 두어라.한국의 군인은 우리를 폭탄의 구멍에 몰아넣어 모두 쏘아 죽였다.손자야, 커져도 이 말을 기억해 통」

론씨와 탄씨가 사진전의 다음에 참가한, 구일본군의 원위안부나 지원 단체가 일본 대사관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려 있는 「수요일 데모」의 플래카드에 쓰여진 문장이다.

매스 미디어의 카메라맨이 밀려 들어 2명의 표정은 당분간 단단해졌다.누군가가 「온화한 표정으로」라고 부탁하고, 겨우 몇 안 되는 미소를 띄웠다.정 대 협의 윤·미할 대표가 마이크를 잡아「두 번 다시, 어떤 전쟁이라도, 성 폭력의 피해자나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를 내고는 되지 않습니다」라고 외쳤다.탄씨는 「원위안부의 분들과 한국의 친구에게 인사합니다.나의 이름은 구엔·치·탄,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입니다.학살 때 8세였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탄씨가 발언할 때마다, 데모의 참가자들로부터 한숨이 새었다.

론씨와 탄씨가 구일본군의 원위안부들과 만난 것은, 이 날이 처음은 아니었다.방한 첫날의 4월 4일, 숙소에 짐을 두자마자로 향한 것이, 원위안부들의 공동 생활 시설 「나눔의 집」이었다.

론씨는 1966년 2~3월,합계 1004명이 사망한 타이 빈 학살의 생존자다.학살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어, 고아가 되었다.탄씨는 1968년 2월 12일, 주민 74명이 희생이 된 폰니·폰낭트의 학살로 살아 남았다.어머니와 제, 언니(누나), 숙모, 조카 등 5명의 가족을 잃었다.이러한 사정을 (들)물은 원위안부의 유·후이남씨(87)는 「전쟁 피해자의 괴로움과 슬픔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같은 피해자를 만나면 정말로 기쁘다」라고 말했다.가해자가 한국군이나 일본군인가의 차이만으로, 피해자는 간단하게 공감하고 슬픔을 분담했다.

최초의 기자 회견과 인터뷰

방한 3일째의 4월 6일, 론씨와 탄씨는 한국의 국회를 방문했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잔혹한 학살과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그 날의 기억이 불러일으켜지면, 반달은 자지 못하고, 몸이 아픕니다.그러나, 그 날을 계속 기억해 전해 가는 것이 나의 인생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회 의사당의 정론관에서 론씨와 탄씨는,지금까지 수백회 반복해 이야기해 온 학살 당시의 님 아이를 증언했다. 한국에서, 그것도 공개의 장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픔을 수반하는 증언에의 반응은, 다음날에 전해졌다.

7일 오후, 사진전의 개막 이벤트는 캔슬되었다.대신에, 숙박하고 있던 호텔의 작은 방에서 비공개의 기자 회견을 열었다.침대를 밖에 내, 다른 방으로부터 의자를 빌리고, 불과 약 10명의 기자와 2명의 베트남인, 1명의 통역이 앉는 석을 준비했다.기자의 질문이 시작되기 전에 론씨는 「밖에 나오고,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기자들에게 이야기해 전해질까」라고 초조해 했다.창 밖으로부터, 「고엽제 전우회」가 노래하는 국가가 들려 왔다.

론씨는 「 전 군인들을 만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려고 합니다.내가 여기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한국의 국민에게, 한국의 군인이 베트남에 있었을 때 무엇이 일어났는지, 솔직한 나의 심정을 털어 놓고 싶다」라고 했다.

창 밖으로부터 또 「워」라고 하는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론씨는 「그들을 허락한다」라고도 말했다.「여러분이 잘못을 범한 것은 과거의 구제도로 일어난 것입니다.여러분을 허락하는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만약 여러분이 과거의 잘못을 직시 해, 잘못을 바로잡는 기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엽제 전우회」의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와 환성은 계속 되었다.론씨와 탄씨의 인터뷰는, 2명이 경험한 학살의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인 증언에 들어갔다.

「총성이 보다 가깝게 되어, 주민의 비명이라고 외쳐, 큰 소리가 함께 들려 왔습니다.이윽고 소리는 멀어졌습니다만, 여동생과 나의 사이에 있던 어머니는, 우리에게 수건을 걸고 있었습니다.어머니의 수건의 온기로, 배가 고픈 일도, 목이 마른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론씨의 어머니는, 학살이 일어난 날은 하루종일, 론씨와 여동생을 안아 방공호가운데에 숨어 있었지만, 늦게 한국군에게 발견되었다.다른 마을의 주민과 함께 연행되어 총과 수류탄이 난사되었다.어머니는 하반신이 거의 없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여동생은 머리가 엄청에 망가져 있었다.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론씨는 눈을 붉게 하고 말을 막히게 했다.지켜보고 있던 탄씨가 팔을 문질러, 어떻게든 증언을 계속했다.증언이 구체적으로 되면 그렇구나,?하지만 떨리고 눈물이 떠올랐다.창 밖으로부터, 마이크를 잡은 사람들의 절규가 들려 왔다.

탄씨도 증언을 계속했다.「아직들 모양의 옷을 입은 한국의 군인이, 아이들이 들어가 있던 방공호에 수류탄을 넣는 체를 하면서 「나와라」라고 말했습니다.나오지 않으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너무 무서워서 나가면, 한 명씩 총으로 총격당했습니다

탄씨의 형(오빠)는, 그 자리에서 다른 한쪽의 엉덩이가 날아가, 함께 있던 숙모는, 한국군의 총검에 찔려 죽었다.언니(누나)와 남동생, 조카도 모두총으로 총격당해 죽었다.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에 따라, 탄씨의 오열은 흐느껴 울어로 바뀌었다.「그 때는 8세였지만, 지금도 그 날을 생생하게,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날의 저녁, 2명을 위로하는 회가 개최되었다.2명에게 인연이 있는 한국인이 일당에 모였다.베트남과의 우호를 목표로 하는 젊은 작가 서, 베트남 평화 의료 연대, 보건의료 노조, 정 대 협, 아시아 공정 무역 네트워크등의 100명남짓이 초대되었다.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사람도 있었다.

사진가의 이·제가프씨는 이 자리에서 「2명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말을, 이러한 장소에서 가능하게 되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한국인에도 양심적인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알면 좋겠다」라고 인사했다.론씨는 「한국에 온 것은, 단지 공감과 평화를 분담하기 (위해)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통역의 한국인은 「론씨는 다리에 남아 있던 수류탄의 파편을 없앴지만, 쭉 다리가 저리고 있었다.그렇지만 한국에 오고 나서는 아프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탄씨는 더이상 한국인이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소개했다.모인 사람들이 일어서 박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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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오후,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대구 지부의 회원이 대구·경북대학의 캠퍼스에서 집회를 열었다.정·츄그 대구 지부장(73, 왼쪽에서 2번째 )은 「어떤 나라의 전쟁으로도, 소수의 민간인이 피해를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고엽제 전우회 「돌격, 전에」

론씨와 탄씨일행은 4월 8일, 수요일 데모의 뒤, 부산으로 향했다.이 날의 저녁, 부산시의 공원에서, 다음날에는 대구의 경북대학으로 강연하게 되어 있었다.「고엽제 전우회」가 가는 곳마다 2명을 마중나갔다.8일의 간담회장이 되고 있던부산의 공원의 입구에서 「고엽제 전우회」부산 지부의 회원 약 170명이 반대 집회를 열었다.

9일에는 대구·경북대학의 캠퍼스내에서, 「고엽제 전우회 대구 지부」의 회원 40~50명이 데모를 했다.

「통역의 한국인을 죽여라!」

「이런 행사를 허가한 총장은 사임해라!」

저녁, 캠퍼스에 천한 말이 메아리쳤다.구경하고 있던 대학생과 교직원이 기가 막힌 표정을 띄웠다.「학교안에서 이런 건 허가해도 좋은 것인가」 「학생회는 무엇을 하고 있다」.「고엽제 전우회」의 정·츄그 대구 지부장(73)은「어떤 나라의 전쟁으로도, 소수의 민간인이 피해를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그렇지만 우리는 그 때, 민간인은 철퇴하도록(듯이) 빌라를 뿌렸고 방송도 했다.남아 있던 것은 모두 Vietcong다」라고 말했다.있다 기자가 물었다.아기도 죽어 있다.그것은 어떻게 설명하는 것입니까?」.전우회의 멤버가 웅성거렸다.「사정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말을 한다!」 「아이가 Vietcong의 있는 방공호에 손상되었다」.전우회 회원 김·테본씨가「갈거야.우리들이 들어갈 수 없게, 일부러 기자가 방해 하고 있다」와 회장을 향하려고 했다.정 지부장이 「조금 기다릴 수 있다」라고 가로막고 섰다.기자를 둘러싼 전우회의 멤버는 당황했다.가끔돌격, 전에!」 「자유 대한!」(이)라고 하는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올랐다.어느새인가 해가 지고 있었다.

회장이 된 강당에는 200명 정도 청중이 모여 있었다.4개소의 출입구중 3는 닫을 수 있고 있었다.예정 시간부터 15분 정도 늦어 론씨와 탄씨일행이 들어 왔다.사회자는 「밖에 있는 「고엽제 전우회」의 멤버가 「스스로도 철수하기 때문에 대의명분을 갖고 싶다.기자를 철수시켜라」라고 말해 왔다.그러니까 부탁합니다.기자씨외에 나와 주세요.나는 말했으니까」(이)라고 농담을 했다.청중이 웃었다.참가자의 소개가 끝나, 론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나는 베트남에서 온 구엔·톤·론입니다.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마디 말씀드립니다.오늘, 내가 이야기하려 하고 있는 것은, 나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묻고, 몸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박수가 끓어올랐다.론씨와 탄씨가 한국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었다.회장의 밖에 있던 「고엽제 전우회」의 멤버는, 어느새인가 없어지고 있었다.론씨와 탄씨가 벌써 수백회 반복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나는 심장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역사의 진실을 (들)물어 주기 (위해)때문입니다.원한이나 증오를 부추길 생각도 없습니다.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입니다」.론씨는 이 날도, 어머니의 죽음의 곳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되어, 말을 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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